266화 이현종이? (1)
이현종이 이렇게 당황해하는 모습을 구경할 일이 또 있을까?
아마 신현태나 수혁이 정면으로 보고 있었다면 두말 않고 카메라부터 꺼내 들었을 터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둘은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다.
수혁은 아이와 어머니에게 감사 인사를 받느라 그랬고, 신현태는 그런 수혁에게 칭찬을 건네느라 그랬다.
“뭘 그렇게 놀래? 아들 칭찬하는데. 어디서 들으니까 헹가래도 친다던데.”
“아니……. 어……. 우리…… 우리 이렇게 말해도 되는 사이…… 인가?”
그 틈을 타서라고 하기엔 좀 뭣했지만.
아무튼, 이기자 교수와 이현종의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동긴데, 대화 못 해?”
“그……. 이렇게 갑자기? 말 섞은 지 오래됐잖아?”
“그거야 원장님이 하도 나를 피하니까 그런 거고. 오늘은 병실에 찾아왔으니 뭐 상관없지.”
“그…….”
이현종은 하아 하는 한숨을 깊이 내쉬고는 고개 숙인 그대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생각해 보니까 여기 온 게 비단 수혁 때문만은 아닌 거 같기도 했다.
수십 년간 피해 다녔던 이기자 교수의 얼굴을 막상 마주하고 보니 좀 반갑기도 하지 않았던가?
실제로 요 며칠 바쁘단 핑계로 밖으로 나돈 것도 그 때문이기도 했다.
‘어제도 꿈에 나왔지?’
세상에 사춘기 청소년도 아니고.
예순도 넘었는데 꿈에 좋아하는 사람이 나올 줄이야.
부끄러워서 어디 얘기할 사람도 없었다.
“뭐 별다른 얘기는 아니고, 그냥 수혁이 잘 키웠다고. 어디 가서 누구랑 낳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해? 의학이랑 결혼했다더니.”
이기자 교수는 귀까지 빨개진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현종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이게 정말 대견하다는 건지, 아니면 그동안 구라 치고 다닌 것에 대한 비꼼인지 헷갈리는 상황이었다.
전자라면 억울할 게 없겠지만 후자라면 억울해서 환장 돌아가실 지경이었다.
[아냐, 기자야. 나 너 말고는 좋아한 사람이 없어!]
당장 이렇게라도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수혁의 미래를 생각하자니 또 그럴 수도 없었다.
심지어 그런다고 뭐 이기자 교수랑 잘될 가능성도 없지 않겠는가.
둘 다 중년도 넘어 노년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아무튼, 종종 봅시다. 원장님.”
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으려니 이기자가 또다시 등을 두드리고는 병실을 빠져나갔다.
이현종은 그제야 후 하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 수 있었다.
낮술이라도 거하게 자신 것처럼 붉은 얼굴을 하고서였는데, 하필 그때 수혁이 이현종을 보고야 말았다.
아마 수혁 혼자 본 것이었다면 별 상관없었을 터였다.
어차피 이현종이 괴짜 짓 하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으니까.
그냥 그런갑다 넘어갈 만한 일이었다.
[흐음, 이상하네.]
하지만 바루다는 편견이 없는 존재 아닌가.
누구를 겪든 데이터를 기반으로 판단하는 녀석이라고 보면 되었다.
그런 바루다의 눈에는 이현종이 지금 보이고 있는 행태가 너무도 이상하게만 보였다.
‘왜?’
[저번엔 그냥 이현종 개인의 일탈 혹은 바이어스(Bias: 편향)으로 판단하고 넘어갔는데, 오늘까지 저러고 있으니 확실히 이상합니다.]
‘우리 원장님 이상한 게 하루 이틀인가.’
[이기자 교수 앞에서 그 이상함의 정도와 종류가 달라집니다.]
‘응?’
이기자 교수라.
변수에 그 사람을 넣고 보니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기는 했다.
바루다는 수혁의 심정 변화를 인식한 채로 말을 이어 나갔다.
[아시겠지만 이현종의 평소 대인 관계 능력은 유아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친할수록 더 투정을 부리고, 심술을 부리는 경향이 있죠.]
‘음.’
원장이자 양아버지격인 사람에게 유아적인 말을 하는 게 좀 불경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오히려 너무 가까운 사이이기에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확실히 이현종은 나이에 비해 어린 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친구들에게 그런 사람이 이성 관계에서는 성숙할까요? 데이터를 살펴보면 오히려 반대인 경우는 있어도, 그럴 확률은 극히 드뭅니다.]
‘듣고 있어.’
수혁은 이제 보호자와 아이의 말에 대강만 반응을 해 주며 바루다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예민한 사람이라면 조금 무성의한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별 상관 안 할 터였다.
어차피 환자는 좋아지지 않았던가.
[이러한 이론적 근거를 토대로 현재 이현종이 보이고 있는 행동을 분석하자면, 이현종은 이기자 교수를 좋아합니다. 좋아해서 피하고, 좋아해서 할망구라고 부르고, 좋아해서 앞에서 얼굴이 빨개진 채 숨을 몰아쉬고 있는 것이죠.]
‘허.’
단편적으로 볼 때는 전혀 그렇게 생각되지 않았는데.
방금 바루다가 말한 것처럼 종합해서 보니 확실히 좋아하는 거 같았다.
예순 넘은 사람이 누군가를 이성적으로 좋아한다는 게 좀 이상하긴 했지만.
수혁은 바루다를 몸에 품은 뒤 상당히 열린 사람이 된 마당이었다.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현실로 벌어지는 세상인데, 절대로 일어나지 못할 일이 뭐 있겠는가.
‘어쩌지?’
[네?]
‘어쩌냐고.’
[뭘 어쩌라고 말을 꺼낸 건 아닌데요. 그냥 제가 이만큼 분석 잘한다는 걸 알리기 위해 한 말입니다만.]
요약하자면 자기 이만큼 잘났다라는 말에 불과했다 이 말이었다.
수혁도 깡통이면 그런갑다 하고 넘어갈 텐데.
아쉽게도 수혁은 사람이었다.
그것도 이현종에게 실로 말할 수 없을 만큼의 은혜를 입은.
‘야, 그래도 도리가 있지. 저렇게 둬? 짝사랑하게? 동기잖아, 두 분. 어쩌면 수십 년 동안…….’
[설마 그럴까요? 수혁도 아니고, 이현종인데. 그냥 늘그막에 늦바람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기자 교수, 누가 봐도 멋진 사람이지 않습니까?]
‘음……. 지금 사랑에 빠졌다고?’
[그랬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둘의 대화는 수혁이 예상했던 것보다 조금 길게 늘어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도 조금씩 더 어색해지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신현태는 눈치챌 정도가 되었다.
‘수혁이 뭔 고민이 있나?’
신현태는 정말 수혁 바라기 아니던가.
사실 눈치채지 못하면 그게 이상한 일이었다.
해서 병실에서 빠져나와 지하 1층 베이커리에서 슈와 커피를 먹기 시작하자마자 입을 열었다.
“수혁아, 걱정 있어?”
“네?”
그때까지도 이현종을 어떻게 할까에 대한 고민에 시달리던 수혁이 퀭한 눈으로 신현태를 바라보았다.
이현종을 힐끔거리면서였는데, 신현태는 역시나 그것도 놓치지 않았다.
‘잉, 둘이 무슨 문제 있나.’
가깝다는 말로도 부족한 사이 아닌가.
아마 진짜 부자지간이라도 이보다 가깝진 않을 터였다.
특히 수혁을 향한 이현종의 애정은 조금 지나치지 않나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신현태는 오히려 그래서 더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다라는, 사실과는 무관한 결론을 내렸다.
‘현종이 형 자리 비우면 다시 물어봐야지.’
그렇게 결론을 내린 신현태는 즉시 작전에 돌입했다.
“형, 오늘 커피 제대로 내렸네. 향도 맛도 좋아.”
“그래?”
슬프지만 이제 형도 나이가 들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아도 소변이 잦아졌을 텐데, 카페인까지 들어가면 당해 낼 도리가 없을 터였다.
실제로 최근 골프 칠 때도 그늘집만 들르면 그렇게 화장실부터 찾게 되었다는 걸, 신현태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음.”
아니나 다를까.
커피를 물 먹는 것처럼 들이키던 이현종은 곧 신호가 오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안해, 형.’
신현태는 속으로 사과하며 입을 열었다.
당연히 표정에는 속내가 단 하나도 드러나지 않았다.
“형, 화장실 다녀오려면 다녀와. 자리 지키고 있을게.”
“어, 그래. 어유 물을 너무 많이 마셨나.”
“그러더라. 아까부터 물을 그냥.”
“응, 알았다.”
“다녀오셔요.”
신현태뿐 아니라 수혁도 물을 많이 마셔서라기보다는 그냥 나이 때문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지만.
굳이 입 밖에 내진 않았다.
가뜩이나 심란할 텐데, 거기에 고민을 하나 더 얹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해서 다시 슈나 씹을 생각에 고개를 돌리고 있으려니 신현태가 말을 걸어왔다.
전에 없이 진중한 얼굴을 하고서였다.
“수혁아, 너 혹시 현종이 형이랑 문제 있니?”
그에 비해 꺼내는 말은 어이없기 그지없었다.
문제가 있긴 뭐가 있단 말인가.
전에 없이 좋은 사이인데.
특히 가까운 친지가 없다시피 한 수혁에게는 정말이지 드물게 소중한 관계라 할 수 있었다.
“아, 아뇨?”
“아까 근심 어린 얼굴로 현종이 형 보던데……. 진짜 없어?”
“아.”
“그렇지? 뭐가 있는 거지?”
있긴 한데 말해도 되나 싶었다.
그때 바루다가 입을 열었다.
[오래된 짝사랑이라면 신현태는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럼 돕자고 하면 될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착각이라고 얼버무리시죠. 어차피 신현태도 수혁이라면 죽고 못 사는 사람이니 괜찮을 겁니다.]
상당히 안심시켜 주는 말 아닌가.
물론 의학적인 얘기가 아닐 땐 바루다의 신뢰성이 훅 떨어진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수혁은 자기 감 보다는 바루다를 신뢰했다.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대개는 그러했다.
“그…… 그런 게 아니라, 이현종 원장님 말이에요.”
“어, 뭐든 말해 봐.”
“혹시 이기자 교수님 좋아해요?”
“풋, 뭐?”
상당히 충격이었는지 신현태는 입에 머금고 있던 커피를 내뱉고야 말았다.
다행인 것은 지하 1층 카페가 상당히 넓고 또 번잡하다는 점이었다.
그 누구도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너…… 너 그거 어디서 들었어?”
[맞군요. 좋아하는 게……. 반응 보니까 하루 이틀 된 것으로 보이진 않습니다.]
수혁은 바루다의 분석을 들어 가며 말을 이었다.
“들은 건 아니고요. 그냥 이기자 교수님 앞에서 아빠가 이상한 거 같아서요. 얼굴도 붉어지고.”
“야……. 나만 느낀 게 아니구나. 아이고…….”
“진짜군요?”
“아니, 이게 사실 오래된 일이야. 진짜 한 30년은 됐지. 그때 이제 내가 1년 차고 현종이 형이 4년 차였거든.”
신현태는 그때 역시나 소아과 4년 차 치프이자, 온 병원에서 제일 인기 많았던 이기자 교수에게 이현종이 고백했던 일을 얘기해 주었다.
워낙에 존경하던 형이었기에 큰마음 먹고 아버지 차까지 몰래 끌고 와서 트렁크에 풍선 채우고 고백하게 했는데 풍선이 다 날아간 자리에는 울먹이는 이현종만 있었더라는 말로 이야기는 끝을 맺었다.
“아이고……. 근데 그걸 아직도 좋아하는 거예요?”
“나도 몰랐네. 그 후로는 오히려 싫어하는 줄 알았거든, 얘기만 나오면 질색팔색을 하길래. 맨날 할망구라고 하고.”
“좋으면서 싫은 척한 거네요.”
“그런 거지……. 나원 참. 저 형이 의외로 순정파라니까……. 뭔 짝사랑을 수십 년 동안 하니. 신부님이야?”
“도와줄까요?”
“응, 돕자고?”
“이기자 교수님도 돌싱이시잖아요.”
“야……. 그렇긴 한데, 어떻게 돕냐. 나 이기자 교수님 연락처도 몰라.”
신현태는 이기자 교수의 얼굴을 떠올린 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멋진 선배긴 하지만 동시에 무서운 선배기도 했다.
너무 잘난 사람은 원래 후배에게 독이 되기도 하는 법 아니던가.
그러나 수혁의 이어지는 말을 듣고 나니 조금 생각이 바뀌긴 했다.
“전 알아요. 이번 일 때문에 저녁 산다고 내과 교수님들도 한두 분 같이 모시고 오라고 하셨어요.”
“그, 그래?”
“그때 같이 가서……. 떠보면 어때요?”
“허……. 떠본다라. 난 무서운데.”
“제가 해 볼까요? 아빠가 외로워한다 뭐 이런 식으로?”
“음.”
신현태는 아빠 걱정할 시간에 네가 좀 어떻게 해 보란 말을 하고 싶었지만.
효자 노릇 하겠다고 눈을 빛내고 있는데 어찌 그런단 말인가.
해서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
이현종은 딱 그때 돌아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을 한 채였다.
“뭔 얘기를 그렇게 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