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낭중지추 (5)
수혁의 처방은 속된 말로 기깔 났다.
그의 처방을 받은 환자들은 정말이지 하나같이 좋아지기만 했다.
제일 먼저 차도를 보인 것은 김다현과 함께했던 중환자실 투어에서 본 결핵성 뇌수막염에 동반된 뇌성 염분 소실 증후군 환자였다.
“퇴원하고 첫 외래죠?”
“네. 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진짜 이렇게 좋아질 거란 생각은 못 했는데요.”
“지금은 진짜 멀쩡하네요?”
“네. 또 감사 인사 하고 싶다고 하는데…….”
“하하, 뭘 감사 인사를 두 번씩이나 합니까.”
수혁은 그 환자를 외래에서 마주치는 자리에서 의도적으로 대인배적인 면모를 보였다.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이는 수혁이 진짜 대인배라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수혁은 자신의 공을 될 수 있으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알아줬으면 하는 인간이지 않은가.
지금은 그저 철저히 바루다의 조언에 따르고 있을 뿐이었다.
[김다현 사장이 귀국하면서 굳이 따로 불러다 얘기했죠?]
원래 같았으면 바루다가 뭔 소리를 해도 대강 씹었을 터였다.
어차피 김다현 사장이 처음 주문했던, 병원 사람들에게 인상을 남겨 줘라 정도는 차고 넘치게 해 놓은 참이었으니까.
하지만 김다현은 원래 같았으면 그냥 갔어야 할 공항에 굳이 수혁을 대동하고 갔다.
그 바람에 수혁은 괜히 야밤에 공항을 왕복해야 했는데, 그 때문에 화가 났냐고 한다면 천만의 말씀이었다.
‘응. 여기 경영진들에게 귀띔을 해 뒀으니……. 말이 어떻게든 팍팍 들어갈 거라고 했지.’
두말하면 잔소리겠지만 두바이의 왕족들은 어마어마한 부자들이었다.
그저 말로만 오일 머니, 오일 머니 할 때는 조금도 체감하지 못한다고 보면 되었다.
수혁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그 돈으로 지어진 도시 두바이에 오고 나서는 생각이 많이 바뀌어 있었다.
[이 사람들의 후원을 받게 되면 이건 아예 얘기가 달라집니다.]
인공 도시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도시였다.
그러면서도 화려하기 그지없었는데, 원래 안목이 대단한 건지 아니면 취향마저도 돈으로 극복한 건지는 몰라도 동시에 촌스럽다는 느낌을 주지도 않았다.
심지어 병원 또한 하나의 거대한 갤러리 같았다.
안에 얼마나 많은 미술품이 있던지.
직접적으로 환자 진료에 도움을 주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그 안에서 일하는 의료진들의 마음에 평화를 줄 것은 명확해 보였다.
‘그렇지. 그러려면…….’
[실력이야 이미 충분히 보인 셈입니다. 아마 김다현 사장도 계속 어필했을 것이구요.]
생명의 은인이라는 점을 대외적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을 정도로 수혁을 띄워 주고 있지 않던가.
대놓고 의전으로 차별하는 것만 봐도 그랬다.
그 말은 곧 김다현이 자신이 세울 새로운 체제에서 수혁이 차지하고 있는 포션이 꽤 크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연히 병원 사람들 앞에서만 수혁을 어필하지 않았을 거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수혁은 이제 뭘 해야 할까?
[최대한 인격적으로 보이십시오. 너그러운 모습하고 겸손한 모습.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런 사람을 싫어하는 문화권은 없었습니다.]
바루다는 인성을 드러내 보이라는 조언을 한 참이었다.
이게 만약 오래도록 유지해야 하는 일이었다면 솔직한 얘기로 불가능했을 터였다.
수혁이 뭐 개차반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훌륭한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인격만 따지면 지금 서울에 남아 환자를 보고 있는 신현태가 훨씬 나았다.
하지만 수혁은 연기력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잠시 속이는 것 정도라면 신현태보다 훨씬 잘 해낼 자신이 있었다.
“저는 그저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교수님.”
“아이고……. 이거야 원. 이수혁 선생님하고 얘기하다 보면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집니다. 이렇게 훌륭하신 분이 또 계실 줄이야.”
“아뇨, 아뇨. 훌륭하다뇨. 저는 아직 많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여기 와서도 교수님을 비롯한 여러 현장 의료진들에게 배우고 있는걸요.”
“하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위로가 되는군요.”
그 덕에 이미 알 막툼 교수는 홀랑 넘어가 버린 지 오래였다.
어찌나 사람이 나긋나긋하고 또 싹싹한지.
이 나이에 이런 실력이 있으면 정말 싸가지 없을 거라 생각했던 과거가 부끄러워질 지경이었다.
물론 수혁이 속인 사람이 알 막툼뿐인 건 당연히 아니었다.
“이제 숨찬 증상도 없어졌고……. 사실상 퇴원이 가능합니다.”
성인 스틸씨 병원으로 치료 중인 환자를 치료하고 있는, 일전에 발표했던 의료진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 다행이네요. 스테로이드가 잘 들어서.”
“결핵 여부에 대해서도 계속 모니터링 중인데……. 역시 괜찮습니다. 이수혁 선생님이 다 맞았어요.”
“운이 좋았죠. 몇 개 되지 않는 단서로 넘겨짚은 것뿐입니다.”
수혁은 방금 말은 자기가 했으면서도 순간 역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대놓고, 티 나는 겸손을 떨어도 되나 싶어서였다.
“아닙니다. 넘겨짚었다뇨? 저는 그날 이수혁 선생님께서 보여 주신 진단 흐름을 매일 되새기고 있습니다. 정말 큰 공부가 되었어요.”
물론 상대는 전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기 환자를 살려 준 사람 아닌가.
그런 사람이 하는 말은 어지간하면 다 좋아 보이게 마련이었다.
아마 수혁이 여기서 다 자기 덕이고, 자기 아니었으면 환자 죽었다고 얘기했어도 그러려니 했을 터였다.
그런데 오히려 겸손을 떨어?
이건 정말이지 인격자였다.
‘루미의 현신인가?’
열렬한 이슬람 신도이기도 한 발표자는 13세기 이슬람의 성자이자 시인이었던 루미를 떠올릴 지경이었다.
현재 우리가 이슬람에 가지고 있는 생각과는 다르게 루미는 사랑에 대해 노래했던 사람인데, 여전히 꽤 많은 무슬림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발표자는 루미가 썼다는 시중 몇 개의 구절을 외울 수도 있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받아들여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네요. 저도 환자분을 좀 볼 수 있을까요? 맨날 랩으로만 보니까……. 아쉬워서요.”
“물론입니다. 환자분도 이수혁 선생님을 알아요. 저나 뭐 다른 사람들이 하도 떠들어서요.”
“그럴 것까지 있었을까요? 치료는 다 여기 계신 분들이 하신 건데요.”
“방향을 결정해 주신 건 이수혁 선생님이니까요.”
“과찬입니다, 하하.”
수혁은 발군의 연기력으로 자애로운 미소와 함께 듣기만 해도 흐뭇해지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이건 좀 듣기 역겨운데.]
애초에 이러라고 했던 바루다조차 힘겨워할 정도의 연기였다.
하지만 바루다나 그 연기를 펼치고 있는 장본인인 수혁을 제외하고는 모두 긍정적이었다.
“아, 이수혁 선생님이시군요……. 저를 살려 주셨다고요.”
환자도 그랬다.
아니, 환자가 제일 그랬다.
실제로 주변에서 수혁이 살려 준 거란 말을 계속 들은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반응을 보이긴 어려웠다.
“어어……. 앉아 계시죠. 너무 급하게 움직이시면…….”
“괜찮습니다. 생명의 은인이신걸요.”
“제가 한 일이라곤……. 힌트를 찾아낸 것에 불과합니다. 나머지는…….”
수혁은 말을 잇기 전에 바루다의 의견을 묻기로 했다.
지금까지는 선을 넘어도 대강 좋게좋게 받아들여진 거 같은데, 이번에도 그럴까 하는 강한 의문에 사로잡혀서였다.
[뭐……. 신 얘기하려고요?]
‘어.’
두바이는 미래 도시를 연상케 할 정도로 세련된 도시인 동시에 곳곳에 종교 시설이 산재한 도시이기도 했다.
이슬람 국가에서 종교란 사회에서 뗄래야 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인사말마저도 ‘앗살라말라이쿰’이지 않은가.
단순 안녕하세요라는 뜻을 품고 있다기보다는 ‘당신에게 알라의 평안이 깃들길’이라는 말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만큼 이곳에서 신을 언급하는 것의 무게는 대한민국의 그것과는 많이 달랐다.
[뭐……. 하세요. 제가 검토해 보니……. 이만하면 괜찮을 거 같습니다.]
‘레퍼런스는?’
[수혁이 의학서 외에는 읽은 서적이 없다는 건 알고 있죠? 양심이 있으면 그렇겠지, 설마.]
‘뭔 얘기를 하려고……. 레퍼런스가 뭔데.’
[미드지, 뭐. 드라마 말고 본 게 있나.]
‘이런 제길.’
중요한 얘기를 해야 되는데 근거가 미드라니.
원래 같았으면 말을 하지 않아야겠지만.
지금까지 보여 준 반응을 돌이켜 보면 용기가 샘 솟았다.
게다가 이곳에 근무하는 이들은 뭐가 어찌 되었건 간에 TV에서만 보아 오던 무슬림들하고는 좀 다르지 않던가.
뭐라고 해야 하나.
관용이 있다고 할까?
외국인, 특히 무슬림이 아닌 이들이 저지르는 실수에 대해서는 관대한 편이었다.
“나머지는 여기 계신 의료진들과 신께서 치료해 주신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늘 의료진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할 뿐, 결과는 신께서 내신다고 믿습니다.”
“오.”
“허.”
당장 이렇다 할 반응은 없었다.
수혁의 말을 무시했다, 뭐 이런 뜻은 아니었다.
다만 할 말을 잊은 사람들처럼 보였다.
아마 착각은 아닐 터였다.
‘뭐……. 제대로 한 건가?’
[알라 욕하지 않았잖아요? 알라 얘기도 안 했지, 사실. 그냥 신이라고 했지.]
‘이 사람들은 신이라고 하면 무조건 알라 아냐?’
[그야 그렇죠.]
바루다는 빠르게 분석에 들어갔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럴 필요도 없었다.
갑자기 발표자가 수혁의 발등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이 행위가 의미하는 바는 아주 명확했다.
아니,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공통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알라를 모시는 사람으로서 오늘 또 하나 배워 갑니다.”
“제가 몸만 허락했다면……. 저 또한…….”
환자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다른 의료진들 또한 그랬는데, 마치 병실이 하나의 예배실이 된 듯한 기분이 들 지경이었다.
불신자인 수혁과 무신론자인 바루다만이 조금 생경한 마음으로 서 있었는데, 그 기분이 그렇다고 과히 나쁘지만은 않았다.
뭐가 어찌 되었건 긍정적인 기운으로 가득 차게 된 것만은 사실이었으니까.
‘이런 게 종교적 경험이라는 건가?’
심지어 수혁도 마음 한편에서는 거룩한 느낌을 받았을 지경이었다.
바루다야 깡통일 뿐이니 전혀 그런 게 없었지만.
아무튼, 수혁도 이랬다는 건 신자들은 정말이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감명을 받았단 소리가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온 의사가 불세출의 천재라는 것만 해도 엄청난 얘깃거리인데, 그 사람의 신에 대한 태도 또한 모범적일 줄이야.
소문은 금세 일파만파 퍼져 나갔고, 곧 두바이 협력 병원 총책이자, 병원이 자리한 블루라군 개발을 도맡아 하고 있는 알 나지르 왕자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래?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했어?”
“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온 의사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 건 처음입니다.”
“흐음…….”
알 나지르는 저도 모르게 호감이 싹 트는 것을 느꼈다.
모름지기 신의 위대함을 아는 사람은 신뢰해도 좋은 법 아니겠는가.
게다가 그런 사람이 하필 이 병원에 투어를 왔고 또 괄목할 만한 진료 성과를 보였다.
이게 우연일까?
아닐 거 같았다.
‘신의 섭리…….’
실은 바루다와 수혁이 만들어 낸 거짓 작당에 불과했지만.
말이 말의 꼬리를 물고 퍼지는 동안 살이 붙고 또 붙어서 알 나지르가 들었을 때는 정말이지 아주 그럴싸한 설화가 되어 있었다.
“한번 보지. 내가 시간을 낼게.”
“아……. 네. 왕자님. 그렇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