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화 아랍 왕자 (1)
알 나지르 왕자의 뜻은 거의 순식간에 수혁에게 전달되었다.
아니, 수혁에게만이 아니라 이제 슬슬 떠날 준비를 하고 있던 태화 의료원 소속 인원 전원에게 전달되었다.
“아……. 왕자님이 이수혁 선생을요?”
“네, 장 교수님. 그렇게 연락이 왔습니다.”
장강명은 그 소식을 들고 온 현지 직원을 바라보았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닌지 퍽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랍 왕자라는 게 대체 어떤 존재들이란 말인가.
물론 일부다처제이니만큼 조선의 왕자처럼 희소한 사람들은 아니긴 했지만.
뭐가 어찌 되었건 세상에서 제일 현금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이런 일이……. 별로 없죠?”
“네? 그럼요. 저희가 지금까지 일 진행하면서 알 나지르 왕자를 대면한 건……. 처음 딱 한 번뿐입니다. 김다현 사장님 오시고 나서야 한 번 더 얼굴을 보이신 거예요.”
“아…….”
하지만 막상 얘기를 들어보니 생각보다 더 드문 일인 모양이었다.
세상에 이만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여태 딱 두 번 얼굴을 보였을 줄이야.
태화 회장을 맡고 있는 이유원보다도 더 얼굴을 보기 힘들단 뜻이었다.
“원체……. 블루라군 전체 프로젝트에 비하면 의료원 자체는 작은 프로젝트이긴 합니다. 거의 새로운 도시를 하나 더 만드는 느낌이거든요.”
“아……. 블루라군이라는 게……. 그렇게 큰 프로젝트란 말입니까?”
“네. 병원에서는 거리가 좀 있지만, 병원과 같이 진행하고 있는 연구 시설 등은 그쪽에 지어질 예정입니다. 실제로 가 보시면 정말 어마어마합니다. 오일 머니가……. 진짜 무섭긴 해요.”
“그렇군요. 근데 그 왕자가 우리 이수혁 선생을 따로 보자고 한다라…….”
무게를 정확히 체감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지만.
하여간에 어마어마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네, 지체 없이 대답을 드려야 할 거 같습니다.”
“어차피 거절은 불가능한 거 아닌가요?”
“뭐…… 그렇죠. 사실상 이번 프로젝트의 쩐주니까요.”
장강명은 속으로 트와이스의 ‘yes or yes’를 떠올렸다.
거절은 거절한다고 했던가.
뭐 거의 그런 수준의 제안이었다.
그렇다고 기분이 나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장강명을 찾았다면야 정말 좋았겠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닌가.
그나마 병원 의사 중에서도 찾은 사람이 하나 있다는 걸 위안으로 삼아야 했다.
“알겠습니다. 바로 전달하죠.”
“네, 얼마나 걸릴까요?”
“뭐……. 전화 통화만 하면 되죠.”
“네, 교수님.”
해서 장강명은 곧장 수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혁은 여전히 병원에서 연기를 수행하고 있던 와중이었기에 전화를 바로 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역시 진심을 담고 있지도 않았기에 그렇게 오래 방치하지도 않았다.
“네, 교수님. 이수혁입니다.”
“어, 이수혁…….”
장강명은 그렇게 전화를 받은 수혁을 뭐라고 지칭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아니, 반말을 이어 나가도 되는 건가에 대한 고민마저 이어졌다.
지금이야 당연히 장강명이 한참 윗사람이지만.
이게 언제까지 갈까 의심이 들어서였다.
‘뭐 의사 사회에서 후배가 선배 제끼는 경우가 없었다고는 하는데…….’
워낙에 후딱후딱 바뀌는 세상이 오지 않았던가.
다른 직종 다 변하는데 의사만 언제까지나 독야청청하리란 법은 없는 거 같았다.
특히 일반적인 대학병원이 아닌, 기업 병원이라 할 수 있는 태화에서는 더더욱 가능성이 있었다.
실제로 이미 태화 그룹은 선배고 후배고 의미 없어진 지 오래기도 했고.
김다현 사장만 해도 숱한 선배 다 제끼고 사장을 단 마당이었다.
“어, 그래, 이수혁 선생님. 그……. 알 나지르 왕자께서 뵙자고 하시는데, 시간 괜찮아요?”
결단이 선 장강명은 출세 지향적인 사람답게 순식간에 태도를 바꿨다.
어찌나 태세 변환이 빨랐는지 전화를 받은 수혁은 물론이고 바루다마저 놀랄 지경이었다.
[이 인간이 왜 갑자기 존댓말을 하죠? 나이도, 직급도 위인데?]
‘나도 몰라. 근데 알 나지르 왕자가 누구야.’
[너무 저한테 모든 기억을 맡기는 거 아닙니까? 지금 이 병원 투자자잖아요.]
‘아……. 그런 사람이 왜 나를 보지?’
[깊은 인상을 남겼나 보죠. 생각해 보세요, 어제 병실에서 있었던 일을. 나는 그때 무슨 예배 드리는 줄 알았다니까.]
‘뭐……. 좋은 일이겠지? 설마 그랬다고 뭐라고 하려는 건 아닐 거 아냐.’
[당연하죠.]
하여간에 좋은 일이란 생각이 들기는 했다.
또한 굳이 장강명에게 왜 갑자기 존대하냐는 말을 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란 판단이 섰다.
해서 수혁은 그냥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가기로 했다.
“아……. 네. 그럼 만나 봬야죠.”
“지금 당장 시간 되나요? 어차피 정규 스케줄은 없잖아요. 자유 시간인데……. 어디예요, 지금?”
“병원입니다.”
“응? 병원?”
“네. 제가 관여했던 환자들 팔로우 업 하고 있었습니다.”
“아…….”
병원이라.
장강명은 그제야 왕자인지 나발인지가 왜 수혁을 찾는지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았다.
다른 의료진들은 자유 시간이 주어지자마자 전부 부르즈 칼리파니 뭐니 하면서 놀러 나가지 않았던가.
당장 장강명만 해도 그간의 노고에 대한 보상도 줄 겸해서 호텔에서 쉬고 있었고.
그런데 제일 어린놈은 병원에서 환자를 보고 있었다니.
실력 다 집어치우고 놓고 보더라도 깊은 인상을 주기에 충분해 보였다.
‘종잡을 수가 없네…….’
이상한 생각이 아예 들지 않는 건 아니었다.
왜냐면 태화에서도 열심히 하는 축에 속하긴 했지만.
일단 일이 끝나고 나면 칼같이 개인 시간 갖는 거로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거의 공식적으로 놀아도 되는 시간에 환자를 봐?
뭔가 꿍꿍이가 있지 않고서야 그럴 수가 있나 싶었다.
‘그게 뭐……. 중요하겠냐.’
하지만 뭐가 되었건 간에 왕자의 귀에 수혁의 이름 석 자가 들어갔다는 것이 중요한 시점이었다.
게다가 장강명은 딱히 수혁과 척을 지고픈 사람도 아니지 않은가.
센터장을 이어 나가기 위해서라도 수혁을 지지해야 하는 쪽이었다.
“그럼 어쩌지? 차를 보낼까요?”
해서 장강명은 쓸데없는 의심을 지우고 직원을 돌아보았다.
직원은 더 시간이 지체될까 두려워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차가 없으면 직접이라도 데리러 갈 요량이었다.
“네. 로비에서 기다려 달라고 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러죠.”
해서 수혁은 로비로 나갔다.
밴이나 탈 생각에서였는데, 놀랍게도 코앞에 와서 선 차는 롤스로이스였다.
평생 살면서 이런 차 본 게 두바이 와서 처음이었는데.
이제는 타게 생긴 마당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이수혁 선생님. 이쪽으로 오시죠.”
심지어 말쑥하게 차려입은 기사가 부리나케 내리더니 수혁을 수행하려 했다.
더 놀랄 만한 일은 이미 수혁에게는 비서가 마련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에스코트는 제가 하겠습니다.”
“누구……?”
“이수혁 선생의 개인 비서입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럼, 뒷자리에 같이 타시겠습니까?”
“네.”
기사는 워낙에 높은 사람들을 모셔 온 입장이라 그런지 상황 파악이 빨랐다.
‘하긴, 왕자님이 모셔 오라고 하는 사람치곤 너무 젊다고 했어. 한국에서 신분이 되게 높은 사람인가 보지?’
그 상황 파악이라는 게 태반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긴 했지만.
아무튼 간에 수혁은 별다른 갈등 없이 김 비서의 도움을 받아 차량에 탑승할 수 있었다.
“준비되셨으면 출발하겠습니다.”
“아, 네.”
롤스로이스는 본격적인 쇼퍼 드리븐 카, 즉 뒷자리에 앉는 사람을 위한 차였기에 승차감 또한 남달랐다.
말을 듣지 않았다면 아예 출발했는지도 몰랐을 지경이었다.
[미친, 이 정도면 차가 아니라 예술이네.]
‘웬일이냐? 네가 다른 기계를 칭찬할 줄도 알고?’
[뭐 그래 봐야 머리도 없는 녀석이긴 하지만……. 그래도 제법 좋네요. 이만한 차라면 평생도 타겠습니다.]
‘어……. 너 이게 얼마인지 모르지?’
[모르죠. 수혁은 차에 관심이 없지 않습니까? 설마 제가 모르는 걸 수혁만 안다고 주장할 생각은 아니겠죠.]
‘응, 사실 나도 몰라.’
수혁은 자기 차가 있기는커녕 면허도 없는 사람 아닌가.
딱히 게을러서가 아니라 차를 탈 일이 아예 없어서였다.
365일 병원에서 자고, 또 그 근처에서만 생활하는데 뭔 놈의 차가 필요할까.
[근데 좋긴 좋네요. 널찍하니……. 다리가 짧아서 그런가 쫙 뻗을 수도 있고.]
‘넌 꼭 말 중간중간에 시비를 걸더라?’
[시비로 여겨졌습니까? 저는 그냥 팩트를 얘기했는데.]
‘아오.’
그런 사람에게 갑자기 하이 엔드 카를 탈 기회가 주어지다 보니 눈이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튼, 이거 가격이 얼마나 됩니까? 부센터장 되면 그래도 보직 수당까지 해서 월급 천만 원 가까이 될 텐데……. 몰아 보시죠.]
‘검색이나 해 보자.’
그러다 보니 감히 롤스로이스를 몰아 보겠다는 생각마저 떠올리게 되었다.
아마 수혁과 친분이 있는 사람 중 하나라도 옆에 있었다면 뒤통수를 후려쳤겠지만.
아쉽게도 김 비서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이게 진짜 가격입니까?]
‘응……. 지금 이 차가…… 집값인데?’
[아주 몹쓸 물건이로군요? 거 차를 타면 얼마나 탄다고 조금 편하자고 이런 돈을 써?]
‘그러니까 말야. 이거 아주……. 어? 아주 쓰레기 같은 차네.’
다행히 수혁이나 바루다나 현실적인 존재들인지라 가격을 보자마자 금세 마음을 접을 수가 있었다.
아니, 접은 정도가 아니라 여우와 신 포도를 떠올릴 만큼이나 극명한 태도 변화를 보여 주었다.
“도착했습니다.”
그렇게 수혁과 바루다가 내면의 갈등을 겪는 사이 차량은 미끄러지듯 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널찍한 정원이 있는 저택이었는데, 차량이 멈추어 서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사람이 문을 열어 주었다.
“이수혁 선생님?”
“아, 네.”
“환영합니다, 제 손을 잡고 내려오시죠.”
그리곤 수혁을 부축하여 차량에서 내리는 것을 도왔다.
동시에 김 비서에게는 밖에서 대기해 달라는, 일종의 명령 같은 부탁을 했다.
“음, 네. 알겠습니다.”
한국에서 높은 사람이라면 뻔질나게 모셨던 김 비서이지만 아랍 왕자를 본 적은 없지 않은가.
사실 차량에 타면서부터 이미 자기 손은 떠났다고 여기고 있던 참이었다.
게다가 오면서 연락을 주고받은 김다현의 비서진으로부터 잠자코 있으라는 명도 받은 상황인지라 군소리 없이 고개를 숙였다.
“어……. 그럼 다녀올게요.”
“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수혁은 홀로 알 나지르 왕자의 수행원에게 둘러싸인 채 저택 안으로 향했다.
[와……. 개좋네.]
저택은 인공 도시 안에 있는 건축물이라기보다는 딱 수혁의 머릿속에 있는 중세 이슬람 왕궁을 연상케 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특히 중정이라기엔 너무 커다란 저택 중간중간에 있는 정원들이 계속 눈을 사로잡았다.
그야말로 아랍의 왕자가 사는 곳이라기에 충분한 곳으로 보였다.
“인사하시죠. 알 나지르 왕자 저하이십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 알 나지르가 서 있었다.
흰 린넨 소재의 옷을 입은 알 나지르는 그야말로 아랍 왕자 그 자체였다.
잘생긴 외모 하며 당당한 체격까지, 어린 시절 동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정작 수혁이나 바루다의 시선을 빼앗은 것은 그 뒤에 있는 사람이었다.
‘와, 이쁘다.’
[어딘가 아파 보이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