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갑자기 승부? (3)
“음.”
수혁은 그렇게 김문제 교수를 먹인 후,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목을 끌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주변인들은 더더욱 그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좋아요, 이제 다시 얘기하시죠.]
사실은 다 계산된 행동이라고 보면 되었다.
바루다는 병원 사람들 중 가장 발표를 잘하는 이들을 골라 분석했고, 그 결과 어느 정도 수혁에게 맞는 행동을 코칭할 수 있게 되었다.
‘오케이.’
수혁은 그러한 코칭을 바탕으로 해서 원래도 잘하던 발표를 더더욱 잘하게 된 마당이었다.
이는 당연히 수혁에게도 어느 정도 재능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적어도 수혁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방송에서도 어느 정도 증명된 바가 있지 않은가.
덕분에 수혁은 상당히 자신감 어린 얼굴로 말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환자에게서 시행한 검사를 살펴보면……. 혈구탐식성 림프조직구증(Hemophagocytic lymphohistiocytosis) 외에도 다른 여러 자가 면역 질환을 배제할 수 있습니다. 아까 김문제 교수님이 말씀해 주셨던 루프스도 배제할 수 있죠.”
수혁은 굳이 김문제 교수의 실수를 짚고 넘어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김문제 교수는 아직까지도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또다시 고개를 숙여야 하는 불상사는 피할 수 있었다.
다만 그에게 쏟아지는 시선까지 피하지는 못했다.
그중 몇몇 시선은 어찌나 노골적인지, 뒤통수가 다 따가울 판이었다.
‘이런 망할 놈……. 이리저리 시간 끄는데 어디 그럴싸한 답이 나오는지 보자…….’
수혁의 예상대로 김문제 교수만큼은 개인적인 원한을 더더욱 키우고 있었다.
‘와……. 무섭네, 저놈.’
‘누가 이현종 아들 아니랄까 봐 실력은 죽이는구나.’
‘의학 지식만이 아니라……. 말발이 좋네.’
하지만 나머지, 그러니까 애초에 수혁에게 호감 대신 다른 것을 품고 있던 이들은 원한이 아니라 두려움을 키우고 있었다.
일개 레지던트가 교수 하나를 완전히 조리돌림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서 무서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건 좀 문제가 있다고 봐야 했다.
“또한 백혈병(Leukemia), 림프종(Lymphoma) 등의 혈액암 또한 배제할 수 있겠습니다. 이미 골수 조직 검사를 한 데다가……. 여러 혈액 검사에서도 이를 부정하고 있으니까요.”
“음, 그렇군요. 그럼 결국은 감염이라는 걸까요?”
수혁은 이제 김문제 교수에게서 시선을 떼어낸 채 발표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덕에 발표자는 실로 오랜만에 수혁의 말에 답할 수 있었다.
보람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수혁이 곧장 고개를 저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감염을 완전히 배제해서는 안 됩니다만……. 그렇다고 바로 감염으로 돌아가서도 안 됩니다. 아직 가능성이 큰 질환 하나가 남지 않았습니까?”
“음.”
그리곤 멍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수혁이야 다 알지? 하는 얼굴로 말을 하고 있었지만.
당최 뭔 병을 말하는 건지 떠오르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행인 것은 다들 비슷한 얼굴이라는 점이었다.
발표자뿐 아니라 현지 의사들은 대부분 그랬다.
심지어 태화 의료원 측 사람들도 그랬다.
“불명열에서 감염병이나 다른 자가 면역 질환을 배제했고, 야마구치 기준에서 다섯 가지를 만족했을 때 진단 가능한 병이 있지 않습니까?”
수혁은 죄 멍하다고 해도 좋을 청중을 향해 말을 이었다.
마치 혼자 정답지를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적어도 장강명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아, 얘가 소화기로 왔으면 진짜 대박인데…….’
미리 수혁의 가치를 꿰뚫어 본 사람이었기에 그랬다.
이 녀석은 절대 쇼하기 위해 이러는 게 아니었다.
김문제 교수와 승부를 보기 위해서 이러는 것도 아니고.
‘이건……. 그러니까 일종의 처벌인가? 아니면 경고?’
감히 자신에게 덤비면 어떻게 박살 나는지 보여 주겠다고 하는 거 같았다.
“김문제 교수님, 류마티스분과시니 당연히 알고 계시겠죠?”
“어…….”
아주 노골적이지 않은가.
해당 분과 교수를 상대로 해당 분과 내용을 묻고 있다니.
문제가 있다면 김문제 교수는 아예 맥을 못 잡고 있다는 점이었다.
원래 저렇게 능력 없는 사람은 아닌데.
아마도 중간중간 이어진 수혁의 도발에 정신이 나가 버린 모양이었다.
전혀 침착함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이렇게 갑자기 물으면 기억이 안 나실 수도 있죠. 그럼 제가 이 질환의 진단 기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39도 이상의 고열입니다. 환자는 내원 당시 고열을 호소하고 있었으며 입원하고 해열제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약효가 떨어지면 스파이크를 치고 있습니다. 만족한다고 봐야 합니다.”
수혁은 당연히 답을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질문을 던지는 동시에 몸을 돌렸다.
그리곤 진단 기준과 환자의 상태를 연결 지어 말하기 시작했다.
“또한 근육통과 관절통이 동반되었으며, 백혈구의 증가를 보였습니다. 피부 발진은 제가 환자를 직접 보지 못해 확인이 불가한데……. 이에 대해 말씀 주실 분 계십니까?”
“아……. 발진…… 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고열이 있을 때 약간의 발진이 있기는 했습니다.”
“그럼 그것도 포함시켜야겠군요. 벌써 주요 기준을 모두 만족했습니다. 다른 기준도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CT에서 확인했듯이, 환자는 림프 종대가 있죠? 그것도 다발성으로. 거기에 더해 비장 종대도 있으며……. 간 기능 이상도 동반하고 있습니다.”
“수치가 아주 높지는 않은데, 그래도 포함인가요?”
“정상을 넘어가면 포함해야 합니다. 그런 진단 기준이니까요.”
“아, 네. 그렇군요.”
발표자는 아예 배우는 자세가 되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앉아 있던 현지 의료진 중 몇몇은 아예 수혁의 말을 받아 적고 있었다.
누군가는 녹음마저 하고 있었다.
다들 본능적으로 느낀 모양이었다.
이건 승부가 아니라 처벌이고 동시에 강의라는 것을.
애초에 김문제 교수라는 사람은 수혁과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동시에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다른 악성 종양이나 감염 또는 자가 면역 질환의 증거가 없어야 하죠. 자, 이것을 모두 만족할 때……. 우리는 반드시 한 가지 질환을 떠올려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요?”
수혁 또한 마치 교수라도 된 듯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고 또 물었다.
덕분에 태화 의료진 중 하나가 정답을 알아내기는 했으나 굳이 나서지는 않았다.
이게 정말 본인이 알아냈다고 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 떠먹여 준 거 얘기해서 뭐 하냐……. 아예 떠올리지도 못했던 진단명인데…….’
오히려 진단명을 떠올리니까 더 수혁이 대단해 보였다.
어떻게 발표 자료만 보고 이 진단명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
김문제 교수도 수혁의 능력이 이 정도인 줄 알았다면 감히 승부니 뭐니 이런 소리는 꺼내지 못했을 거 같았다.
“성인 스틸씨병(Adult onset still’s disease). 다 들어 보셨죠?”
해서 수혁이 그 질환명을 직접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질환명을 듣자마자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튀어나왔다.
진단 과정이 해괴해서 그렇지, 진단명 자체가 아주 낯선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대부분의 의료진이 성인 스틸씨병에 대해 알고 있다는 뜻인데, 그 질환에 환자를 대입하고 보니 아주 잘 들어맞았다.
“어떤가요? 전형적이죠?”
“아……. 그렇…… 그렇네요? 왜 이걸…….”
“원래 감별 진단이 선행되어야 하는 질환에 대한 진단은 어려운 겁니다. 제가 방금 했듯이……. 감염이 아니라는 것을 떠올려야 하고, 또 자가 면역 질환 중 비슷한 증상을 일으킬 수 있는 질환들을 배제해야 하죠. 당연히 제일 예후가 좋지 않을 질환일 악성 종양들을 배제하고요.”
“아……. 진짜 그 과정이…… 그랬군요.”
발표자는 수혁이 왜 이리 튀었다가 저리 튀었는지 이제야 알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건 다른 사람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히 태화 의료원 사람들의 표정 변화가 더 극적이었다.
단지 김문제 교수를 까기 위한 말들뿐이었다면 지금보다는 좀 더 적대적이었을 텐데.
그 저변에 가르침을 주기 위한, 숨은 동기가 있었다는 걸 듣고 나니 비난하기도 어렵지 않은가.
‘김문제 교수가 먼저 시비를 걸긴 했지…….’
‘왜 덤벼 가지고 저런 사단을 겪을까…….’
오히려 김문제 교수를 한심하게 보는 시선이 생겨나고 있었다.
[역시 수혁은 언변이 좋군요. 지금 사람들 반응 보고 계시죠? 김문제 교수 말고는 죄다 수혁에게 어떤 식으로든 감복하고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무서워하는 사람도 있고…….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요. 장강명 같은 경우에는 아까워하고 있습니다.]
‘뭐 다들 좋은 반응이네.’
[네, 이제 레지던트가 아니니까요. 마냥 이쁨만 받는 거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도 좋죠. 모두에게 존경받을 수는 없는 법이니.]
‘그래.’
수혁은 바루다의 말에 십분 공감하고 있었다.
그저 아랫사람이고 또 피교육자 신분일 뿐인 레지던트 시절에는 이쁨받는 게 최고의 덕목일 터였다.
오히려 너무 모나게 나가면 두들겨 맞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교수가 된다면, 그중에서도 부센터장이라는 지위에 오르게 된다면 얘기가 조금 달라져야만 했다.
서는 위치가 달라지면 마음가짐도 달라져야 한다, 이 말이었다.
“자, 그럼 진단이 됐으니 치료를 해야겠죠. 성인 스틸씨병의 치료는 어떻게 하나요?”
그 말을 한 번 더 마음속에 새겨서 그런가, 수혁은 아까보다도 한층 더 교수님 같은 얼굴이 되어 있었다.
아예 지팡이를 옆으로 밀어 놓고는 자리에 앉아 버리기까지 했다.
발표자도 주니어긴 해도 교수였으니 어찌 보면 무례한 언동이었지만.
발표자는 이제 더 이상 수혁을 뛰어난 레지던트 정도로 보고 있지 않았다.
그저 태화에서 온 천재 의사 또는 스승으로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어……. 우선 치료의 기본은 소염제…… 입니다.”
“지금도 소염제는 쓰고 있지 않나요? 보니까 해열에 아세트아미노펜만 쓴 건 아니던데요.”
“아, 그렇긴 합니다. 하지만…… 용량이 적절하지는 않을 겁니다. 애초에 해열에 목적을 두고 쓴 것이지, 질환의 치료를 목적으로 쓴 건 아니니까요.”
퍽 적절한 대답이기는 했다.
하지만 정답은 아니었다.
[떠다 먹여도 받아먹지를 못하네.]
‘이해해라. 여기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다잖아. 오히려 수술이야 좀 빨리 배울 수 있어도……. 내과는 그게 잘 안 되잖아. 시간이 걸리지, 아무래도.’
[이제야 제가 수혁을 가르치는 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해할 수 있겠네요.]
‘거기서 왜 내 얘기가 나와?’
[왜 틀렸나요?]
‘뭐 아주 틀린 소리는 아니지.’
내과 의사를 육성하는 길은 아주 험난하다고 보면 되었다.
우선 사고방식도 내과 의사답게 바꿔야 했고, 그 사고방식이 유의미하려면 지식도 채워 넣어줘야 했다.
단순히 교과서를 읽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부단히 환자를 봐야 했고, 또 숙련된 의사가 환자를 보고 판단하는 과정 또한 봐야 했다.
그럼에도 부족한 점이 있을 테니 컨퍼러스나 학회 발표 등도 있어야만 했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병원에 기대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렇긴 하지만 환자는 전신적인 증상을 보이고 있으며 동시에 위급한 상황입니다. 단순 소염제만으로는 상황을 해결할 수 없죠.”
“그럼…….”
“스테로이드를 써야 합니다. 고용량으로요.”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