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통합진료센터 (1)
“흠.”
말을 꺼내야겠다는 결단이 선 남지연 사장은 의도적으로 모두의 이목이 완전히 자신에게 쏠릴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때론 주의를 환기시킴에 있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던가.
그걸 남지연 사장처럼 카리스마 있는 사람이 시전한다면 더더욱 그러한 법이었다.
“장 센터장님.”
더구나 남지연 사장의 목소리에는 흡입력이 있었다.
남지연이 그저 김다현의 말만 잘 듣고, 시키는 일만 잘하는 사람이라면 어찌 사장이 될 수 있었겠는가.
다 남다른 능력이 있어서였다.
“아, 네.”
덕분에 장강명은 저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 하고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뿐만 아니라 밴에 있던 모두가 그랬다.
변함없이 하던 일을 하고 있는 건 그저 김 비서와 운전자뿐이었다.
남지연 사장은 그러한 분위기를 읽어 가면서 말을 이었다.
‘새롭게 추진되는 일 중 곁가지이긴 하지만……. 어찌 보면 메인 프로젝트에 그 어떤 프로젝트보다 도움이 될 수 있는 프로젝트지.’
이건 김다현 사장의 생각이 아니라 남지연 본인의 생각이었다.
뭐가 되었건 간에 국내에서 바이오 및 의료 산업의 선두주자가 되려면 태화 의료원이 국내 최고 자리를 굳건하게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태화의 이름에 신뢰가 붙을 테니까.
그러자면 칠성과 아선의 끈질긴 추격을 제쳐야 할 뿐 아니라, 일정 분야에 있어서는 따라잡아야 할 터였다.
“이번에 태화 그룹 내에 커다란 변화가 있을 겁니다. 예상이 아니라, 예고입니다. 이미 다 정해졌고, 귀국하면 바로 발표가 날 겁니다.”
“아…….”
장강명 또한 뭔가 좀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왜 태화 의료원의 일에 태화 생명 사람이 아니라, 태화 전자 사람이 중심이 되어 관여하고 있을까.
내가 모르는 뭐가 있는 건가.
뭐 이런 의문이 있었다 이 말이었다.
“다만 이 일은 아직까지는 극비 사항입니다. 주가 변동이 있을 수 있으니……. 절대, 누구에게도 알려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들의 계좌는 내부인으로서 감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세요.”
“물론입니다. 당연하죠.”
“좋습니다.”
어차피 밴 내에 타고 있는 사람 중 태화 생명 사람이 아닌 사람은 장강명, 이수혁뿐이었다.
나머지는 모조리 태화 생명 사람들인지라 남지연은 마음 놓고 얘기를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우선 태화 그룹에서 미래 먹거리로 바이오 및 의료 분야를 선정했다는 거 정도는 알고 계실 겁니다. 바루다의 실패로 인해 무산된 줄 알았겠지만, 어차피 의료 A.I.는 그중 하나였을 뿐, 중심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진출하기에 앞서 태화 바이오 밑으로 태화 생명 그리고 태화 의료원, 태화 전자의 일부 연구동이 편입됩니다.”
“아…….”
“그것을 김다현 이사…… 아니죠. 이제 사장님이죠. 김다현 사장님이 태화 바이오 사장으로서 담당하게 됩니다.”
“그, 그렇군요.”
그룹 개편이 일어난다 이 말이었다.
그냥 같은 그룹 내에서 인사이동이 있는 거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었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이 정도 그룹 개편은 상속할 때 외에는 일어나지 않는 게 상식으로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남지연 사장은 그래도 장강명이 일반 의사들과는 달리 그룹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입을 열었다.
“태화 의료원 또한 많은 변화를 겪게 될 겁니다. 우선 새로 짓는 건물, 그곳에 장 센터장님이 이끄는 건강검진센터가 따로 독립해서 나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건물에서는 오로지 검진만 하게 되죠.”
“제…… 제가 계속하게 됩니까?”
역시나 사람은 큰일보다는 제 앞길이 제일 걱정인 법이었다.
어찌 보면 장강명의 속물적인 면모를 바라보게 된 셈인데, 남지연 사장에게는 기꺼운 일로만 여겨졌다.
오히려 이런 인간들은 뒤통수를 잘 치지 않는다는 걸 회사 생활을 통해 배운 덕이었다.
자리만 보전해 주면 충성을 다할 게 분명했다.
사실 의사 입장에서 반기를 들 만한 수단이 마땅찮은 것도 있었다.
무려 헌법에서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직군이 바로 의사이지 않은가.
노조도 만들지 못하는 피고용장을 두려워할 고용인은 없다고 보면 되었다.
“네, 장 센터장님이 따로 의사 표명이 없다면……. 한 번 더 맡게 되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저 혼자만의 뜻은 아니니, 인사는 거두어 주시지요.”
“아…….”
곧 남지연 사장 위에 김다현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김다현의 사람이라더니,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설 줄이야.
장강명은 자리를 보전하게 된 것은 다행이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움을 느꼈다.
엄청난 격동이 태화 의료원을 덮쳐 올 거 같았다.
“그 외에도 여러 변화가 있겠지만, 태화 의료원에 관련한 것들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아, 네. 사장님.”
하지만 장강명도 여태 교수 생활해 온 짬밥이 있기에 딱히 티를 내진 않았다.
남지연 사장은 그의 담담한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역시나 담담한 어투로 하지만 힘 있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건강검진센터가 빠진 자리에……. 뭐가 들어올지 아직 결정된 바는 없었죠?”
“아……. 네. 꽤 부지가 넓어서요. 과 하나가 통째로 이동해도 좋을 겁니다. 설비도 CT와 MRI, PET가 따로 있고요.”
“네, 그 때문에 이현종 원장 및 김다현 사장님과 회의를 여러 차례 한 바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어쩐지 이현종이 병원 내에서 잘 눈에 띄지 않더라니.
밖에서 회의를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 말이 사실이었네요? 어디서 본격적으로 땡땡이 치고 구라 치는 줄 알았는데.]
‘그러니까. 진짜 회의에 들어갔단 말이야? 병원에서 하는 회의도 귀찮다고 안 들어가던 사람이……. 아예 바깥 회의를?’
[얼마나 중요한 얘기가 오가기에 그랬을까요?]
‘모르겠네……. 아빠는 진짜 좀 특이한 사람이라…….’
중요한 거로 따지고 들자면 원내 회의 중에도 그렇지 않은 걸 찾기가 어려울 터였다.
어떤 것은 경영에 관련되어 있기도 하고, 어떤 것은 인사에 관련돼 있을 것이고 또 어떤 것은 연구 성과에 관련되어 있을 테니까.
보통 사람의 기준에서 보면 다 중요하다 이 말인데, 이현종은 미련 없이 쌩 깠다 이 말이었다.
즉 이현종만의 기준에 따라 경중을 판단하고 있다 이건데.
대체 뭐가 그렇게 중하게 느껴졌길래 외부 회의에 갔을까.
수혁과 바루다는 전에 없는 호기심과 함께 남지연을 바라보았다.
“여러 의견이 오갔습니다. 기존의 수술방을 확대한다, 외상 외과 섹터를 늘린다 등등.”
“다 의미 있는 의견이네요. 포화에 이르고 있는 상황이니까요.”
“그렇죠. 하지만 그렇게 하면 기존의 것을 확대하는 것일 뿐,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 내긴 어렵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었습니다.”
“아……. 그럼……?”
새로운 것이라.
의사들만큼 새로운 약을, 새로운 수술을, 새로운 기구를 기대하면서 동시에 무언가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사람 생명을 다루는 사람이니만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동차나 다른 기기는 리콜이라도 되지만, 사람 몸은 그게 안 되지 않는가.
장강명의 얼굴에 우려가 피어오른 것도 그리 과한 일이 아니란 얘기였다.
“새로운 센터를 신설하기로 했습니다.”
“네……? 새로운 센터요? 어떤…… 어떤 센터입니까?”
“통합진료센터입니다.”
“통합…… 진료센터?”
생소하기 이를 데 없는 이름이었다.
당연했다.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이름이었으니까.
[뭐야, 저게.]
‘전혀 모르겠는데.’
심지어 그 주축이 될 바루다나 수혁도 몰랐다.
그러니 장강명이 놀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게 대체 뭔가요?”
“말 그대로 모든 진료를 보는 센터입니다.”
“모든 진료……? 종합병원 안에 또 다른 종합병원을 만든다, 뭐 이런 뜻일까요?”
“아뇨. 그런 뜻은 아닙니다.”
“그럼…….”
남지연은 대답하기 전에 1열 시트에 앉은 수혁을 힐끔 바라보았다.
[뭐여.]
‘네가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이게 이현종 원장이 했던 말 하고 연관이 있는 거 같은데요?]
‘내가 저 센터로 간다고?’
[그렇지 않을까요?]
‘음.’
의중이 분명했기에 이제 바루다도 수혁도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그렇지 못한 것은 장강명뿐이었다.
남지연은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아마도 비전문가들과 괴짜 이현종이 큰 사고 쳤구나 하고 걱정하고 있을 게 뻔한 장강명의 팔뚝을 툭툭 두드려 주었다.
“지금도 원내 협진망이 있을 겁니다, 그렇죠?”
“아……. 네.”
“협진의 취지가 뭡니까. 본인의 역량을 벗어나는 부분에 대해 진료를 요청하기 위함이죠?”
“그렇…… 습니다.”
“아마 대부분은 기존의 협진으로도 해결이 가능할 겁니다. 태화 의료원 역량은 누구보다 저희가 제일 잘 파악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전공의부터 선별해서 뽑고 있고, 교수 선발이야 말할 것도 없죠. 되고 나서도……. 저희가 좀 들들 볶는 편이죠?”
“뭐, 그런 면이 있습니다. 병원 측에서 알아서 하는 것도 좀 있고요.”
마지막은 좀 농담조가 섞여 있었기에 장강명은 한결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려니, 남지연이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협진으로 해결되지 않는 환자들도 있을 겁니다. 애초에 본인 과 문제인데, 해당 과에서 해결이 되지 않는 환자들도 있을 거고요. 맞죠?”
“그건…….”
“압니다. 대부분은 의료사고로 넘어가지 않는다는 걸. 현대 의학의 한계 또는 의료진 역량의 한계죠. 진단 플로우를 철저히 따랐음에도, 근거 중심 의학에 따라 치료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치료에 실패하는 경우는 있을 수밖에 없죠.”
“그렇…… 그렇습니다.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의학이라는 게 딱딱 맞아떨어지지는 않죠.”
장강명은 그나마 남지연이라는 사람이 의사는 아니지만, 그래도 의학에 대한 이해도가 있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칠성 같은 경우엔 비의료인 경영진이 들어서면서 자꾸 시장 논리를 들먹이는 바람에 교수들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라지 않던가.
말이 통하긴 한다는 걸 위안으로 삼아야만 했다.
“그런데…… 저희 태화에는 그걸 대폭 줄여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죠.”
“네?”
딱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꺼낸다는 소리가 좀 황당한 소리였다.
현대 의학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장강명은 사장이라는 작자가 혹시 미신 신봉자인가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전혀 그런 내용이 아니었다.
딱히 장강명에게 있어 기분이 좋을 만한 내용도 아니긴 했지만.
아무튼, 방금 든 걱정과는 무관했다.
“이현종 원장님과 이수혁 선생. 아닌가요? 그 둘은 내과지만 거의 모든 과에 대한 지식이 해박할뿐더러……. 그 지식을 종합하는 능력도 있어 이미 여러 차례 그 능력을 검증한 바 있다고 보고받았습니다만.”
“아……. 그게…… 음.”
부정하기는 어려운 말이었다.
확실히 저 둘은 일반인의 범주를 넘어가 있었으니까.
특히 이수혁은 괴물 수준 아니던가.
‘그렇다고 신설되는 센터의 주축을……. 이제 갓 전문의 딴 사람에게 줘……? 그게…… 그게 납득이 될까?’
장강명이야 수혁을 무리해서라도 영입하려고 했으니 그렇다 치지만.
다른 과의 수많은 펠로우, 임상 조교수들은 어찌한단 말인가.
전문의 따고, 군대 3년 갔다 오고도 몇 년씩 전임 자리를 받지 못해 안달인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데.
특혜 소리가 나올 게 분명했고, 또 반발이 심하게 될 것이 뻔했다.
이러다 보이콧 하자는 말이라도 나오면 큰일이었다.
남지연은 그런 생각을 읽기라도 했다는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장 센터장님이……. 센터장에 계시는 동안 소화기내과와 검진센터에서는 별말 안 나오게 해 주셨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