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293화 (293/1,303)

293화 급성 빈혈? (2)

“아.”

수혁의 말에 왕자는 순수하게 감동하고 말았다.

세상에 주치의를 맡겠다고 먼저 말해 주는 것도 고마운데, 그 방식이 이렇게 정중할 줄이야.

‘휴가까지 쓰겠다고?’

거기에 더해 개인 휴가를 쓰겠다는 말까지 하고 있으니 이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여기서 어물쩍 넘어가는 것은 왕가의 체면에 맞지 않는 처사였다.

심지어 여기가 어디란 말인가.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왕가 중 하나 아니던가.

“이수혁 선생……. 제대로 치료가 된다면…… 내가 정말 제대로 보답하겠네.”

더욱이 알 나지르 왕자는 왕가의 수많은 왕자 중에서도 사람 잘 챙기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그 덕에 굵직한 일을 도맡아 추진할 수 있다는 말까지 듣고 있지 않은가.

[역시 수혁의 연기는 통하지 않는 법이 없군요.]

‘아니, 실제로 이 환자까지는 내가 봐야지.’

[저한테도 연기하는 건가요?]

‘아니, 인마. 내 손을 탔잖아, 이미. 너 이 환자 잘못되면 어떨 거 같냐?’

[천하의 바루다가 진료에 관여한 환자가 치료에 실패한다고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 어, 그렇네. 그렇네요?]

‘그래, 이왕 봤으면 최선을 다해야 해.’

이제는 수혁도 왕자 앞에서 얄팍한 수만 쓰고 있지는 않았다.

환자를 보는 순간부터 어느 정도 진중해졌던 눈은 이제 더 이상 진중해지기도 어려울 만큼이나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네, 왕자님. 그리고 환자분……. 차가 준비되는 대로 병원으로 가셔야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일이겠지만 너무 놀라진 마시고요.”

“아……. 네.”

“혹시 입원에 꼭 필요한 물품이 있으면 챙기시는 게 좋겠습니다. 빈혈에 대한 검사가 비단 혈액 검사만 있는 건 아니라서요.”

“그건 비서들이 할 일이야. 일단……. 이수혁 선생은 같이 가지. 아까 타고 왔던 차가 있을 거야.”

“아……. 네.”

“앞자리에 타야 할 거 같은데, 괜찮겠나?”

수혁은 왕자의 말에 저도 모르게 뒤쪽 그러니까 아까 한참 걸어왔던 복도를 돌아보았다.

워낙 길어서 보이는 건 없었지만, 롤스로이스 차량을 떠올리기엔 무리가 없었다.

“네? 아, 네. 당연히…… 괜찮습…… 아니, 좋습니다.”

애초에 수혁은 차도 없는 사람 아닌가.

누군가 태워 준다고 하면 땡큐였다.

그 차가 롤스로이스라면 트렁크 말고는 죄 감지덕지할 일이라 이 말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왕자에게는 수혁의 모습이 소탈하게만 느껴졌다.

‘사람이 됐구나.’

애초에 사람이 된 사람 같아서 보자고 하긴 했지만.

와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점점 그런 생각이 들었다.

환자를 보는 데 휴가를 쓰겠다고 하질 않나, 불편을 감수하겠다고 하질 않나.

‘이 사람은 정말 믿고 쓸 만하겠어.’

해서 왕자는 처음보다도 더 수혁에 대한 평가를 상향 조정했다.

“자, 그럼 가지. 병원에 연락해서 환자……. 내가 직접 간다고 해 줘.”

“네, 왕자님. 저희가 앞에서 에스코트하겠습니다.”

“그냥 빨리 갈 수 있도록만 해.”

“아, 네. 알겠습니다.”

하여간 왕자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침착함을 아예 잃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더욱 낮은 목소리가 되어 이것저것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지시를 받는 사람들, 그러니까 왕자에 익숙한 사람들은 그의 심기를 얼마간 파악할 수 있었다.

‘어지간히 걱정이 되시는 모양인데…….’

‘하긴 지금껏 만나 본 사람 중 제일 사랑하는 여인이라 공언한 적도 있으시니…….’

왕자가 허둥지둥 댄다고 한들 이상한 일은 아닐 거 같았다.

신분이고 나발이고 다 관계없이 결혼하고 싶어 하고 있지 않은가.

아마도 모든 결혼이 정략결혼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왕가의 습성상 그건 좀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왕자의 진심마저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해서 모든 조치는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부아앙.

차량이 출발하기도 전에 병원에 연락이 닿았다.

“지금 왕자님 오신다니까 직원들……. 로비로. 아니, 로비 말고…… 응급실로.”

“응급실? 다치셨답니까?”

“아니, 그건 아닌데……. 하여간 가용한 의료진 다 모이라고 해.”

“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병원은 병원대로 만반의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원래 오너 병원인 경우엔 오너가 온다고 하는 것만큼 긴장되는 일이 없지 않은가.

태화 의료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통령이 오는 것보다 회장 일가가 오는 것이 더 큰 일이었다.

뭐가 어찌 되었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 내는 사람이 갑이니까.

끼이익.

차량은 올 때와는 달리 정말이지 나는 듯이 달려 병원 응급실에 닿았다.

“괘, 괜찮으십니까!”

“왕자님, 다치신 건가요?”

그와 동시에 의료진들이 우르르 차량으로 몰려들었다.

그 바람에 앞에 있던 수혁은 잠시 문을 열지도 못하고 있었을 지경이었다.

김 비서가 뒤따라오는 차량에 탑승하느라 동행하지 못한 것도 이유이긴 했지만.

그보다는 역시 의료진들이 몸으로 차를 누르고 있는 것이 훨씬 더 큰 이유였다.

덜커덕.

물론 감히 왕자가 타고 있는 뒷좌석을 누르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나는 듯이 달려와 열어 젖히는 사람만이 있을 뿐이었다.

“모두 뒤로.”

왕자는 그런 이들을 향해 인상을 찌푸린 채 손을 내저었다.

이수혁이라는 친구는 나이가 젊음에도 불구하고 공손할지언정 비굴한 모습을 보이진 않았는데.

어찌 대학 교수라는 사람들이 이럴까.

‘하긴 그런 게……. 쉬운 일이 아니지.’

왕자라는 이질적인 존재 앞에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일 따름이었다.

심지어 김다현 사장이라는 사람조차 일말의 두려움을 띄고 있었으니까.

그런 면에서 수혁은 정말이지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럴 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겠지.’

이런저런 연유로 계속 수혁에 대한 평가만 올라가고 있었다.

“내 애인이…… 빈혈이 있다는데, 검사를 원해서 왔네. 일단은 너무 호들갑 떨지는 말게.”

왕자는 그런 생각을 애써 뒤로 하고 입을 열었다.

다행히 그가 내뱉은 말에 의료진들은 성의를 다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듣고 보니 역시나 호들갑 떨 일은 아니란 생각이 들기도 해서 모두들 우르르 뒤로 물러났다.

‘에이, 빈혈에 이렇게 온 거야?’

심지어 이런 반감이 들 지경이었다.

뭐 이 병원이 상당히 가격이 비싼 편이니만큼 대한민국에 있는 대학 병원들처럼 도떼기시장은 아닐지라도 병원은 병원이지 않은가.

사소한 일로 근무 시간에 이리저리 불려 다닐 만큼 한가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근데 응급실까지 뛰어왔다니, 세상에 빈혈이라고?

화가 안 나면 이상했다.

덜커덕.

그런 생각이 모두의 마음속에 번질 때쯤, 수혁이 문을 열고 내렸다.

롤스로이스라는 게 워낙에 큰 차인 데다가 원래 남들이 좀 도와줘야 타기가 수월한 차이니만큼 다리가 불편한 수혁에게는 내리는 것조차 도전 과제였다.

“어, 내 손 잡게.”

“네? 불경한 거 아닌가요?”

“왕가의 법도가 그렇게 엄하지는 않아.”

“아, 네. 감사합니다.”

보다 못한 왕자가 도와야 했을 지경이었다.

물론 다른 이들도 그렇게 받아들이진 않았다.

‘이수혁……?’

‘저 사람이 저기서 왜 나와?’

우선 수혁의 등장 자체가 충격이었다.

다른 태화 의료원 사람들은 이미 관광 떠난 지 오래 아니던가.

수혁이 좀 늦게 남아 환자들을 보고 있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고, 그 과정이 상당히 인상 깊었다는 얘기도 듣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왕자의 차에서 나타나리란 기대를 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왕자랑…… 만난 거야?’

‘둘이 약속을 잡았나?’

알 나지르 왕자는 왕자치고는 꽤 소탈한 편이었지만, 뭐가 되었건 왕자는 왕자였다.

본인이 만나고자 하는 사람만 만나는 사람이다, 이 말이었다.

그 말은 곧 왕자가 수혁을 만나길 원했다는 뜻이었다.

‘손을 잡아 줘?’

‘미친 건가?’

게다가 손까지 잡아 에스코트를 해 주다니.

이건 그야말로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다들 조용히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을 무렵, 수혁이 입을 열었다.

“모두들……. 갑작스럽겠지만 제 말을 좀 들어 주십시오.”

아마 그냥 수혁 혼자 띨룽 나타나서 이 말을 했다면, 내과 발표 자리에 있었거나 하여간 수혁이 환자 보는 걸 도와준 경험이 있는 사람 말고는 아무도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어, 네.”

“말씀하시죠.”

왕자와 함께 나타난 수혁은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왕자의 후광을 마음껏 빌려다 쓸 수 있었다.

모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이 말이었다.

“지금…… 이…….”

“파티마.”

“네, 파티마 환자분께서는 방금 왕자님께서 말씀해 주신 대로 빈혈이 있습니다. 제가 진찰한 소견에 따르면 급성 빈혈이 의심되며, 실제 빈혈로 인한 어지럼증 및 저혈압 등의 증상이 있는 상황입니다.”

수혁은 그런 모두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애초에 노티라고 하면 또 이수혁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기깔 나게 잘하는 수혁 아니던가.

당연하다는 듯 모두의 관심을 빨아들일 수 있었다.

“혈색소 수치는 대략 9 이하로 생각이 됩니다만, 이것은 검사를 해 봐야 알 수 있을 겁니다. 현재 가장 의심스러운 것은…… 비장 종대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혈관 외 용혈 작용으로 인한 빈혈입니다만 다양한 접근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제가 지금부터 하는 말을 잘 듣고 처방에 따라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정중하면서도 당당한 말투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당당하다기보다는 건방지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 터였다.

처방에 따라 달라니, 대체 무슨 권한으로? 뭐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단 말인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았다.

쩐주를 옆에 두고 있는데 누가 감히 토를 단단 말인가.

게다가 그 쩐주, 그러니까 왕자는 수혁을 아주 흐뭇해하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라도 고개를 굽실거릴 수밖에 없었다.

“네, 그럼…… 어떻게 할까요?”

“우선 혈액 검사부터 해 주시죠. 빈혈 감별 진단에서 가장 첫단추가 되는 것은 MCV이니, 이를 산출하기 위해 적혈구 수와 헤마토크릿을 포함해야 합니다. 당연히 혈중 ferritin 농도도 봐야 할 것이고……. 말초 혈액 도말 검사도 필요합니다. 급성 빈혈에 인한 증상을 보이고 있어 가능성은 떨어지나 선천성 질환일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또 MDS 즉…… 골수이형성 증후군(Myelodysplastic syndrome)에서도 혈구 이상이 관찰되니 반드시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음, 일단 안으로 들어가면서 더 말씀드리죠.”

“아……. 네.”

게다가 수혁의 지시는 정확함과 동시에 모두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얼결에 모여 있던 사람들 전원이 강의 듣는 기분이 들었을 지경이었다.

해서 수혁이 안으로 들어서면서 따라오라는 말을 했을 땐, 이미 왕자의 후광은 잊은 지 오래였다.

그저 수혁 자체의 힘으로 이끌 수 있었다.

“또 용혈성 빈혈에서 아주 주요한 원인 중 자가면역성 용혈설 빈혈(Autoimmune hemolytic anemia, AIHA)가 있으니, 이를 감별하기 위해 coomb’s test를 해야겠습니다. 자 여기까지 어려운 분?”

“어…….”

“없으면 바로 진행하죠. 다음은 검사 결과를 보면서 지시를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아, 혈압 포함해서 바이털은 바로 재 주시고요.”

“아,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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