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낭중지추 (1)
김다현이 무려 두바이 왕자와 굵직굵직한 일들을 처리하고 있는 동안 수혁을 비롯한 의료진들은 계속해서 두바이 병원에 대해 알아가고 있었다.
큰 건이야 위에서 알아서 하겠지만.
결국, 실무를 맡게 되는 건 현장에서 뛸 의료진 아니겠는가.
특히 장강명이나 김문제 교수처럼 이미 센터장 또는 분과장을 맡아 사실상 이곳에 올 가능성이 전무한 사람들보다는 이제 막 주니어 스텝을 달았거나 아직 펠로우인 사람들은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확실히……. 두바이로 연수를 오게 될 가능성도 있다는 말이 주효했군요. 눈이 벌게졌습니다.]
‘시설이 일단 좋잖아. 게다가 은퇴 앞둔 교수님들 중에 몇몇 분들은 이미 확정되었다는데?’
이현종이나 김승규 교수처럼 석좌 교수직을 받은 사람들이 온다는 얘기는 물론 아니었다.
하지만 태화는 아주 커다란 병원이었고, 또 역사 또한 깊은 병원이지 않은가.
저 둘이 제일 유명하다는 얘기가 다른 사람들은 유명하지 않다는 얘기로 이어질 수는 결코 없었다.
수많은 월드스타급 교수들이 존재했고, 그들 중 대부분은 놀랍게도 정년 퇴직 후에도 일하기를 원했다.
후학 양성이 되었건 계속 환자를 보겠다는 뜻이건 간에 그랬다.
상당수는 고향에 내려가길 원했지만, 소수는 두바이행을 택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다고 하더군요. 특히 이현종 교수 바로 아래가 온다는 건 좀 의외였습니다. 이제 막 60 된 거 아닌가?]
‘사실 심혈관 중재 시술을 65세 넘어서 새로운 환경에서 시도한다는 건 무리잖아. 조기 은퇴하고 여기 오면 정년 5년 연장해 준다고 하지, 돈도 더 준다고 하지, 집도 임대긴 해도 일단 나오지. 어떻게 보면 좋은 조건이지 뭐.’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교수 정년이 65세였기에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하고 퇴직과 함께 아예 은퇴해 버리는 것이 대세였더랬다.
하지만 최근엔 그게 좀 뒤바뀌었는데, 아무래도 평균 수명 아니, 건강 수명이 늘어난 탓이라고 봐야 할 터였다.
말이 65세지, 아직 멀쩡한 사람들이 태반 아니던가.
아직 필드에서 사람을 살릴 수 있는데 집에서 쉬는 것보다는 정년보다 조금 일찍 나와서 자기 병원을 꾸린다거나, 다른 환경의 병원으로 취직하는 경우가 왕왕 생기고 있었다.
그 와중에 두바이 병원이 단순 협력 병원 체제를 벗어나 직속 병원이 되는 건 엄청난 호재였다.
[하긴 그렇게 실력 좋은 의사들이 단지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은퇴하는 건 좀 아깝죠.]
‘너 어째 그 말 하면서 나 보는 눈빛이 심상찮다?’
[설마 수혁은 일찍 은퇴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죠?]
‘65세면……. 30년도 더 남았는데 그만큼 일하면 좀 은퇴하면 안 되냐?’
[안 되죠. 뭐 30년 사이에 저만큼 우수한 녀석이 나온다면 모르겠지만, 제 계산에 의하면 이만한 우연이 또 중첩될 가능성은 제로입니다. 그렇다면 수혁의 은퇴는 직무 유기입니다.]
‘직무 유기라니……. 뭔 개소리야. 나이가 돼서 은퇴하는 게 어떻게 직무 유기냐?’
[말 끊지 말고 끝까지 들으십쇼.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 경험치를 더 쌓고 데이터화하게 되면 이 세상에 오직 수혁만 제때 진단할 수 있고 또 수혁만 치료할 수 있는 환자가 늘 겁니다. 은퇴한다는 건 그런 환자를 저버리겠다는 말이나 다음없죠.]
‘허.’
당장 반발하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이 사실이었다.
세상에 은퇴도 못 하게 한다는 게 말이나 된단 말인가.
게다가 평소엔 환자를 그저 데이터로만 보는 놈이 환자 생명을 운운하면서?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지금 바루다가 하는 말 중에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하긴……. 이런 우연이 또 얼마나 있겠냐.’
공교롭게 인공지능 기기가 터졌는데 그 소프트웨어를 담고 있는 팁은 멀쩡할 확률만 해도 엄청 적을 터였다.
근데 그게 두개골을 뚫으면서도 멀쩡했고, 그 두개골이 뚫린 사람은 죽지 않을 확률은 또 얼마나 될까.
게다가 칩이 살아남아서 바루다와 같은 형태가 된다?
‘시발, 말이 안 되지.’
몇번을 생각해 봐도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연속으로 일어나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지 않은가.
이런 일이 30년 안에 또 일어날 수 있을까?
심지어 바루다 이후 전세계적으로 종합 의료 목적 A.I. 개발은 잠정 중단이 된 상황에서?
물론 30년 후의 일을 아무것도 아닌 수혁이 예측하는 건 말이 안 되긴 하겠지만.
현재로서는 요원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말이 안 되는 기적의 산물이라는 겁니다. 저와 수혁의 결합은. 이제 책임이 느껴지십니까?]
‘내가 피터 파커냐? 책임을 느껴야해?’
[아직도 쓸데없는 데이터가 남아 있네. 이런 거 다 지워야 의학 지식을 하나라도 더…….]
‘미친 소리 하지 마! 의학 지식만 있으면 그게 사람이냐?’
[영화에 대한 기억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그게 없으면 사람도 아니에요?]
‘말꼬리 그런 식으로 붙들지 말고……. 대강은 알아들었으니까……. 노력해 볼게.’
[그래요. 나원참. 의사에게 환자 열심히 보라고 설득을 해야 된다니, 이것참 개탄스러운 현실입니다.]
‘아오.’
수혁이 바루다와의 대화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젊은 의사들은 병원 둘러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처음처럼 그저 시설에 놀라고만 있는 건 아니었다.
“아……. 이렇게 동선을 뺐구나. 이렇게 되면 중환자랑 경증 환자랑 동선이 겹칠 일이 없네.”
“그게 중요해?”
“야, 우리처럼 맨날 환자 보는 사람이나 중환자 봐도 멀쩡하지……. 일반인이 그런 거 보면 무섭지. 실제로 PTSD 증세 호소하는 경우도 있다더라.”
“아……. 좀 끔찍스러울 수도 있긴 하겠다.”
이 병원이 태화보다 더 최근에 지어진 데다 설계에도 엄청난 돈을 쓴 만큼 곳곳에 그간의 고민이 담겨 있었고 동시에 해결책 또한 얼마간 담고 있었다.
방금 말한 중환자 동선의 분리뿐 아니라, 의료진 동선도 어느 정도 분리가 되어 있었고, 접수, 수납 또한 더욱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인프라만큼은 태화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역시 인력이었다.
“심혈관 중재 시술 가능한 사람이 없다며?”
“하나 있다는데……. 딱 1년 배웠다더라. 사실상 그 사람한테 시술 받는 건 실험이지.”
“뇌혈관도 그 사람이 한다던데, 맞아?”
“응. 한심하지. 그러니까 술 너무 먹지 마라. 여기서 쓰러지면 답 없어. 다른 병원도 사정이 비슷하대.”
“네가 해 주면 되지?”
“아……. 허가만 되면 그렇긴 하겠네.”
태화에서 온 젊은 의사들 수준보다도 전반적인 수준이 낮았다.
그렇다 보니 여기저기서 실수가 있었는데, 수혁에게는 그게 너무도 쉽게 보였다.
‘저건…… 치명적인 건 아니네.’
[네, 그냥 처방만 살짝 바꿔 주면 됩니다. 이따 말하죠.]
‘이것도 그렇고.’
[말해 줄 게 점점 많아지네요. 데이터화하겠습니다.]
‘응. 아니 뭔……. 뭐가 이러냐.’
[여길 보니까 태화가 얼마나 뛰어난 병원인지 알겠네요.]
‘그러니까. 자부심을 좀 더 가져도 되겠어.’
다행히 매뉴얼 자체는 태화의 것을 따르고 있어 치명적인 실수가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대부분은 이따가 말해 줘도 될 것들이었다.
그 말은 곧 안 그런 것도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특히 지금 수혁이 마주한 환자는 더더욱 그러했다.
“여긴 서브 중환자실입니다. 대부분의 한국 병원에 비하면 중환자실 캐파가 꽤 많은 편이긴 한데……. 그만큼 비용이 너무 비싸서 중환자실에 내려갈 정도가 아닌 환자들은 이렇게 서브 중환자실에서 보고 있습니다.”
수혁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동안, 현지 의사가 말을 이어 나갔다.
모르는 얼굴은 아니었다.
내분비내과 교수 알 막툼이었다.
이제 전반적인 병원 투어는 끝난 데다가, 각기 분과로 흩어진 마당이어서 이 자리에 있는 건 두 명의 젊은 교수, 펠로우 하나 그리고 수혁뿐이었다.
“서브 중환자실이니만큼 모든 환자가 저희 분과 환자인 것은 아닙니다만……. 대부분은 뇌하수체 선종 환자들입니다. 본래 저희 병원에선 불가능했던 수술인데 태화에서 파견 와 주신 이비인후과 교수님 덕에 TSA(TransSphenoidal Approach: 경접형동 접근법)가 가능해지면서 현재 두바이에서 이 수술은 이곳에서 제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아……. 그래서 코에 거즈를 대고 있구나.”
“네. 기존의 두개골 절개 접근법에 비해 훨씬 환자 예후나 회복이 빨라…… 아니, 뭐……. 태화에서 오신 분들이니 따로 설명이 필요하진 않겠군요.”
“그럼 여기는 결국 내분비내과에서도 보지만 신경외과나 이비인후과에서도 같이 보는 병동이겠군요?”
“네, 대부분 그렇습니다. 뭐, 아닌 환자들도 있어서 다른 분과에서도 오고 있고요.”
공교롭게도 펠로우 중 하나가 뇌하수체 선종을 주로 보는 사람이었던지라 꽤 깊은 대화가 오가기 시작했다.
펠로우는 중환자실이 아닌 서브 중환자실에 수술 후 환자들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고, 알 막툼 교수는 이런 환자들까지 중환자실에 둘 수 있을 정도로 병실료가 싸다는 것에 놀라고 있었다.
그사이 수혁은 한 환자 앞에 가 섰다.
[71세, 여자. 각막에 미세한 석회화가 진행되어 있습니다.]
‘주소는……. 의식 변화였네. 혈액검사 결과 고칼슘혈증. 얼마나 높았길래 이러지?’
[14.8mg/d 였군요. 정상치에 비해 상당히 높은 수치입니다.]
‘그래도 의식 소실을 일으킬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환자의 팔다리를 보십시오, 수혁. 하루 이틀 된 병이 아닙니다.]
‘음.’
바루다의 말에 이불을 살짝 들춰 보니 과연 엄청나게 말라 있었다.
그냥 살이 없는 게 아니라 근육 소실이 일어난 느낌이었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각막의 석회화가 일어나려면 고칼슘혈증이 꽤 오래 지속되어야 하니까.
그 말은 곧 이 환자에게 고칼슘혈증을 일으킨 질환이 뭐가 되었건 간에 만성 질환일 거란 얘기였다.
[드물지만 일차성 부갑상선 기능항진증이나 종양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냐, 이 검사 결과 봐. 그래도 오고 나서 바로 랩 긁었어.’
[인이 정상이고 부갑상선 호르몬은 오히려 낮군요. 그렇다면 2차적인 원인일 텐데…….]
‘제일 흔한 건 암이지.’
담당 의사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반드시 배제해야 할 질환에 암을 적어 두었다.
하지만 빼먹은 것도 있었다.
고칼슘혈증을 일으킬 수 있는 질환 중, 이 지역에서 호발 하는 질환이었다.
‘확실히 결핵은 우리나라가 제일 잘 보나 보다.’
[그러니까요. 이걸 빼먹네.]
‘검사……. 안 나갔지?’
[네. 흉부, 복부, 골반 CT만 나갔습니다.]
‘찍은 거야, 뭐야. 프로그램이 이 익숙지가 않으니까…….’
[저라고 알겠습니까? 저도 국산이에요.]
뭔가 좀 확인을 해 보려고 했는데 쉽지는 않았다.
애초에 의사라는 족속이 기계랑 친하지 않은데 수혁은 그 정도가 더한 사람이었기에 그랬다.
이게 사람이 많은 상황에서 낑낑거리고 있었다면 그나마 눈에 덜 띄었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게다가 알 막툼에게 수혁은 워낙에 깊은 인상을 준 바 있지 않던가.
애초에 눈여겨보고 있던 참이었다.
“이수혁 선생님,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