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292화 (292/1,303)

292화 급성 빈혈? (1)

급성 빈혈이라.

순식간에 수혁의 얼굴이 진중해졌다.

머릿속에 여러 질환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중에는 다이어트로 인해서도 생길 수 있는, 실제로 대한민국에서는 가장 흔한 형태의 빈혈인 철 결핍성 빈혈과 같이 그리 심각하지 않은 형태의 빈혈도 있었지만.

[재생불량성빈혈이나 골수 이형성 증후군의 가능성도 있습니다.]

‘저주하냐? 그런 건 예후가 너무 나쁘잖아.’

[가능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죠. 부정하는 겁니까?]

‘아니, 그건 아냐.’

실제로 방금 바루다가 언급한 질환들은 갑자기, 그야말로 도적처럼 나타나는 편이었다.

때문에 단순히 혈액 검사하려고 병원에 왔다가 느닷없이 무균실로 직행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그저 몸이 피곤해서, 요새 좀 힘들어서 왔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되는 그런 병이란 얘기였다.

심지어 바루다가 언급하지 않은 질환 중에도 심각한 질환은 얼마든지 있었다.

‘급성 백혈병…… 같은 경우도 가능은 하지?’

[그렇죠. 모든 가능성은 열어 두는 게 좋겠습니다.]

‘이런 망할.’

해서 수혁은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고 환자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다른 생각을 하기 어려울 만큼 아름답게만 보였던 사람이 이제는 온전히 환자로만 보일 뿐이었다.

눈빛에서조차 느껴질 지경이었다.

당연히 사람 관찰하는 게 일이라 할 수 있는 왕자도 수혁의 변화를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냥 해 본 소리가 아닌 모양인데.’

그러자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지금껏 수혁에 대해 들어 온 말이 워낙에 많아서였다.

천재라는 둥, 괴물이라는 둥 수식하는 말은 다양해도 결국, 수혁을 포장하는 말은 딱 하나 뛰어난 의사라는 것 아니던가.

그 말은 곧 지금 수혁의 반응을 예삿일로 여겨선 안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지금 병원으로 가 보자는 말을 하는 건 좀 모양 빠지는데…….’

허나 왕자로서의 자존심이 두려움을 내비치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해서 수혁의 입에서 병원 가자는 말이 나오길 고대하며 짐짓 어두운 표정을 지은 채 뒤로 살짝 물러섰다.

“여기 잠깐 누워 보시겠어요? 배를 봐야 할 거 같습니다.”

“배요?”

“네. 비장 같은 곳이 커져 있을 수 있거든요?”

“아……. 네.”

그사이 수혁은 물흐르듯 진찰을 이어 나갔다.

[옳거니, 비장이 손가락 하나 정도 커져 있습니다.]

‘확실해? 내가 볼 때는 정상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는 거 같지 않은데.’

[데이터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수혁의 말대로 정상 범위에 가깝긴 하나, 크기가 커져 있긴 합니다.]

‘그럼……. 혈관 외 용혈 작용을 의심해 볼 수 있다는 건가?’

[사실 이 정도의 비장 종대는 다양한 질환에서 나타날 수 있지만, 지금까지 관찰해 온 바에 따르면 그것이 가장 합리적인 추론입니다.]

‘흠……. 내 생각에도 그렇긴 한데.’

결과, 수혁은 비장이 정상에서 조금 더 커져 있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있다면 역시나 비장이 일을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왜 비장이 커지겠는가.

물론 다양한 원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 수혁은 우선 바루다의 조언을 받아들여 지금껏 따라온 플로우만 생각하고 끝까지 가 보기로 결정한 참이었다.

‘혈관 외 용혈……. 비장에서 적혈구를 필요 이상 파괴한다는 건데, 원인 질환이 뭐가 있지?’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죠?]

‘당연히 아니지, 인마. 나랑 똑같은 걸 떠올리고 있는지 확인하는 거 아냐. 내가 그럴 짬이냐?’

[아닐 거라고 생각하긴 했습니다.]

비장은 쉽게 말하면 유통 기한이 지난 적혈구나 혈소판 같은 것을 제거하는 일을 하는 장기였다.

말이야 유통 기한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비장이 적혈구가 죽을 때가 됐는지 어땠는지 바코드 찍어서 알아보지는 않지 않겠는가.

해서 대개는 모양이 이상하면 때려 부수기 마련이었다.

따라서 선천적으로 적혈구 모양이 이상해지는 질환들, 즉 PK 신드롬이나 살라세미아에서 비장의 파괴작용으로 인한 빈혈이 흔히 동반되었다.

‘선천성 가능성은 좀 떨어지지, 아무래도?’

[그렇죠. 그랬다면 아마 검진에서 잡혔을 겁니다.]

전반적으로 의료 서비스의 질이 좋은 나라가 아니긴 했다.

하지만 빈부격차가 큰 만큼, 잘사는 사람들에 대한 서비스는 한국 못지않았다.

따라서 바루다의 추론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봐야 했다.

즉 선천성 질환들은 확인은 해 봐야겠지만, 일단 뒤로 빼놔도 된다는 뜻이었다.

“왕자님.”

그렇게 머릿속에서 대강의 정리를 마친 수혁은 드디어 알 나지르 왕자를 돌아보았다.

애인이 눕는 순간부터 내내 초조해하던 그는,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뭐 알아낸 거라도 있나?”

하지만 떨리는 목소리까지 완전히 컨트롤하진 못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야 속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의 앞에 있는 건 수혁이지 않은가.

바루다는 상대의 목소리 톤을 분석하는 데 있어서 이제는 정말이지 기가 막히는 실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긴장하고 있군요.]

‘화내는 건 아니고?’

[절대 아닙니다. 두려워하고 있어요.]

‘오케이, 다행이구만. 그럼 조금 강하게 나가?’

[그게 좋겠습니다. 뭐가 있긴 할 겁니다. 나쁜 질환일 가능성도 상당히 크고요.]

‘만약 그러면 어떻게 말하지?’

[그건 일단 그때 가서 생각하죠. 수혁이 임기응변에 능한 편 아닙니까?]

‘뭐, 그건 그렇지.’

덕분에 수혁은 대강 어떻게 말을 풀어 나갈 것인지 결정할 수 있었다.

“진찰해 보니……. 확실히 빈혈이 있으십니다. 수치까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경미한 수준은 아닙니다.”

“아……. 빈혈이…… 피가 부족하다는 건가?”

“쉽게 말하면 그렇습니다.”

원래 같았으면 한바탕 잘난 척을 했을 테지만,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수혁은 자제했다.

물론 아예 입을 다물기로 작정한 것은 아니었다.

‘잘난 척은 안 하고 겁은 줘도 되는 거겠지?’

[그럼요. 얼마든지요. 실제로 지금 의심되는 질환 중 위험한 질환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괜히 가볍게 얘기했다가 난리 나는 것보다는 처음부터 심각하게 가는 게 낫지.’

[네, 언제나 의학은 과한 것이 모자란 것보다 낫습니다.]

이어질 말이 오히려 핵심이라고 보면 되었다.

수혁은 그 말에 더욱 집중할 수 있도록 일부러 마른침을 삼켰다.

그사이 왕자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수혁을 재촉했다.

“빈혈이라는 거……. 그거 별거 아니지 않나?”

자, 빨리 괜찮다고 해! 하는 얼굴을 하면서였다.

아니라고 하면 화라도 낼 기세였는데, 안타깝게도 수혁은 그런 얼굴에 겁을 먹을 단계는 지난 지 한참이었다.

지금까지 왕자 정도는 아니더라도 높으신 보호자들 또는 환자들을 얼마나 많이 보아 왔던가.

오히려 지금 왕자의 질문은 그의 무지를 나타내는 도구가 되었을 뿐이었다.

덕분에 수혁은 아까보다도 더 당당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빈혈이라는 증상 자체에 대해서는 경하다, 중하다는 말을 쓰는 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빈혈의 정도에 따라 환자가 느끼는 증상이 각기 다르고, 또 발생 기간에 따라서도 다르긴 때문입니다.”

“음. 그럼?”

역시나 말이 길어지자 왕자는 완전히 수혁의 말을 따라오지는 못하겠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느 정도는 의도한 바도 있었기에 수혁은 굳이 재차 설명을 해 주진 않았다.

그저 하려고 했던 말을 이어 나갈 뿐이었다.

“다만 그 빈혈이 왜 나타났는지에 대해 확인하는 것이 중요할 뿐입니다. 원인 질환이 반드시 있을 거거든요.”

“원인 질환……? 어, 어떤 게 있지?”

“간단하게는 다이어트로 인한 철 결핍성 빈혈도 있습니다만…….”

수혁은 말을 하면서 환자를 돌아보았다.

군살 하나 없는 근육질의 몸이었다.

단기간에 안 먹는 다이어트를 한다고 만들 수 있는 몸이 아니란 얘기였다.

게다가 철 결핍성 빈혈은 단순히 재료가 부족해서 생기는 빈혈이기에 비장에서의 용혈 작용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따라서 수혁은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저을 수 있었다.

“환자분의 경우엔 해당 사항이 없을 거라 판단됩니다.”

“그럼…… 간단하지 않다는 얘기인가?”

“네. 진찰해 본 결과 환자의 좌측 상복부에 위치한 비장이라는 장기가 커져 있습니다.”

“비장이라…….”

왕자는 이제 뒤에 머물러 있는 대신 애인 곁에 있기로 작심한 모양이었다.

천천히 다가오는가 싶더니 어느새 애인을 일으켜 앉히고는 넘어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고 있었다.

진료 중임을 감안하고서라도 꽤 보기 좋은 광경이었다.

[사랑꾼이시네. 돈도 많은데 잘생기고 친절하기까지 하다니…….]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개소리라는 건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을 테니, 따로 비난은 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걸 비난이라고 하는 건데.’

[그런가요?]

‘어.’

[아무튼 간에 답이나 하시죠. 부러워하지 말고. 어차피 부러워해 봐야 수혁이 저렇게 되는 일은 없어요. 의미 없는 일에 시간 낭비하지 말고, 가능한 일에 매진합시다. 세계 최고의 의사!]

‘허.’

바루다는 수혁에게 있어서만큼은 세계 최고의 의사가 되는 것보다 알콩달콩한 연애가 더 어려울 거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상당히 기분이 나빴지만,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수혁이 생각하기에도 맞는 말 같아서였다.

마음이 안 좋아진 수혁은 서둘러 아까 하려던 말을 이었다.

여기서 더 끌었다가는 이상한 말을 지껄이게 될 거 같아서였다.

“비장은 이상이 발생한 적혈구를 파괴하는 역할을 하는데……. 그것이 커져 있다는 건 비장이 할 일이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드물게 단순 비장 기능항진으로 인해 쓸데없이 멀쩡한 적혈구도 파괴하면서 생기는 빈혈도 있지만, 그건 정말 드물고요……. 실제로 이상이 있는 적혈구가 많이 발생해서 파괴가 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이상이 있는 적혈구가…… 발생해?”

“예를 들면 재생불량성빈혈이나 골수 이형성 증후군 같은 것들이 생겼을 수 있죠.”

“음.”

모르는 사람이 들어도 뭔가 나빠 보이는 질환명 아닌가.

환자와 왕자 모두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수혁은 그게 절망으로 이어지기 전 타이밍을 기가 막히게 잡아서 손사래를 쳤다.

“물론 이건 한 가지 가능성일 뿐입니다. 자가면역질환에 의한 파괴도 있을 수 있고, 혹은 지금껏 모르고 있던 선천성 질환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우선 지금 당장 병원으로 가서 혈액 검사 및 기타 필요한 검사를 해 보는 게 좋겠습니다.”

“아.”

왕자는 반가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실 아까부터 병원에 가고 싶던 참 아닌가.

그 말을 딱 수혁이 해 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역시 병원에 가고 싶었구만. 불안해하고 있는 게 맞다니까요.]

‘그럴 수밖에 없지. 근데…… 이제는 좀 더 안심시켜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안심보다는 감동을 시켜 보죠.]

‘어떻게?’

[사기 치는 건 저보다 나으면서 내숭 떠시네요. 방금 생각했던 대로 하시죠.]

‘알았다…….’

수혁은 역시나 반박하기 어려운 바루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면 주치의는 제가 맡겠습니다. 가기 전까지라도……. 아니면 태화에 얘기해서 휴가를 좀 더 쓸 수도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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