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295화 (295/1,303)

295화 급성 빈혈? (4)

뭔지 모르겠다.

딱 이 생각이 수혁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평소라면 나약하네 어쩌네 했을 바루다도 우선은 입을 다물었다.

[음.]

바루다도 솔직히 아직 모르겠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둘 다 절망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좀 더 봐야겠네.’

[네, 아직은 뭐라 하기 힘들군요.]

다만 시간을 두고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시건방진 생각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둘에게는 이럴 만한 자격이 충분히 있었다.

이미 이렇게 해서 살린 경험이 많이 있지 않던가.

‘그럼 일단은 증상 조절부터 할까.’

[네, 그게 좋겠습니다.]

덕분에 수혁은 자신에게 노티 해 준 의사에 비하면 거의 순식간이라 할 수 있는 시간 만에 온전히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진짜 원래 모습이 아니라, 왕자 앞에서 연기하던 그 모습이었다.

“일단 나머지 검사 결과를 좀 기다리면서……. 환자 증상 조절하겠습니다. 혈청 철(Serum ferritin) 수치 어떻죠?”

“아……. 약간 상승해 있습니다.”

“약간이라는 게 얼마나?”

“여기…….”

“아.”

수혁은 왜 이 사람이 약간이라는, 정말이지 애매한 단어를 썼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기관에 따라 정상 수치를 조금은 다르게 잡기도 하는데, 지금 이 환자의 수치는 딱 그 경계에 있었다.

어떤 기관에서는 빨갛게, 즉 올라갔다고 표시될 수도 있겠지만 또 어떤 기관에서는 정상이라고 표시될 수도 있는 수치였다.

[비장에서 미친 듯이 부수는 건 아닌 모양이네요.]

‘조심스럽게 수혈을 해 볼까? 아직 원인을 몰라서 좀 그렇긴 한데…….’

[천천히 넣어 보죠. 어차피 수액도 들어가니까……. 적혈구가 파괴된다고 해도, 그 부산물의 농도가 급격히 올라갈 일은 없을 겁니다.]

그 말은 곧 부산물에 의해 신장이 망가질 가능성은 거의 없을 거라는 뜻이었다.

특히 수혁이 지키고 있는 한, 가능성은 아예 없다고 말해도 좋았다.

이제 수혁은 바루다의 도움을 받으면 수액이 얼마나 들어가고 나오는지, 또 그로 인해 예상되는 혈액 내의 여러 물질들의 수치 변화를 대강이나마 예상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얘기를 누구에게라도 하면, 그 대상이 이미 수혁을 인정하는 수준이 아니라 경외하는 수준이 된 사람일지라 해도 말도 안 된다 할 만큼이나 엄청난 능력이었다.

“자, 수혈하겠습니다. 환자 rh-A형이군요. 반응 검사만 하시고……. 천천히 주겠습니다. 그리고 수액…… 지금보다 10가트만 늘리죠.”

“아……. 네.”

“그리고 검사 결과 나오면 뭐가 됐든 알려 주세요. 특히…… 말초혈액 도말검사는 바로 알려 주세요. 굳이 판독까지 안 나와도 됩니다. 그냥 슬라이드만 보여 주셔도 돼요.”

“오.”

슬라이드만 보여 달라니.

아마 현대 의학에 관해 조금이라도 익숙한 사람이 듣는다면 짜증이라도 낼 법한 말이었다.

광오하지 않은가?

노상 그것만 보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하나의 전문과로 인정받아 4년간 수련받아야 겨우 전문의를 획득할 수 있는 분야의 일인데.

그걸 아직 내과 전문의 하나도 못 딴 놈이 할 수 있다고?

‘가능할 수도 있어……. 이 사람은 가능할 수도 있다.’

대부분 일말의 불만을 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왕자에게 눈도장이나 찍어 볼 요량으로 왔다가 어느 틈엔가 수혁의 명을 따르게 된 알 막툼 교수였다.

사실 내분비 내과 교수는 빈혈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사람은 아니기에 지금은 그저 보조만 하고 있었다.

이걸 하느니 그냥 병동 가는 게 훨씬 생산적일 터였다.

‘끝까지…… 보고 싶다. 이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고 싶어.’

그런데 그냥 묵묵히 보조를 하고 있었다.

알 막툼은 이미 수혁의 위업을 옆에서 생생히 보고 느낀 바가 있지 않은가.

그게 비단 내분비내과에서만 통용되는 건 아니라는 걸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어……. 도말 검사 슬라이드는 완성됐다고 합니다. 근데 아직 보지는 못했다고 하는데.”

그때 의료진 중 하나가 전화를 받고는 수혁에게 전달해 주었다.

이미 수혈 속도와 수액 속도를 기가 막히게 맞추어서 설령 적혈구가 여기서 두 배의 속도로 파괴된다고 해도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을 거라는 걸 확신했을 때 즈음이었다.

물론 그 확신은 아직 수혁 혼자만의 확신이었지만.

수혁은 이제 이 환자의 앞으로 2시간 동안 있을 변화에 대해서만큼은 바루다 외에 다른 누군가의 동의가 별로 필요하지 않았다.

계산이 끝났다, 이 말이었다.

“아, 제가 가서 보죠. 그동안은…… 그냥 지금 하는 처치를 유지해 주세요. 그리고 지금 사람이 너무 많거든요? 최소 인원 제외하면 돌아가셔도 됩니다.”

“아…….”

하지만 수혁의 말에도 모두들 다리가 땅에 박힌 사람인 것처럼 움직이질 못했다.

동시에 어딘가를 바라보았는데, 어찌나 다들 그러는지 말을 꺼낸 수혁도 저도 모르게 그쪽을 바라보았을 지경이었다.

‘어……. 이 사람들은 의학적인 소견보다 더 중요한 게 있구나.’

[태화에 이유원 회장 와서 서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거기도 똑같지.]

‘하긴.’

왕자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수혁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처럼 고용인, 피고용인의 처지는 아니긴 하지만.

아무튼 간에 잘 보여서 나쁠 거 없는 사람 아니겠는가.

게다가 수혁은 돈 드는 것도 아닌 비위 맞추는 행위를 하는 데 있어서 전혀 망설이는 게 없는 인간이었다.

“아, 생각해 보니 왕자님 허락이 필요하겠네요. 왕자님, 제 판단에 이제 이 만큼의 사람은 필요치 않습니다. 환자분 증상 조절이나 추후 있을 검사에는……. 두셋이면 충분합니다. 괜찮을까요?”

“이수혁 선생 판단이 그렇다면…….”

“그럼 해산시킬까요?

“지금은 말고. 어디 가야 된다고 한 거 아닌가?”

“네, 그렇습니다.”

왕자는 여전히 아니, 아까보다도 더 당당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수혁을 마주했다.

이런 태도를 보일 수 있던 사람이 몇이나 됐을까?

평생을 돌이켜 보더라도 많지 않았고, 실제 성인이 되어 힘을 행사할 수 있게 된 뒤로는 거의 없다고 해도 좋았다.

‘실력이 있으니…… 이럴 수 있는 거지.’

그럼에도 건방지다는 생각보다는 대단하다는 느낌만 들었다.

병원에 와서 보여 준 모습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체면만 아니었다면 왕자도 다른 의료진들처럼 환호했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놈이 없는 현장은 더더욱 불안하게만 느껴졌다.

“그럼 이수혁 선생이 다녀올 때까지만 여기 있지. 다시 오면, 그때는 해산해도 좋아.”

“아……. 네. 알겠습니다.”

그 말에 바루다는 껄껄 웃었다.

남의 감정에 공감은 하지 못하는 주제에 눈치 하나는 비상해진 놈 아니던가.

한눈에 지금 왕자의 심리를 읽어 낼 수 있었다.

[아까보다 더욱 수혁에게 의지하는군요. 이게 김다현 사장 귀에 들어가면 수혁에게 더 주목하게 될 겁니다.]

‘나도 느꼈어. 착각 아니구나?’

[네, 확실하다고 판단합니다.]

‘좋아. 그럼 후딱 다녀와 볼까.’

[네. 그래도 좋습니다. 현재 이 상태만 유지한다면 적어도 저 혈액 한 팩이 들어갈 때까지는 환자 안정적일 겁니다.]

‘오케이.’

해서 수혁은 의기양양한 표정과 함께, 지팡이를 짚으며 응급실을 떠날 수 있었다.

진단검사의학과가 어디에 있는지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어디 도착하면 일단 구조부터 욱여넣는 게 바루다의 특기 아니던가.

싹 다 데이터화가 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심지어 지름길로 갈 자신도 있었다.

“아, 이수혁 선생님. 제가 같이 가겠습니다.”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내딛으려니, 누군가 뒤에서 따라붙었다.

누구지 하고 뒤를 돌아보니 아는 얼굴이었다.

“알 막툼 교수님?”

“네, 알입니다.”

“여기 계셨어요? 응급실에?”

“그냥 인사차 내려왔다가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습니다. 뭐 시간이 있으니 안내하겠습니다.”

“아……. 네, 그러시죠.”

어차피 무시하고 달릴 수도 없지 않은가.

작정하고 속도를 내 봐야 일반인 경보보다 느릴 게 뻔한데.

게다가 알 막툼은 그간 같이 지내 본 바에 따르면 썩 괜찮은 사람이었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나이가 어리고, 직급도 아래면 꺼려 할 법도 한데.

이 사람은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수혁을 존중하고 있었다.

“환자들은 역시 다 괜찮군요.”

알은 그런 수혁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면서 우선 환자 얘기로 대화를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영 이상한 일이겠지만, 의사들 사이에서는 환자 얘기가 거의 날씨 얘기같이 일상적인 것이라고 보면 되었다.

오히려 날씨 얘기보다 더 대화를 주고받기 좋았다.

때때로 의사들은 바깥 날씨를 모르는 것을 넘어 계절을 모르고 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네, 그건 그렇고……. 어떻게 된 겁니까?”

그 얘기를 잠시 나누던 알 막툼은 눈을 빛내며 물어 왔다.

말투부터 달라졌기에 수혁은 굳이 바루다의 도움이 없이도 이게 본론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뭐가 말입니까?”

물론 안다고 해서 덥석 주제를 물어 주진 않았다.

대화의 주도권은 그런 식으로 해서는 잡을 수 없으니까.

“그…… 왕자님이랑 오셨잖습니까? 뭐 뵙자고 한 건 들었는데,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아……. 그거요.”

물론 수혁은 알 막툼하고 대화하면서 주도권 잡는 게 아무것도 아니란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연습이랄까?

해서 숨기는 거 없이 다 말해 주었다.

“아……. 정말 대단하군요!”

약간의 포장을 하긴 했기에 대화가 마무리될 때쯤에 이르러서는 알 막툼의 얼굴에 일종의 경외마저 떠올랐다.

거의 뭐 이슬람 선지자 중 하나를 맞이했을 때나 지을 법한 그런 얼굴이라고 할까?

알 막툼에게는 다행히 그게 어떤 종교적인 신앙으로 번지기 전에, 진단검사의학과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 왔네요.”

“그사이에 판독이 됐을까요?”

“아뇨……. 그렇진 않을 겁니다. 뭐 VIP 중의 VIP라 매달리긴 할 텐데, 오히려 그래서 더 느릴 거예요.”

“아.”

VIP 신드롬이라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루틴에서 벗어나 더 열심히 하려다 보면 사고 치기 일쑤인 법이었다.

아쉽지만 태화도 VIP가 종종 오는 병원이기에 수혁은 즉각 알아먹을 수 있었다.

씁쓸한 얼굴로 안으로 들어서니, 예상외의 환대가 이어졌다.

“이수혁 선생님? 말씀 들었습니다. 슬라이드는 안쪽에 있습니다.”

왕자가 직접 전화를 했건, 옆에 있는 사람이 했건.

수혁이 지금 왕자와 함께 왔으면 둘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걸 다들 알게 되었다 이 말이었다.

[이게 권력인가.]

수혁은 기계답지 않은 바루다의 말에 미소 지으며 안내에 따랐다.

시설 하나는 끝내주는 병원답게 이쪽도 만만치 않았다.

딱 방에 들어가자마자 화면에 뜬 슬라이드 사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수혁과 바루다는 한 가지 진단명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것만 보면 정상이네요.]

‘그렇네. 이런 시발.’

말초혈액 도말검사는 어떻게 봐도 정상이었다.

구상, 겸상, 분열 적혈구 모두 보이지 않았고, 유전적 이상을 나타내는 소견도 없었다.

내심 희망을 품고 있던 터라, 수혁의 얼굴에 약간의 먹구름이 내려앉았다.

따르릉.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수혁의 전화기가 울렸다.

번호를 보니 모르는 번혼데, 누가 걸었는지는 자명했다.

왕자 본인이거나, 그의 비서일 것이 뻔했다.

‘뭐라고 해?’

[모른다고 하면 안 되겠죠?]

‘미쳤냐?’

[몰라요, 알아서 해요, 이런 건 수혁 전문이잖아.]

‘와, 이 새끼?’

[빨리 받기나 하세요. 잔뜩 열 받게 하고 사기 치는 것보다는 기분 좋을 때 사기 치는 게 쉽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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