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이현종이? (3)
“헐.”
제일 놀란 것은 수혁이 아니라 신현태 과장이었다.
현종이 형 어떻게 좀 해 주려고 왔는데, 이제 보니 이기자 교수는 전혀 다른 생각 중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가.
‘가능성이 1도 없는 거 아닌가?’
이기자 교수는 아마도 수혁이 이현종의 친아들일 거라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철저히 뒷조사를 해 보지 않는 한 절대 알 수 없는 사실인데, 의사들이 대체 무슨 방법이 있어 상대의 뒤를 털 수 있을까.
‘사돈 맺으려 하고 있는데……. 그걸 소개팅시켜 주겠다고 했으니. 아니, 선인가? 선이라기에도 나이가 많은데……. 뭐지?’
원래도 멘탈이 약한 신현태 아니던가.
이런 상황에서 정신줄 붙잡기란 불가능하다고 보면 되었다.
혼란스럽기는 수혁 또한 마찬가지였다.
[또 심장박동 수 올라가네…….]
바루다는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얼굴을 하고선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수혁의 반응이 여간 심상찮은 게 아니었다.
금사빠답게 어느새 또 사랑에 빠진 게 분명했다.
언제는 우하윤 같은 사람이 없다고 난리 블루스를 추더니, 이름도 모르는 사람에게 사랑에 빠져 버릴 줄이야.
[미친놈이……. 이러다 부정맥 오겠어!]
다행한 점은 바루다에겐 자율신경 조절 능력이 있다는 것이었다.
금세 수를 써서 수혁의 심장박동 수를 강제로 끌어 내렸다.
우리 몸과 마음은 이어져 있기에 보통 이러면 마음의 설렘도 좀 수그러들어야 할 텐데.
그렇지가 않았다.
‘개이쁘다…….’
[하이고…….]
‘사랑한다…….’
[제발……. 여기 온 거 이현종 때문인 거 잊었습니까?]
바루다는 잔디 자율신경 조절에 그치지 않고, 이현종에 대한 수혁의 기억을 재생시켰다.
어떤 사람이든 간에 긍정적인 감정만 들기는 어려운 법 아니던가.
하지만 이현종에 대해서만큼은 예외를 두어야만 했다.
이현종 또한 수혁을 전심전력으로 아끼고 있지 않던가.
금수 새끼가 아니고서야 그 은혜를 알아야만 했고, 수혁은 적어도 금수는 아니었다.
‘아, 알았어.’
[그리고 이기자 교수는 그냥 자기 딸이라고만 했지, 소개해 준다는 말도 안 했습니다. 김칫국 좀 그만 마시십쇼.]
‘알았다고.’
덕분에 수혁은 귀까지 붉게 달아올랐던 것을 간신히 가라앉힐 수 있었다.
주고받은 대화야 꽤 많았지만 늘 그렇듯 물리적인 시간이 그리 많이 흐른 것은 아니었다.
기껏해야 초 단위의 시간이 흘러갔을 뿐이었다.
“따님이 진짜 이쁘시네요.”
해서 수혁은 그리 어색하지 않게 말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이기자 교수는 그런 수혁을 보며 흐뭇하다는 얼굴로 웃었다.
“그래, 이쁘지. 뭐……. 오늘은 그런 얘기 하러 온 건 아니니까. 밥이나 맛있게 먹자고.”
“아, 네. 감사합니다.”
그리곤 수혁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운 말을 이었다.
잠시 핸드폰에 눈을 고정하고서였는데, 어딘가에서 문자가 온 모양이었다.
원래 대학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들이야 밖에서건 안에서건 연락이 끊기는 법이 없지 않던가.
해서 수혁이나 바루다, 신현태 등은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다만 이기자 교수의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레지던트는 원치 않아도 폰이 들여다보이는 바람에 내용을 읽고야 말았다.
<내 취향 아닌데.>
아주 짧은 문장 하나가 적혀 있었다.
발신인이 누구인지까지는 읽을 수 없었지만.
레지던트는 그 즉시 누가 보낸 건지 알 수 있었다.
‘이수혁 선생님…….’
수혁에 대한 원내 평판은 정말이지 대단했다.
내과에서야 교수들이 호들갑 떨어 가며 어떻게든 자기 과로 끌어들이려는 게 공공연한 비밀이니 두말하면 잔소리였고.
다른 과에서의 평판도 대단했다.
일단 워낙에 똑똑한 데다가 성실하지 않은가.
협진을 내면 하루도 밀리는 법이 없었고, 협진 낸 사람이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들까지 잡아서 주니 싫어할 턱이 있을 리 없었다.
‘병원에서는 레전드인데…….’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이 자리에 있는 자신만 하더라도 수혁에 대해서는 호감을 갖고 있지 않은가.
‘형인 게 아쉽지, 뭐.’
연애 감정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전무하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아무튼, 존경하는 선배로서 단 한 번도 누군갈 사귀어 본 적이 없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수혁은 문자를 보지 못했고 일말의 희망을 품은 채 식사를 시작했다.
“아무튼……. 이번에 그 환아 말야. 다 좋아져서 퇴원하는데 선물 주라고 하더라고.”
이기자 교수는 그런 수혁에게 편지 하나를 건네주었다.
삐뚤빼뚤하면서 동시에 큼지막한 글씨로 쓰인 편지였다.
<이수역 선셍님 간사함니다.>
심지어 맞춤법도 틀렸는데, 그건 그것대로 감동이었다.
“와…….”
돌이켜보니 환자에게 편지를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맛에 소아과 하나 싶은 감동이 물밀 듯이 밀려오는 순간 바루다가 끼어들었다.
[애가 보는 눈이 있네요.]
‘응? 뭔 소리야.’
[간사하다잖아요. 수혁만큼 간사한 사람도 드물죠.]
‘이 새꺄…….’
초를 치기 위함이었는데, 별 소용은 없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랬다.
“정말 고맙네요. 혹시 외래 오면 한번 보고 싶은데요?”
꾸준히 이기자 교수에게 어필하기 위함이었다.
이현종은 개나 줘 버린 듯 잊은 지 오래였는데, 어른인 신현태도 이걸 탓하진 못했다.
이미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현종을 포기한 까닭이었다.
‘형은 그냥 의학이랑 결혼한 거로 하자…….’
아무래도 그게 이 나이에 또 차이는 것보다는 모양새가 좋지 않겠는가.
안 차일 확률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또 모르겠는데, 지금 봐서는 100% 차일 거 같았다.
‘형……. 내가 챙길게. 양로원 가도 면회 가고.’
해서 신현태는 조금 귀찮겠지만 미래에도 이현종을 챙기기로 작정했다.
그사이에도 수혁과 이기자 교수의 대화는 이어지고 있었는데, 이기자 교수가 대뜸 박수를 치고는 품속을 더듬기 시작한 다음부터 잠시 대화가 끊겼다.
“음.”
“잠깐만 잠깐만. 내가 뭐 준다고 해 놓고 까먹고 있었네.”
“편지 말고 또 있어요?”
“아, 아니. 이건 내가 주는 거야.”
“아…….”
이기자 교수는 잠시 후 봉투 하나를 꺼내 수혁에게 건네주었다.
척 보기에도 퍽 두터운 봉투였다.
누가 봐도 돈 봉투처럼 생기기도 했기에, 보다 못한 신현태가 끼어들었다.
“어……. 교수님?”
“이번에 이수혁 선생 두바이 간다며? 그거 때문에 주는 건데. 왜.”
“아…….”
“레지던트 월급 빤하잖아. 이현종이 뭐……. 연구나 할 줄 알지, 그거 돈 벌 주변머리는 없는 양반이잖아.”
“아…….”
앞에 없다고 너무한 얘기 아니냐고 하기엔 이현종의 재정 상황이 썩 좋지 못했다.
그에 반해 이기자 교수의 재력이야 누구나 알아주는 것이었다.
투자에 재능이 있어서 이 근방에 건물도 있다고 알고 있었다.
“이번에 진짜 큰일 해 주기도 했잖아. 그거 어설프게 놓치고 있었으면 예후 썩 안 좋았을 수도 있어.”
“아유, 교수님. 그래도 이거 너무 많은 거 같은데…….”
“괜찮아. 나도 두바이 가 봤잖아. 거기 물가 장난 아냐. 보나 마나 병원에서 비행기 표나 지원해 주고 호텔부터는 알아서 하라고 할 거 아냐? 태화가 의외로 그런 거 좀 쪼잔하게 굴잖아.”
“그…… 그건 그렇죠.”
“거기 보태 써. 신 과장도 좀 보태 주고.”
“아, 네. 감사합니다, 교수님.”
구구절절 옳은 말만 이어지다 보니 신현태도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수혁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일단 뭐 준다는 데 거절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기도 하지 않은가.
게다가 지금 수혁은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
‘그린라이트인가? 사윗감 확정?’
[아뇨……. 절대 아닙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에게 바루다가 탑재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수혁이 갈피를 못 잡고 있는 동안 서빙하기 위해 드나든 이기자 교수의 딸을 면밀하게 살피지 않았겠는가.
처음 한두 번은 긴가민가했지만 후식이 나올 때쯤 되자 확신할 수 있었다.
‘아니라고?’
[이기자 교수는 여전히 수혁에게 호감이 있으나, 딸은 전혀 없습니다.]
‘엄마가 소개시켜 주면 그래도 만나지 않을까?’
[조선 시대면 가능할 수도 있지만, 지금은 21세기입니다, 수혁.]
다른 놈이 이런 말을 했다면 어떻게든 무시해 보려고 노력했을 테지만.
과학의 산물이라 할 수 있는 바루다가 이런 말을 하니까 그러기도 좀 어려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수혁은 지푸라기를 잡으려 했다.
대체 얼마나 더 혼자 보내야 한다는 말인가.
아무리 바루다도 있고 신현태, 이현종에 조태진도 있다고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좀 부족했다.
‘조금도 없어? 가능성이?’
[네. 0%.]
‘아……. 이 새끼 너 나 공부시키려고 일부러 이러지?’
[제 말이 그렇게 느껴지세요?]
‘아니…….’
[그래요, 실은 수혁도 알고 있었을 겁니다. 아까 인사할 때부터 그 어색한 미소라니. 변사또 앞에 춘향이도 그것보단 밝게 웃었을 겁니다.]
수혁은 잠시 어린 시절 춘향전 읽었던 것을 후회하며 이기자 교수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식사를 마친 이기자 교수는 몸을 일으킨 채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자, 가지.”
그 말을 끝으로 수혁도 신현태도 병원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둘은 그 후로 이현종에 관한 얘기를 잠시 나누긴 했지만, 아마도 이현종과 이기자 교수를 이어 주는 건 무리가 아니겠나로 결론을 내린 후 헤어지고야 말았다.
미안한 마음에 이현종을 슬금슬금 피해 다녔는데, 다시 마주친 것은 역시나 두바이로 떠나는 날 아침이었다.
그래도 아빠라 부르는 사람인데 어찌 먼 길 떠나기 전까지 피할 수 있겠는가.
“수혁아!”
이현종은 그런 수혁의 마음을 전혀 알지 못했기에 그저 끌어안고 있었다.
누가 보면 어디 전쟁터에라도 보내는 줄 알 정도로 절절한 표정을 지은 채였다.
“아빠, 나 숨 막히는데.”
“어, 그래? 안 되지. 안 돼. 야, 비행기 제일 좋은 거 타고 가는 거지?”
“그럼요. 그걸로 끊어 주셨잖아요.”
“그래. 절대 죽으면 안 돼. 마음 같아서는 배로 보내고 싶은데 참는 거야, 지금.”
“형, 배도 침몰…….”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새꺄!”
이현종은 눈치 없이 끼어든 신현태를 박살 내고는 말을 이었다.
이번 두바이행은 학회 같은 게 아니라, 태화 그룹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일 아니던가.
참가하는 인원이 한둘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내과에서만도 열 명이 갈 정도라 버스 두 대를 대절해서 병원 로비 앞에 가져다 둔 참이었다.
그렇다 보니 이번 두바이행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전부 이현종과 수혁을 보고 있었다.
“저렇게 티를 내냐.”
“그러니까, 로열 아닌 놈은 서러워서 살겠어?”
“근데 진짜 잘난 놈이긴 하잖아.”
“그야 그렇긴 한데…….”
티는 예전보다 더 내고 있지만, 그럼에도 여론은 더 좋아진 마당이었다.
그동안 수혁이 보인 활약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심기가 불편한 건 이현종이었다.
“장강명……. 그 새끼를 조심해. 아주 뱀 같은 놈이야.”
수혁을 노리는 장강명의 눈길이 느껴졌다.
애써 다른 곳을 보고 있었지만, 그래서 더 느낄 수 있었다.
장강명의 시커먼 속을.
‘어이구, 이 순진한 녀석 이거…….’
이현종은 수혁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뭐라고 해도 듣지 마. 어차피 뭐……. 공항 가면 대강 듣게 될 거야. 애비가 진짜 좋은 길 준비하고 있고, 잘되고 있으니까……. 무시하라고. 버스에서 아무리 말 걸어도 그냥 다 씹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