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 갑자기 승부? (1)
‘저 양반은 진짜 나잇값 못하네.’
둘 사이의 신경전을 제일 우려하고 있는 건 역시나 장강명이었다.
김문제 교수를 잘라야 된다, 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서효석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 사람 아닌가.
그냥 성질이 더러운 거지 비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실력이 없는 건 더더욱 아니었다.
오히려 실력 면에서는 그야말로 태화에 어울린다는 말이 딱 나올 지경이었다.
“자, 그럼 시작하시죠.”
문제가 있다면 역시 성질머리였다.
한참 어린 친구하고 대거리를 하고 싶나 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못 이긴다고……. 당신 못 이겨.’
게다가 안타깝게도 수혁은 김문제 교수의 상대가 아니지 않은가.
처음 소화기내과 돌 때 옆에 끼고 봤을 때까지만 해도 아주 똑똑하다 싶은 수준이었지만.
진짜 빼돌릴 생각이 들어 정보를 수집하고 난 다음에는 대체 수혁을 무슨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지경이었다.
이미 태화 내에서도 이현종을 제외하면 수혁보다 진단에 뛰어난 사람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아니, 조심스러운 생각이기는 한데, 이현종도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수혁보다 처진다고 봐야 할 터였다.
‘게다가 이미 위에서 정했는데 당신이 무슨 재주로 그걸 엎으려고…….’
요즘은 그런 시대도 아니지만.
아직도 김다현이 여자라는 사실만으로 만만하게 보고 덤비는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더랬다.
그 사람들의 말로가 어땠는지는 지금 김다현이 얼마나 승승장구하고 있는지를 보면 역으로 알 수 있을 터였다.
정말이지 무서운 사람이었다.
서효석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어디 시골에 작게 개원했다지……? 서 이사는 어디 취직도 못 하고 놀고 있다고 하고…….’
명백하게 적이 되고 나면 철저히 밟는다, 이 말이었다.
“환자는 39세 남자로 내원 6주 전 발생한 발열을 주소로 본원 내과로 내원하였습니다.”
장강명이 상념에 빠진 동안 화면은 빠르게 앞으로 돌아갔고, 발표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미 있었던 사람은 같은 내용을 꼼짝없이 두 번 듣게 된 마당이었지만, 누구 하나 지루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흥미롭다는 얼굴로 김문제 교수와 방금 그가 가리켰던 젊은 의사 수혁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이……. 아까 알 막툼 교수가 말했던 그 사람 아냐?’
‘그런 거 같은데……. 진단명 그거 맞는 건가?’
‘찾아보니까 확실히 가능성이 제일 커 보이던데.’
‘그거 가지고 몇 번을 회의했는데……. 그걸 10분도 안 돼서 혼자 맞혔다고?’
‘안 교수님 통해서 물어보니까……. 태화 본원에서도 뭐 엄청 밀어주는 의사래. 천재라던대.’
‘그렇…… 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디…….’
이미 대강 들은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
대략 2주 넘게 지지부진하던 아니, 오히려 병원 와서 더 나빠지고 있던 환자 상태가 수혁이 보고 얼마 안 돼서 호전을 보이고 있다는 소식은 모든 내과 의사들을 흥분케 하기에 충분했다.
“환자는 6주 전부터 발열뿐 아니라 관절통, 오한, 근육통 등이 있었으나 병원 내원하지 않고 약국에서 산 소염제를 복용하였습니다. 하지만 전혀 호전 보이지 않아 본원 외래 내원하였습니다. 환자는 기저 질환은 없다고 보고하였으나, 아버지가 당뇨 환자였으며 얼마 전 결핵으로 돌아가신 병력이 있었습니다. 혈액 검사 수치는……. 다음과 같습니다.”
화면은 몇 장을 거쳐 아까 수혁이 들어왔을 때 떠 있던 화면으로 넘어갔다.
아까와 정확히 같은 검사 결과가 띄워져 있었지만, 이제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환자의 병력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6주 동안 죽도록 아팠다면 소염제를 먹을 게 아니라 병원을 가겠지. 그게 아니라는 건…….’
[참을 만했다는 거겠죠? 경과가 느린 감염병일 수 있겠습니다.]
‘그럼 결핵일까? 환자 아버지가 결핵이 있었다잖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습니다만…….]
‘그렇게 간단한 질환이라면 여기서 이렇게 거창하게 케이스 발표까지 하지는 않을 거라 이거지?’
[네. 그렇습니다. 설마 그렇게까지…….]
바루다는 굳이 뒤에 진짜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의 언어 습관은 수혁에게서 비롯하지 않았던가.
수혁도 정확히 같은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것은 당시 찍은 X-ray 사진입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흉수가 차 있었고, 이로 인한 순참 증세가 있어 흉관 삽입과 동시에 흉수에 대한 검사를 시행하였습니다.”
다음 화면에는 당시 뽑아낸 흉수 사진과 함께 검사 소견이 떠 있었다.
‘색이 노랗네.’
[호중구가 압도적으로 높게 나타나는군요. 감염을 시사하는 소견입니다만…….]
‘배양 검사에서는 아직 자란 게 없어.’
[결핵균은 천천히 자라는 균입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역시 다른 가능성도 열어 둬야겠지.’
수혁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김문제 교수를 힐끔 돌아보았다.
발표가 제대로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해하는 얼굴이더니 지금은 영 표정이 어두워져 있었다.
두바이 의료 수준을 무시한 탓이었는데, 사실을 말하자면 그리 만만한 곳은 아니라 할 수 있었다.
아무튼 간에 돈 많은 도시 아니던가.
의사들에게도 돈을 많이 주다 보니, 이 근방에서는 제일 의료 수준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만큼의 의료 수준은 아니라 해도, 막무가내로 무시해도 좋을 정도는 아니었다.
“X-ray에서 음영이 너무 진했기 때문에 초음파도 시행하였습니다. 결과 심박출량은 65%로 정상 소견을 보였습니다. 다만 추가로 시행한 경부, 흉부, 복부에 대한 CT에서 경부 및 종격동 내에 다수의 임파선 비대 및 비장 비대, 양측의 흉수가 관찰되어 감염에 대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경험적 항생제를 처방하였습니다.”
항생제는 Piperacillin/tazobactam, ciprofloxacin으로 이루어진, 상당히 강력한 조합이었다.
세균으로 인한 감염이라고 한다면 어느 정도 반응을 보여야 했다.
“하지만 환자 발열이 지속되었고, 호흡곤란 및 기침 심화되는 양상 보여 항생제를 Imipenem으로 교체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열이 39도 이상으로 지속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Imipenem이라고 하면 광범위 항생제 중에서도 최근에 나온 녀석으로 그야말로 융단 폭격을 하는 놈이라고 보면 되었다.
이놈도 안 듣는다고 한다면 역시나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려야만 했다.
‘결핵에 2차 감염이 동반된 폐렴이라면……. 약이 잘 안 들을 수 있지?’
[그렇습니다. 비특이적 세균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약이 잘 안 들을 수 있죠. 애초에 이미페넴이 결핵에 대한 약은 아니니, 결핵균이야 꿈적도 하지 않을 것이고요.]
첫째는 역시 감염은 감염인데 지금 약이 안 드는 감염이었다.
발열이 있으면서 발열이 날 만한 병변을 보이는 환자에서 감염을 떠올리는 것은 의사로서 필수적으로 해야 할 판단이었다.
다만 여기서 멈추면 그건 안 될 일이었다.
세상엔 발열을 일으키는 원인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었다.
오죽 그걸 밝히는 게 어려우면 불명열이란 진단명이 다 있을까.
‘아니면…… 감염이 아예 아닐 수도 있지.’
[새로운 가능성이군요?]
‘뜬금없는 소리는 아냐. 엑스레이랑……. CT 소견을 잘 봐 봐. 감염이라고 하기엔 좀 이상한 부분들이 있어.’
상대가 수혁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바루다는 아마 개소리하지 말라고 치부했을 터였다.
하지만 이제 수혁은 바루다마저 인정해야 하는 실력을 지니게 된 지 오래였다.
이런 말을 한다면 무시할 게 아니라 한 번쯤 점검해 볼 필요가 있었다.
[음……. X-ray는 확실히 흉수 찬 거 때문에 폐렴인지 여부가 잘 확인이 안 되는군요.]
‘CT라고 다른 게 아냐. 물론 음영이 증가되어 있지만……. 잘 봐 봐.’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폐에 물이 찬 것으로도 보이는군요. 폐부종(Pulmonary edema)일까요?]
‘그게 지금 증상에는 오히려 더 잘 맞지. 안 그래?’
[그렇기는 합니다. 좀 뜬금없어서 그렇죠.]
확실히 폐부종 또한 발열, 호흡곤란을 일으킬 수 있었다.
동시에 감염이 아니니 항생제에 듣지도 않을 것이었고.
이것만 보면 폐부종인데, 폐부종은 어떤 질환으로 인한 결과여야만 하지 않는가.
연결 고리를 찾지 못하면 그저 개소리요, 썰일 따름이었다.
해서 바루다도 수혁도 함부로 입을 열지는 않았다.
다만 가능성 중 하나로 여기게 되었을 뿐이었다.
“우선 지속적으로 가래에서 배양 검사를 나가고 있습니다. 주로 결핵 및 mycoplasma 또는 pneumococcus 쪽을 타깃 하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자란 것이 전혀 없습니다.”
화면을 넘긴 발표자는 우거지 죽상이 되어 말을 잇고 있었다.
“또한 드물게 혈액암에서 해당 질환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에 착안해 시행한 골수 검사에서는 특이 소견을 보이진 않았습니다.”
그럴 만도 했다.
나름 이것저것 고려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나오는 게 없지 않은가.
의사로서 이럴 때가 제일 괴로울 터였다.
머리 쥐어짜 내서 해 보는데 일이 안 풀리는 거 정도로 생각하면 안 되었다.
의사의 일이 안 풀린다는 건 결국 누군가의 생명이 꺼져 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
“혹시…… SLE 검사는 했나? 루푸스일 때도 이럴 수 있는데.”
그때 옆에 있던 김문제가 다분히 수혁을 의식하며 입을 열었다.
확실히 가능성이 있기는 했다.
너무 희박해서 문제지.
“아, 네. 검사는 나갔습니다만 음성이었습니다.”
“아, 그런가.”
역시나 꽝이었고, 김문제는 울적해졌다.
발표자도 그러했는데, 대한민국 최고라는 태화에서 온 양반들도 못 맞히는구나 싶어서였다.
다들 침울해지려는 무렵, 수혁이 가만히 손을 들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병원 관계자 중 하나가 마이크를 건네주었다.
“CT나 X-ray 입원 당일에만 찍은 건 아니죠?”
수혁은 그렇게 전달받은 마이크를 집어 들고는 김문제와는 달리 당장 진단명을 던지지 않았다.
대신 질문을 던졌다.
이런 거야 발표자로서 대답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었기에 곧장 화면이 주르륵 넘어갔다.
“네. 물론입니다. 이게 입원 당일, 이게 다음 날, 이건 이틀째…….”
매일 찍은 X-RAY 모음이었는데, 그걸 보고 있자니 수혁이나 바루다는 한 가지 깨닫게 되는 바가 있었다.
정말 단순한 하나였는데 동시에 결정적일 수 있는 것이었다.
‘좋아졌다……. 나빠졌다 하는구만?’
[치료는 변하는 것이 없는데 저렇다는 건……. 딱히 치료와 경과가 관계가 없다는 거겠죠.]
지금 하고 있는 치료라는 건 결국 항생제이지 않은가.
항생제는 감염에 대한 치룐데 그것과 환자의 경과가 전혀 상관없다는 건 결국 무엇을 의미할까.
환자는 감염병으로 인해 이렇게 된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뭐, 감염병이 있을 수야 있겠지만.
적어도 환자의 낫지 않는 발열과 호흡곤란은 감염과 관계없다고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질환의 경과가 wax and wane(흥하다가 기울다) 하고 있는데……. 폐렴보다는 폐부종 가능성이 있어 보이지 않나요?”
“어……. 네?”
“응?”
발표자뿐 아니라 김문제도 수혁을 바라보았다.
간단한 발상의 전환이었지만, 애초에 의심조차 하지 못했다면 불가능한 전환이었기에 그랬다.
‘망신 시작이구나…….’
장강명은 그런 김문제를 안타깝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동시에 조금 고소하기도 했다.
‘이번 기회에 그 성질머리 좀 고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