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아랍 왕자 (2)
뒤에 있는 여자에게 시선을 뺏긴 이유는 각기 달랐다.
아무래도 수혁 쪽이 조금 부끄러워지는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이뻐요? 발정이 나셨나.]
‘아니……. 객관적으로 그냥 이쁘다는 생각도 못 하냐?’
[왕자를 만나는 상황에서 아무리 봐도 왕자 아내나 여친 같아 보이는 사람을 보고 이쁘다고 평하는 게 정상입니까?]
‘음.’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문제 있는 생각 아니겠는가.
이건 수혁의 타고난 성정에 상당한 양의 뻔뻔함이 내재되어 있다 해도 그냥 버티기는 좀 어려웠다.
곧 항거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 몰려왔고, 수혁은 최근 들어서는 드물게 사과를 내뱉고야 말았다.
‘미안. 미안하니까……. 일단 왕자와의 대화에 집중하게 해 줄래?’
[음, 알겠습니다. 일단은 그러죠.]
다행한 것은 이제 바루다 또한 높은 사람과의 대면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에 대해 깨달은 지 오래라는 점이었다.
때문에 바루다는 수혁의 사과가 있자마자 바로 협조를 시작했다.
[일단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요. 다만 호의보다는 호기심이 표정 전반에 떠 있습니다. 병원에서 연기하던 것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게 좋겠습니다.]
‘내 진짜 모습 말고?’
[그럼 별로 안 좋아할 거 같은데요.]
‘알았다.’
협조의 내용이라는 게 딱히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하여간 도움이 되는 내용이기는 하지 않은가.
게다가 지금은 아무도 의지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해서, 수혁은 하릴 없이 바루다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네, 왕자님.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정말 영광입니다.”
수혁은 본인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 바른 모습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쯤하면 상대가 누구건 에이, 아니라고 할 거라 예상하면서였는데, 의외로 알 나지르는 그저 그 인사를 당연하다는 듯 받을 뿐 다른 액션을 취하진 않았다.
“음, 그래. 계속 서 있기는 힘들어 보이는데……. 저기 앉지.”
“아, 네.”
심지어 명백한 하대를 하기까지 했다.
아직 군대에 다녀오지 않은, 앞으로도 갈 일이 없는 수혁에게 이렇게 하대하는 게 자연스러워 보이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워낙에 당당하게 하대를 당하다 보니 기분이 나쁠 겨를조차 없었다.
[이미 마음도 꿇었군요, 수혁.]
바루다의 빈정거림조차 스크래치를 주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만큼의 카리스마가 있었다.
“네. 왕자님.”
일단 왕자라는 직함부터가 그렇지 않은가.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생경하기 이를 데 없는 단어라 그런지 몰라도 절로 굽실거리게 되는 데 한몫하고 있었다.
“음, 그래……. 이렇게 보니 더 어려 보이는데. 흠.”
왕자는 그런 수혁을 흥미롭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태화 의료진에 대한 보고는 계속해서 올라오던 참이었다.
확실히 현지 의료진에 비해 실력이 좋다거나 하는 내용이 태반이었는데, 이미 예상했던 바라 그리 놀랍거나 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아랍 왕자로 살아온 그를 놀라게 할 만한 일이 적기도 했다.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도 아니고 유전을 물고 나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근데 그만한 활약을 했다 이거지?’
하지만 수혁에 대한 보고는 그런 알 나지르마저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일단 나이가 충격적이었다.
이제 겨우 만으로 28살이라지 않은가.
근데 교수를 찜 쪄 먹기도 모자라서 희귀 케이스 또는 난치 케이스로 분류되어 있던 환자를 마주하기만 하면 모조리 진단해 낸다니.
평소 즐겨 보던 미제 만화인 마블의 히어로와 비슷한 느낌이 들 지경이었다.
‘그러면서 인성도 좋다라…….’
왕자가 마블의 히어로에 관해 조금이나마 아쉬움이 있다면 약점이 있다는 건데.
어찌 된 게 눈앞에 있는 놈은 약점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꿈꾸던 만화 속 히어로가 나타난 느낌이란 얘기였다.
“병원 전반적인 느낌은 어땠지?”
물론 알 나지르는 나이에 비해 노회한 편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워낙에 많이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던가.
당연하게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법부터 배웠다.
“아……. 시설이나 안에 있는 미술품 등이 제일 인상적이었습니다.”
“치료 수준은?”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아직 가지고 있는 설비를 다 활용하지 못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훌륭하지만, 앞으로 더 발전할 여지가 많다고 느껴졌습니다.”
“그렇구만.”
왕자는 하나 마나 한 질문을 던지면서 동시에 수혁의 반응을 면밀히 살폈다.
어지간한 거짓은 다 간파할 자신이 있었는데, 그런 그로서도 수혁을 꿰뚫어 보진 못했다.
일단 수혁이 발군의 연기력을 타고나기도 했거니와, 그럼에도 숨길 수 없는 반응은 바루다가 지워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유 시간에도 병원에 있었던 이유는 뭐지?”
“음……. 저는 일단 제 손길이 닿았던 환자는 제 환자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퇴원할 때까지, 될 수 있으면 퇴원하고 첫 외래까지는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덕분에 입에 침 하나 안 바르고 거짓부렁을 일삼을 수 있었다.
원래도 그리 나쁜 의사는 아니었지만, 정말이지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의사로 탈바꿈할 수 있었단 얘기였다.
‘정말 훌륭한 사람이구나.’
알 나지르 왕자마저 감복하게 만들 지경이었다.
일단 실력으로 놀라게 만들었다는 것만 해도 대단한데, 인성마저 이렇다니.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백지 수표 쓰고 모셔 오고 싶을 지경이었다.
‘태화에서 중점 인재로 두고 있다고 했지.’
하지만 알 나지르는 체면을 아는 사람이었다.
주요 협력 기업의 뒤통수를 칠 만한 사람은 아니란 얘기였다.
해서 억지로, 간신히 욕심을 억눌렀다.
워낙에 돈이 많은 사람이다 보니 이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었다.
가지고 싶은 게 있으면, 그게 얼토당토않아 보이는 일이라도 가능한 사람이지 않은가.
그렇다 보니 잠시 입을 다물게 되었다.
‘야, 근데 너 아까 아파 보인다고 했어?’
자연히 틈이 생겼고, 수혁은 그 틈을 허투루 놀리지 않았다.
[응? 아, 네. 입술 색이 창백하던데요? 이 더운 나라에서 추위에 의한 것은 아닐 테니……. 혈압이 좀 낮다고 봐야겠죠. 아니면 산소 분압이 낮거나?]
‘어려 보이던데…… 나보다도 어려 보이지 않았어?’
[그러니 이상한 일이죠. 젊은 성인이 왜 입술 색이 창백해.]
‘흠…….’
[왜요?]
‘그 말을 꺼내는 게 옳을지 말지가 판단이 서지가 않아서.
수혁의 고민은 당연한 것이라고 봐야 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갑 중의 갑이지 않은가.
게다가 이미 잘 봐주고 있는데 굳이 나섰다가 삐끗하면 난리 날 수도 있었다.
특히 왕자의 아내인지 여친인지 모를 사람의 심기를 건드리는 건 위험했다.
[아……. 그렇네.]
‘그렇지?’
[근데 늦은 거 같은데.]
‘뭐가 늦…… 아, 이런 시발.’
해서 하지 말까 하고 있는데, 왕자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뒤에 있던 여자를 돌아보았다.
그리곤 수혁의 시선 방향을 확인했다.
동시에 표정이 조금 안 좋아졌는데, 그 이유를 모르면 바보였다.
“음.”
누구라도 노골적으로 자기가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을 보고 있다면 기분이 상하지 않겠는가.
그중에서도 특히 연애 대상을 그렇게 본다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을 터였다.
연애라는 건 다른 인간관계와는 달리 독점적인 관계여서였다.
“아, 왕자님.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는데, 괜찮을까요?”
이럴 땐 선수를 치는 게 옳았다.
얘기를 꺼낼까 말까 고민하는 건 의미가 없어진 마당 아닌가.
이제 와서 본 거 아니라고 해봐야 더더욱 기분을 상하게 만들 뿐이었다.
도리어 내가 본 거엔 다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해야 했다.
“음? 음, 그래. 말해 보게.”
왕자는 여전히 탐탁지 않아하는 얼굴이었지만.
그렇다고 입을 막거나 하지는 않았다.
너그러워서 그렇다기보다는 원한다면 언제든 입을 막을 수 있어서였다.
“실례지만……. 뒤에 계신 여성분을 보다 자세히 봐도 되겠습니까?”
“응? 왜 그렇지?”
“입술이 창백해 보여서요.”
“으응?”
왕자는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노상 보는 얼굴이라 그런지 이쁜 것 말고는 별다른 것을 느낄 수가 없었다.
또 지금 수혁이 있는 곳에서 입술 색이 분간이 가는지도 궁금했다.
‘이 새끼 개수작 부리는 거 아냐?’
약점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 어찌 있겠는가.
왕자가 보기에 수혁의 약점은 여자 같았다.
수혁이 들었다면 억울해서 팔짝 뛸 만한 일이었다.
적어도 여자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세상 누구보다 떳떳했으니까.
그게 딱히 인성 덕분이라기보다는 능력 부족이라서 그런 거라 드러내지 못할 뿐, 사고 친 적은 하늘에 맹세코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니지……. 근데 또 보고서에 다르면…….’
왕자는 화를 내려다 말고 생각에 잠겼다.
돌이켜보면 보고서 중 이런 내용도 있었기에 그러했다.
스쳐 지나가듯 본 환자의 얼굴만 보고 지금 내려져 있던 진단명 외에 다른 진단을 의심했다는 말이 있었다.
그 말은 곧 남들보다 눈이 좋다는 뜻일 터였다.
그래 봐야 개소리 같다는 생각이 완전히 지워지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덮어 놓고 개새끼라고 하기엔 어제 들은 일화가 인상적이었다.
‘거의 뭐 알라 이름만 안 불렀지, 이맘이었다고 했잖아.’
병실이 예배실로 화했다는 건 거의 어떤 설화에서나 나올 법한 얘기였다.
해서 왕자는 한번 믿음을 줘 보기로 했다.
개소리면 내쫓고 다시는 안 보면 될 일이었다.
“음, 그럼……. 당신, 가까이 와 보겠소?”
“지금요?”
“응, 지금.”
“알겠어요.”
왕자의 말에 따라 뒤에 있던 여자가 앞으로 다가왔다.
일반인들이 볼 때야 별반 이상한 점을 느끼긴 어려웠을 터였다.
아마도 너무 아름다워서일 수도 있을 텐데, 다행히 의사의 눈으로 돌아온 수혁은 더 이상 외모에 눈이 가려지지 않았다.
[봤죠?]
‘응, 무릎을 짚고 일어나네. 그러고도 걷는 동안 잠시 눈을 감고 있었어.’
[기립성 저혈압이 있어요. 저 사람 어떤 이유에서건 혈압이 낮은 겁니다.]
‘수치가 얼마나 될 지 예상은 안 돼?’
[그것까지 가늠하기엔 데이터가 부족해요. 한국인이면 그나마 어떻게 해 볼 텐데 외국인은 안 돼요. 부정확합니다.]
‘뭐가 되었건 혈압이 낮다 이거지.’
[네, 환자 나이 고려하면 정말 이상한 일이죠.]
‘오케이.’
사실 혈압이 비정상적으로 낮고 또 증상을 유별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상황이었다.
단지 그것만 말해도 응시한 죗값을 묻기는커녕 칭찬이 쏟아질 터였다.
“어디까지 가요?”
“어디까지 가지?”
“제 앞까지요. 그래야 진찰할 수 있으니까요.”
“괜찮은가요?”
“음, 그러지.”
“네.”
여자는, 그러니까 환자는 수혁의 앞에 놓여 있던 빈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와 동시에 표정에 안도감이 스쳤는데, 말은 안 해도 어지럼증이 꽤 불편한 모양이었다.
하긴 기립성 저혈압만 해도 크게 다치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심각하지 않던가.
“얼굴 좀 가까이 와 주실래요?”
“음.”
수혁은 망설이며 다가온 환자와는 달리 확신을 가진 채 눈꺼풀을 제꼈다.
[허옇네.]
‘빈혈이 있어. 이걸로는 수치화 가능, 불가능.’
[최대로 잡아 봐야 9도 안 될 거 같은데요.]
‘흐음……. 9도 안 된다라……. 근데 만성이면 증상이 없을 텐데?’
할머니들 중에는 혈색소 수치가 5도 안 되는 데도 증상이 없는 경우가 있었다.
고산 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또 적응해서 사는 것처럼 천천히 진행하는 빈혈에는 어느 정도 적응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9 언저리인데 증상이 있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급성 빈혈이군요. 주의 깊게 봐야겠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