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두바이 (1)
버스는 곧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두 대를 꽉 채우다시피 해서 움직인 만큼, 인원이 꽤 많았다.
그 말은 곧 챙겨야 할 사람이 많다는 얘긴데, 내과를 대표해서 가게 된 장강명은 수혁 옆에 딱 붙어 있었다.
“안 불편해? 괜찮아?”
연신 괜찮은지를 물어 가면서였다.
상당히 노골적인 태도였는데, 수혁으로서는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이현종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던 때에는 전혀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딱 시야에서 사라진 후부터 본격적인 작업 공세에 나선 것으로 보였다.
[부담스러운데요? 진짜 부센터장 바로 주려고 이러나?]
‘그랬다가는 지금 키우고 있는 주니어 교수님들……. 아니지, 부교수님들도 다 난리 날 거 같은데.’
조직이라면 어디나 그렇겠지만.
당연히 병원에도 순서가 있는 법이었다.
오죽하면 찬물도 위아래가 있다는 말이 있을까.
[하긴 그게 반발이 엄청 날 텐데…….]
‘바로 교수만 줘도 사실 엄청난 거야. 난 가뜩이나 군대도 안 가서 3년 앞당겨서 오는 거라……. 규정도 안 맞다고 하던데.’
[그래도 지금 태도만 보면 뭐 당장 주게 생겼는데요? 보세요, 다른 사람들까지 다 난리입니다.]
‘음.’
바루다의 말에 수혁은 잠시 주변을 돌아보았다.
과연 수군거리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교수 하나가 마치 전담으로 접대하듯 딱 달라붙어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일이 이쯤 되면 장강명도 좀 민망해할 만할 텐데, 그는 애써 주변을 무시하고 있는지 아랑곳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원장님은 아들인 것도 커밍아웃했잖아.’
학자로서 평생 쌓아 온 도덕성에 해가 가는 일이지 않은가.
물론 시간이 지난 다음엔, 워낙에 수혁이 뛰어난 바람에 유야무야 다 덮이고 말았지만.
아무튼, 이현종 같은 거물도 그만한 용기를 냈는데 나라고 못 할까 하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수혁아, 다리도 불편한데 가방 이리 줘. 내가 보내고 올게.”
“네? 아니, 그렇게까지는 안 하셔도 되는데…….”
“내가 마음이 안 좋아서 그래. 줘 봐.”
“어……. 알겠습니다.”
소화기내과에서 수혁이 보여 주었던 모습은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것이지 않았던가.
그 이후로도 주시했는데 이번엔 산부인과에 소아과에까지 한 건 올리고야 말았더랬다.
이건 단순히 천재 정도가 아니라 그냥 의학의 신이라고 해도 좋을 지경이었다.
‘그 깐깐한 이기자 교수님이 따로 불렀다는 소문이 있던데.’
이기자 교수가 은근히 괜찮고 젊은 남자 레지던트가 있으면 사윗감으로 떠본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지 않은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냥 돈만 받고 돌아온 것을 보면 아무래도 거기선 탈락한 모양이지만.
하여간 잠시라도 고민했을 정도로 인상적이었단 뜻이었다.
그렇다면 역시나 잡아야 했다.
“자, 이리로 줘 봐.”
해서 가방을 가져가려고 하는데, 누군가 또 그의 손을 만류했다.
수혁이가 참 지나치게 예의를 차린다 하면서 입을 열려 했는데 이건 수혁이 아니었다.
일단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부터가 너무 고가였다.
세상에 백금 뱀 시계를 여기서 볼 줄이야.
저거 팔면 아마 어지간한 외제 차는 살 수 있지 않을까?
나름 있는 집 자식이라 시계를 아주 모르진 않는 장강명이었기에 단숨에 알아보고는 고개를 올려다보았다.
“이러실 필요 없어요, 장 교수님.”
깍듯한 태도지만 어딘지 고압적으로 느껴지는 말투가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말투에 뭐가 있는 건 아닐는지도 몰랐다.
그저 장강명 교수가 상대가 누구인지 알기에 그렇게 느끼고 있을 수도 있었다.
“기, 김다현 이사님?”
왜 태화 전자 사람인 김 이사가 여길 왔을까?
이건 태화 생명과 태화 의료원이 주관하는 사업인데.
전자가 아무리 태화 생명의 대주주라고는 하지만, 엄연히 선이 있지 않나?
나름 검진센터장으로서 이런저런 정보가 있는 장강명으로서는 오히려 아는 게 어설프게 있어서 더 머리가 지끈거렸다.
반면 김다현 이사는 아주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얘기……. 못 들으셨군요? 하긴, 어제 이사회에서 급하게 결정된 사항이라.”
“이, 이사회요?”
“뭐, 그런 얘기는 차차 하시고……. 이수혁 선생은 그렇게 챙기실 필요는 없어요. 김 비서, 이수혁 선생 가방 들어 드려.”
김다현 이사는 싱긋 웃고는 고개를 돌려 뒤에 있던 이 중 하나에게 지시를 내렸다.
“네, 이사님.”
그중 김 비서라고 불린 이가 즉시 앞으로 나와 수혁과 장강명 교수 손에서 가방을 뺏어 들었다.
‘뭐지?’
[저라고 알겠습니까?]
수혁이라고 당황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
왜 전자 이사가 여길 와 있는 걸까?
“오랜만이에요, 이수혁 선생.”
물론 궁금하다고 해서 계속 고민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김다현 이사가 그렇게 두질 않고 있지 않은가.
김다현 이사라면 이현종보다도 더 위인 사람.
수혁으로서는 최선을 다해 잘 보여야만 했다.
“아, 네. 이사님. 오랜만입니다.”
“이거 맨날 생명의 은인이라고 말만 해 놓고……. 제대로 보답은 못 한 거 같아서요. 이번 기회에 제대로 보답해 보죠.”
“아, 네. 안 그러셔도 되는데……. 감사합니다.”
“하하. 이현종 원장님이 예약한 거 제가 업그레이드해 놨어요. 비행기에서 보죠. 저는 할 일이 조금 있어서.”
가까운 자리라.
김다현 이사가 말이 이사지 사실상 어지간한 계열사 사장보다도 힘이 있는 사람 아닌가.
10시간이 넘는 비행시간 동안 이코노미를 탈 확률은 없어 보였다.
[일등석인가? 기내식 맛있다던데.]
바루다는 옳은 분석을 하고는 엉뚱한 곳에서 흥분했다.
수혁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바루다처럼 마냥 그러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감사합니다, 이사님.”
“그래요.”
해서 감사 인사를 올리니, 김 이사는 미소와 함께 총총걸음으로 사라져 갔다.
아는 얼굴들이 있는 그룹을 향해서였다.
정확히 말하면 수혁이 기억하고 있는 얼굴들은 아니었고, 바루다가 기억하고 있었다.
[태화 생명 이사진인데……. 김다현 이사에게 90도 폴더 인사를 하는군요?]
‘사장님이랑 부사장님은 어디 가셨지? 없지 않아?’
[이거 상당히 큰 건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상한 일이네요.]
무려 두바이에 태화 병원 분점이 들어서는 일이었다.
지금까지는 그저 인력 몇 명 파견해서 현지 의사들을 가르치는 수준에 그쳤다면, 지금 태화에서 계획하고 있는 두바이 병원은 그 성격이 달랐다.
엄청난 외화벌이 및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이는 일이 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
따라서 나라에서도 외교부를 통해 적극 지원해 주고 있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사장이나 부사장이 안 왔다?
[지금 태화 생명에 뭔가 이슈가 있나요?]
‘내가 알겠냐?’
[하긴 레지던트가 뭘 알겠습니까. 그럼……. 흠.]
‘흠 뭐.’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저는 수혁을 기반으로 딥러닝을 하고 있기 때문에 수혁이 전혀 모르는 일에 대해서는 분석이 어렵습니다.]
‘넌 꼭 핑계를 그딴 식으로 대더라?’
둘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김다현 이사는 생명 측 이사진들과 함께 수속을 밟고 안으로 들어갔다.
최종적으로 닿은 곳은 공항 내에 있는 라운지였다.
수혁 때문에 양보한 사람 말고는 전원 일등석이었기에 아주 독립된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 말은 곧 무슨 말이건 해도 괜찮다는 뜻이었다.
어차피 김다현 이사가 여기에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 자체가 어떤 선언 같은 일이기도 했기에 딱히 망설이는 것이 없었다.
“사장님, 취임 축하드립니다.”
특히 호칭이 그랬다.
김다현 이사는 한 이사의 축하에 굳이 겸양을 떨지 않았다.
그동안 아주 공을 들여온 일이었고, 고대하던 일이지 않은가.
세상에 태화의 미래 먹거리라고 이유원 회장이 공언한 태화 바이오의 사장이라니.
당연히 로열패밀리 중 하나가 차지할 거란 예상을 뒤엎고 된 마당이라 더더욱 그 의미가 컸다.
“고마워요.”
“이번 두바이 병원 건도 사실상 김다현 사장님이 진행하신 거라 들었습니다. 그쪽 왕족들 협조가 쉽지 않았을 거 같은데 어떻게…….”
“물산이 물심양면 도와줬죠.”
“아하.”
물산이라면 두바이의 주요 건물이란 건물은 다 지었다는 얘기가 있지 않은가.
아무래도 여타 다른 기업들과는 왕족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과의 관계가 훨씬 좋을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특히 리먼 사태 때 태화 물산만은 두바이의 임금 체불을 견딜 만큼 단단한 재정을 가지고 있어서 더더욱 신뢰를 쌓았으니, 아마도 김다현의 입장에서는 천군만마였을 터였다.
이사진은 그 외에도 비행 시간이 가까워 올 때까지 인수인계 및 업무 관련 대화를 나누었다.
전혀 엉뚱한 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것은 이제 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우르르 일어났을 때 즈음이었다.
“김 사장님.”
“왜, 남 사장.”
이제 이사에서 어엿한 태화 생명 사장으로 내정된 남지연이었다.
남지연은 김다현의 약간은 짓궂어 보이기까지 한 얼굴을 보며 민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장은요. 그냥 부장이라고 불러 주세요. 그게 제일 편해요.”
“그게 편하면 안 되지. 이제 사장이야. 같은 사장이지.”
“같은 사장이라뇨.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쇼. 엄연히 계열사 개념인데요.”
“아무튼, 왜?”
김다현은 지금 기분이 너무 좋아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웃을 수 있을 거 같았다.
게다가 남지연은 김다현에게 있어서는 입 안의 혀처럼 구는 사람 아니던가.
여기서 갑자기 기분 잡치는 얘기를 할 가능성은 제로였다.
“내년에 진짜 태화 의료원에 센터 신설하시는 거예요?”
역시나 딱히 기분 나쁠 만한 얘기는 아니었다.
동시에 제삼자로서는 아주 궁금해할 만한 얘기이기도 했다.
센터가 그냥 센터가 아니라, 아마도 처음 들어 보는 센터일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이현종 원장의 말로는 세계 유일의 센터가 될 거라 했더랬다.
과장하는 사람이 아니니 분명 그럴 터였다.
“응, 센터 신설해야지. 규모가 아주 크진 않아서……. 건물을 따로 짓거나 할 정도는 아냐. 이번에 올라가는 건물에 태화 내부 센터 옮겨 가면 거기에 들어가면 돼. 어차피 원래 병실 있는 건물에 있어야 할 센터니까.”
“음…….”
“왜?”
“아무리 생각해도 통합진료센터라는 게 뭔지 잘 감이 안 와서요.”
“아, 뭐. 나도 그랬어. 아직 확정도 아냐, 사실.”
통합진료라니.
현대 의학이 발달해 감에 따라 점점 더 세분화되고 있는 마당에 그 콘셉트를 아예 거꾸로 가는 느낌 아니던가.
쓸데없는 짓 혹은 해서는 안 될 짓이라 생각이 될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현종의 말을 듣고 보니, 그게 확실히 앞으로의 태화 의료원에 있어 다른 병원들과의 차별점이 되어 줄 것 같았다.
‘우리에겐 수혁이가 있지 않습니까? 얼마 전에는 산부인과, 소아과 환자도 봤어요. 정형외과도 그렇고……. 얘는 모든 환자를 다 볼 수 있어요. 그만한 능력이 됩니다.’
이수혁.
이수혁이라.
이현종의 말대로일까?
두바이에서 천천히 지켜볼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