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낭중지추 (4)
수혁의 의견은 곧바로 영상의학과에 의해 검증되었고, 주치의와 알 막툼은 그 의견서를 인용해 외과에 수술 의뢰를 넣었다.
“복강경 조직검사요?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환자가……. 전신마취 견딜 수 있는 수준인가요?”
“아…….”
딱 전화를 걸자마자 주치의와 알 막툼은 할 말을 잊었다.
아직 고칼슘혈증이 교정되고 있는 상황도 아니지 않은가.
따지고 보면 복강경하 조직검사라는 건 결국 치료가 아니라 검사의 일환이었고.
그런데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을까?
‘잘못되면 어쩌지?’
의사들의 스트레스 지수가 높은 건 다름 아닌 지금과 같은 상황 때문이었다.
신이 아닌 이상 미래는 알 수 없지 않은가.
일의 경중을 따져 진행해야 할 텐데, 잘못 따졌을 경우 치러야 할 대가가 사람의 목숨이라니.
아무렇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제아무리 평생 그 저울질에 힘쓰겠다고 뛰어든 내과 의사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곤란해하는군요. 조언해 주시죠.]
‘오케이.’
다만 익숙해지거나 또는 현명해질 수는 있었다.
그러니까 저울질을 더 잘하게 될 수 있다는 얘긴데.
다행히 이 자리에는 저울질의 달인이라고 할 수 있는 수혁이 있었다.
“마취보다는 수면으로 처리하는 게 나을 겁니다. 어차피 조직검사만 할 텐데……. 트로카 꽂고 뭐 하는 시간 다해 봐야 10분에서 15분 내외 아니겠어요? 그동안 내과에서 바이털 지켜 준다고 하면 마취과에서도 동의할 겁니다.”
“아……. 네, 수면. 그렇네요. 그 수가 있었네.”
수혁은 아예 저울에 전신마취가 아닌 다른 것을 달아 버림으로써 문제를 간단히 해결해 주었다.
옛날 같았으면 어림도 없는 짓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수면유도제나 그사이 모니터링하는 기술 등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마당이었다.
아니러니하게도 미용 시술이 보다 많아지고 또 발전하면서 덩달아 이렇게 된 마당인데, 이제는 필수 의료에서도 종종 빼먹을 수 있을 만한 기술이 되어 있었다.
“자, 그럼……. 약 들어갑니다.”
곧 환자는 수술실 안에 들어갔고, 마취과 의사는 불안한 표정과 함께 슛 버튼을 눌렀다.
누르기 전에 몇 번이나 환자 체중과 약용량을 계산했던지 수혁은 조금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을 지경이었다.
지이익.
아무튼, 버튼이 눌리자마자 미리 입력해 준 양에 맞춰 약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취과에서는 일반적으로 쓰는 약이 아니라 우윳빛의 약이었다.
우유 주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약, 프로포폴이었다.
워낙에 무분별한 남용의 대상이 되고 있기도 한 약이라 대중에게 이미지가 그리 좋지는 못했지만.
사실 임상 현장에서는 이것만큼 안정적인 약도 별로 없었다.
특히 호흡 억제에 대한 대비만 되어 있다면 정말 좋은 약이라 할 수 있었다.
‘오케이……. 혈압, 심박동수, 호흡수 다 괜찮아.’
[네, 부작용 보이진 않네요. 별문제 없이 진행할 수 있겠습니다.]
수면 마취라는 형태뿐만 아니라 아예 약제까지 추천했던 수혁은 미미한 미소를 지은 채 수술 장면을 바라보았다.
바람대로 환자의 바이털이 안정적인 동시에 완전히 의식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물론 수면과 마취는 달라서 감각이 전달될 수 있는 여지는 남아 있기에, 집도를 맡은 외과 의사는 트로카 꽂을 부위에 따로 국소마취를 시행했다.
“자, 그럼 시작합니다.”
외과 의사는 다시 한번 환자의 MRI와 CT 영상을 확인하고는 환자의 배로 고개를 돌렸다.
대한민국이었다면 아니, 태화였다면 아마도 원 포트 수술이 가능했을 터였다.
그 말은 곧 복강경을 할 때 구멍 하나만 뚫고 거기에 카메라니 뭐니 다 넣고 수술이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최근엔 조직검사가 아니라 맹장이나 담낭절제술까지 원 포트로 시행하기도 하지 않던가.
아쉽게도 아직 이 병원에는 그만한 기술을 지닌 의사는 없었다.
딱히 비난받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유럽의 많은 국가에서는 애초에 복강경이 아니라 그냥 배를 열고 수술하는 게 아직도 대세였으니까.
지이익.
작은 절개를 넣고, 트로카를 박아 넣었다.
환자가 하도 말라 있었기에 외과 의사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만 했다.
자칫 잘못하다가 장이라도 뚫어 먹으면 간단했던 조직검사가 개복수술이 될 수 있었다.
“오케이. 가스 넣을게요.”
다행히 불상사가 발생하는 일은 없었다.
일단 가스가 들어가 배가 빵빵해진 다음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배 안에 빈 공간이 많아진 상황 아닌가.
게다가 방금 뚫은 곳으로 카메라를 넣고 보면서 구멍을 뚫을 수 있게 되었기에 안전하기 이를 데 없다고 보면 되었다.
“됐어. 카메라 줘 봐.”
집도의는 일사천리로 트로카를 박아 넣은 후, 카메라로 배 안을 슥 훑었다.
[잘 봐 두십시오.]
‘너나 데이터화 잘해.’
사실 수혁이 프로포폴이 안전하게 들어간 것을 확인한 후에도 수술장에 남아 있었던 건,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언제 내과 의사인 수혁이, 그것도 다리를 저는 수혁이 수술장에서 환자 배 속을 볼 기회가 있겠는가.
게다가 환자의 배가 그냥 멀쩡한 것도 아니었다.
배 안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어휴……. 이거…….”
수혁의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 집도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가면 중얼거렸다.
딱히 복막의 결절을 찾기 위해서라면 카메라를 이쪽저쪽으로 돌려 가며 헤맬 필요가 없을 지경이었다.
어디를 향해도 거기 복막만 있으면 결절이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간과 비장에도 일부 결절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그쪽을 건드릴 생각을 하진 않았다.
복막과는 달리 간이나 비장은 핏덩이 그 자체이지 않은가.
괜히 객기 부리다가 환자 골로 보낼 수가 있었다.
“자, 그럼……. 뗄게요.”
집도의는 잠시 놀라고 있다가 이내 마음을 추스른 후, 집게를 집어 들었다.
이가 잔뜩 달린 포셉이었는데 무언가를 잡아 떼어내는 데 아주 효과가 좋았다.
꾸욱.
포셉은 곧 결절 중 하나를 물었고, 그중 일부를 훅 하고 떼어냈다.
집도의는 그 조각이 어디 닿지 않게 주의하면서 몸 밖으로 완전히 빼냈다.
이미 결핵일 거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는 상황이지 않은가.
결핵균이라는 놈은 무섭기 그지없어서, 이렇게 인위적으로 제거하다가 닿은 부위라면 그게 어디든 자라날 수 있었다.
실제로 아직 경부 결핵에 대한 경험이 쌓이지 않았을 때, 수술로 결핵성 결절을 모두 제거하다가 목 전체를 결핵에 뒤덮이게 만들었던 사례도 있었다.
“어디 보자.”
집도의는 그렇게 제거한 조직을 곧장 살펴보았다.
이빨이 꽤 컸기에 떨어져 나온 조직의 크기는 그리 작지 않았다.
아무튼 간에 뭔가 진단함에 있어서는 충분할 거 같다 이 말이었다.
“끝낼까요?”
해서 이 말을 했더니, 당연히 답변을 하겠거니 했던 주치의와 알 막툼 모두 엉뚱한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같이 틀었더니 웬 동양인 어린애가 보였다.
덧가운 아래 가운을 입고 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학생인 줄 알았을 터였다.
아니, 지금도 학생 의사인가 싶을 정도로 어려 보였다.
“아뇨, 동결절편검사를 하고……. 원하는 염색 검사를 통해 추후에 확진하려면 덩이 하나는 더 있는 게 안전할 거 같습니다.”
“음, 그렇다는군요. 하나만 더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알 막툼은, 그러니까 연차로만 따지면 자신과 비슷한 녀석이 동양인 의사의 의견을 자신에게 전달해 주었다.
딱히 동양인인 게 이상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외과 의사들은 더더욱 태화 의료원 사람들에게 배우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저 어린 친구는 원래 젊어 보이는 동양인치고도 너무 어려 보였다.
“어……. 네.”
그렇다고 수술장에서 의문을 표하는 건 좀 아니란 생각이 들어서 우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한 게 있으면 나중에 물어봐도 되지 않겠는가.
어차피 태화에서 파견 온 사람들이 며칠 더 있기도 할 테니, 기회는 많을 터였다.
게다가 이게 뭐 어려운 요구도 아니긴 했다.
집도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 꺼낸 포셉으로 다른 결절을 뜯어내 보여 줄 수 있었다.
“이거면 되죠?”
“아, 네. 충분하겠습니다. 우선 두 개 다 바로 병리과로 보내서 진단해 보죠. 감사합니다.”
“아……. 네. 그럼 깨워서 나갑니다?”
“네.”
수혁은 그 조직을 보자마자 알 막툼과 함께 병리과로 향했다.
주치의는 환자를 일단 다시 서브 중환자실로 옮기기 위해 남았다.
대신 전화기는 꼭 붙들고 있었다.
병리과에서 전화가 오면 바로 받기 위해서였다.
“이 층에 있죠?”
“아, 네. 수술실 안에서 바로 전달 가능합니다.”
“역시.”
옛날에 지어진 병원들은 수술실에서 나온 검체를 병리과에 검사 의뢰하기 위해서 아예 수술실을 나가야 되게끔 설계되어 있었다.
당시만 해도 동결 절편 검사 같은 게 없었기에 수술 중간에 검사를 의뢰할 만한 일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수술 도중 나온 검체를 순식간에 얼려서 보는 동결 절편 검사가 보편화된 지금에 이르러서는 설계 자체가 변해 버린 지 오래였다.
그렇게 된 이유는 동결 절편 검사가 염색한 검사에 비해서는 정확도가 떨어지지만, 숙련된 병리과 의사가 본다는 전제하에서는 99%까지도 일치한다는 보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덕에 외과계 의사들은 수술방 내에서, 특히 암이나 감염 환자 수술 시에 여기서 더 떼야 할지 아니면 닫아도 될지를 곧장 알아낼 수 있게 되었다.
“저기입니다.”
“아, 네. 바로 볼 수 있도록 푸시 가능할까요?”
“제가 직접 왔으니까 가능할 겁니다. 저기, 내과 알 막툼 교수입니다. 이 검체……. 일단 동결 절편 검사 가능합니까?”
알 막툼은 다리가 불편한 수혁을 앞질러 검체실로 향했다.
그리곤 수술실에서 가져온 검체를 내밀었는데, 그러자 안에 있던 직원이 조금은 당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 네, 잠시만요.”
직원은 곧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가 나왔다.
“혹시 어떤 질환을 의심하고 계시죠?”
“결핵입니다.”
“아……. 결핵…….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니, 같이 들어갈 수 있나? 어차피 수술은 외과에서 진행 중이라.”
“아……. 네, 안 될 거 없을 거 같습니다. 네.”
두 번째 들어갈 때는 검체는 물론이거니와 수혁과 알 막툼 또한 함께였다.
병리과 시설 또한 화려하기 그지없었는데, 우선 현미경 장비가 장난이 아니었다.
태화에도 하나밖에 없는 교육용 현미경이 무려 세 대나 놓여 있었다.
반전이 있다면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병리과 교수는 하나뿐이라는 점이었다.
자리가 없어서 능력 있는 사람도 밖으로 내보내야 하는 한국 실정과는 정확히 반대였다.
“결핵이 의심된다고요?”
“네.”
“검체가 어디서 뗀 건데요?”
“복막입니다. 복막 결절.”
“어……. 어, 그렇구나. 복막 결절이라……. 이야, 이건 또 처음이네.”
대화를 하다 보니 심지어 하나 있는 병리과 교수도 그리 실력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여차하면 우리가 진단합시다.]
‘알았어.’
바루다와 수혁은 당황하는 대신 그저 슬라이드를 볼 준비만 했을 뿐이었다.
예상대로 교수는 배율을 높이고 초점을 맞춘 지 오래임에도 불구하고 렌즈를 이쪽저쪽으로 옮길 뿐 별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하긴 했는데 알 막툼에게는 절망스러운 말밖에 없었다.
“이거 염색을 좀 해 봐야 정확하겠는데.”
그러다 보니 저도 모르게 고개가 수혁을 향했다.
‘병리를……. 이 사람이 어떻게 알아.’
머리로는 모를 거라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조금은 쪽팔리기도 했다.
겉만 화려할 뿐 내실은 형편없는 두바이 병원의 현실을 낱낱이 들키는 거 같아서였다.
“음.”
아니나 다를까, 수혁의 입에서도 탄식이 터져 나왔다.
적어도 알 막툼은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어지는 말은 뜻밖에 전혀 다른 내용을 담고 있었다.
“결핵 맞네요. 여기 보시면 거대세포 관찰되고……. 건락괴사도 있고요. 동결 절편이라 잘은 안 보이지만……. 여기 이렇게 보면 확실해 보이죠?”
“어…….”
“바로 결핵약 처방합시다. 레지멘은…… 환자 나이 및 현 상태 그리고 병력 고려해서……. 아이소니아자이드 300mg, 리팜핀 150mg, 마이암부톨 400mg, 피라지나마이드 1g, 피리독신 50mg로 하죠. 그럼 좋아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