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화 급성 빈혈? (5)
“네, 이수혁입니다.”
마음을 정한 수혁은 일단 전화를 받았다.
바루다의 말대로 괜히 뭉그적거렸다가 기분이 나빠지면, 무슨 말을 해도 더 나쁘게 받아들일 게 뻔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생각해 보니 여기서 일단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하여간 아주 끔찍한 병의 단서는 없다는 뜻이니까.
“네, 선생님. 왕자님 바꿔 드리겠습니다.”
“네.”
수혁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차분히 알 나지르 왕자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알 나지르는 전화를 받자마자 헛기침을 한번 해 대고는 질문을 시작했다.
“좀 어떤가? 아직…… 모르나?”
보아하니 주변에서 이제 막 도착했을 거란 얘기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왕자는 조금이나마 민망해하고 있었다.
잘된 일이었다.
같은 말이라도 분위기에 따라 듣는 사람에게 전혀 다르게 전달되어질 수 있는 법이니까.
“아뇨, 방금 슬라이드 리뷰 끝냈습니다.”
“오, 지금 막 도착했을 거라고 들었는데……. 그렇게 빨리 끝나나?”
“네, 오래 걸릴 이유가 많이 없는 슬라이드 소견이었습니다.”
“아.”
왕자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이게 과연 좋은 일인지 아닌지 판단이 서지 않아서였다.
그렇다고 해서 과도하게 긴장하거나 하진 않았다.
원래 전문가들과의 대화는 이렇지 않던가.
암만 돈 대 주는 입장이라고 해도, 그들 말을 싹 알아듣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조금 기다리면 알아서 쉬운 말로 풀어 준다는 것 또한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우선 말초 혈액 도말 검사는 말초 혈액에 있는 혈구 모양을 살피는 검사입니다.”
알 나지르 왕자의 예상대로 수혁은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여기서 이상이 보이게 되면……. 혈구를 만드는 과정, 즉 조혈에 이상이 있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골수검사를 필수적으로 진행해야 합니다. 조혈은 골수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죠. 아, 골수란 뼈 안에 있는 조직을 의미합니다.”
“으음…….”
왕자는 의료진은 아니었지만.
어찌 되었건 병원에 천억 단위의 돈을 태우고 있는 사람 아닌가.
골수가 뭔지 정확히는 몰라도 들어 본 기억은 있었다.
별로 좋지 않은 뉘앙스였다는 것 또한 똑똑히 기억했다.
[걱정이 많아졌군요.]
‘그럴 필요는 없지.’
동시에 바루다는 왕자의 짤막한 대답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불안을 읽어 내었다.
수혁은 왕자와 환자와 쓸데없이 고통받지 않을 수 있도록 서둘러 말을 이어 나갔다.
“다행히 말초 혈액에서는 이상한 모양의 혈구가 관찰되지는 않습니다. 상당한 종류의 병을 배제할 수 있었습니다.”
“아?”
“말초 혈액 도말 검사는 정상입니다, 왕자님.”
“아, 잘됐구만. 잘됐어.”
확실히 앞에 좀 겁을 주고 괜찮다고 하니 반응이 썩 좋았다.
왕자는 그 후로도 한참을 잘됐다고 하면서 환자와 기쁨을 나누다가 입을 열었다.
떠들다 보니 애초에 이 검사를 했던 이유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 그럼……. 진단명은 뭐지?”
수혁은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낙담한 얼굴은 아니었다.
[의학적으로 원래 제대로 된 진단명에 다다르려면 수많은 진단명을 배제해야 하는 법입니다. 지금 이 진단 과정에서 어떠한 의학적 잘못도 찾을 수 없습니다. 상대가 왕자라는 것만 빼면 당당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수혁에게 배워서 그런가 합리화의 달인이 되어 버린 바루다가 끊임없이 힘을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아예 거짓부렁도 아니지 않은가.
솔직히 이 자리에 수혁이 아닌 다른 의사가 왔다면 이렇게 빨리 진행하기도 어려웠을 터였다.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만, 가능했던 수많은 진단명이 배제되고 있습니다. 몇 가지 검사를 더 해 보고, 지금 나간 검사 결과를 기다리다 보면 진단이 가능할 거라고 봅니다.”
요약하자면 모른다는 뜻이었다.
왕자는 수혁의 혀가 쓸데없이 길어졌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굳이 그걸 지적하고 싶은 생각이 들진 않았다.
뭐가 되었건 확실히 아까보다 환자의 상태가 좋아져 있지 않은가.
눈치채지 못했을 때는 그냥 좀 피곤한가 싶었는데, 치료를 받고 호전되는 것을 보니 문제가 있었던 것은 확실했다.
‘이수혁 선생이 아니었다면 그러한 것도 몰랐겠지?’
늘 젊고 건강하다고만 여겼으니 더더욱 그랬을 터였다.
그 말은 곧 단순히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만로도 은혜를 입었다 할 수 있단 말이었다.
“알았네. 그럼 돌아오지.”
하지만 왕자는 그러한 속내 또한 드러내지 않았다.
너무 인색한 거 아니냔 말은 필요 없었다.
애초에 왕자는 치료가 되었을 때 은혜를 갚겠노라 하지 않았던가.
모름지기 왕가의 자식이라면 뱉은 말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하는 법이었다.
기분에 좌우되어선 안 된다고 배운 바 있었다.
‘뭐, 일단 넘어갔네.’
[근데…… 대체 뭘까요? 사실 이만하면…… 실마리가 보여야 하는데.]
수혁 또한 칭찬이 없었다고 아쉬워하진 않았다.
애초에 거기에 집중하기엔 다른 문제에 머리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찌나 수혁의 표정이 심각해졌는지, 알 막툼 교수는 아까부터 하고 싶었던 말도 하지 못했을 지경이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결론을 빨리 냈지?’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이상한 세포가 없어 보이긴 했다.
뿐만 아니라 진단 검사 의학과 교수들이나 다른 의사들도 수혁과 비슷한 결론에 다다르고 있었다.
말하자면 아주 어려운 판단은 아니었다는 건데.
그럼에도 이 가공할 속도와 자기 판단에 대한 신뢰는 대단한 것이었다.
‘진짜 보통 사람은 아냐…….’
해서 일종의 경외를 담아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응급실로 향하기 시작했다.
수혁이 먼저 입을 열거나 대화를 시작하자고 하기 전까지는 다물고 있을 요량이었다.
알 막툼으로서는 감히 측량할 수 없는 의술을 갖고 있는 수혁이지 않은가.
그런 수혁이 고민에 빠졌다는 건 그만큼 이 케이스가 어렵다는 것을 의미했다.
보탬이 된다면 모를까 방해가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일단 정리해 볼까.’
덕분에 수혁은 침묵 속에 하고자 했던 일들을 차분히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우선 환자는 혈색소 수치가 8.3 이었고, 이로 인해 혈압이 낮았지? 기저 심장박동 수도 높았고. 그 말은 곧 급성 빈혈이라는 우리 진단이 틀리진 않았다는 거야, 그렇지?’
[네, 그렇습니다. 최근에 발생한 빈혈임은 확실합니다.]
‘MCV는 95. 약간 높지만, 뭐가 되었건 간에 정상이야.’
[네. 거기에 망상 적혈구는 증가되어 있었습니다.]
망상 적혈구는 다시 말하지만 미성숙 적혈구를 뜻하는 말이었다.
이게 증가되어 있다는 것은 다양한 것을 의미하는데, 주로는 뭐가 되었건 적혈구 생산이 늘어났다는 것만큼은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만 했다.
여기에 이제 말초 혈액 도말 검사도 정상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적어도 조혈 과정의 문제는 잠시 치워 두어도 될 터였다.
수혁이나 바루다나 굳이 그런 걸 언급하진 않았다.
이제 서로 상대가 이런 것쯤은 다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비정상적으로 적혈구가 파괴되고 있다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야겠는데…….’
[하지만 Coomb’s test에서는 음성이 나왔습니다. 자가 면역 질환일 가능성은 크게 떨어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파괴가 안 되는 건 아니지……. 사실 Coomb‘s test에서 양성이 나올 때 자가면역용혈빈혈이라는 건 온낭성(Warm type)을 주로 지칭하는 말이잖아. 저온성(Cold type)도 생각은 해야 해.’
[저온……. 오?]
‘저온성도 뭐 당연히 양성을 보이겠지만, 음성이 되는 경우도 많아. 특히 날씨가 두바이 같으면……. 더더욱 그럴 수 있지. 저온으로 내려갈 기회가 조금은 적을 테니까, 경미하게 나타났다면 항체가 있어도 Coomb‘s test에서 양성으로 나올 만큼의 항체는 없었을 수 있을 거 아냐.’
[이야.]
바루다는 짤막한 말로 수혁에 대한 칭찬을 대신했다.
이곳이 아무래도 두바이고 또 더운 거로 유명한 곳 아니던가.
그렇다 보니 저온성은 아예 배제해 두고 있었더랬다.
하지만 수혁은 거기에 대고 얼마 전 참석했던 응급 질환 세션에서 아랍에미레이트 즉 이 근처에서 일하는 의사에게 들었던 강연을 떠올렸다.
‘기억나지? 그 사람이 열성 질환에 대해 강의했던 거.’
[기억하죠. 나름 기대 많았던 세션 아닙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열사의 땅에서 일하는 의사가 말하는 열성 질환이라니.
우리나라에서는 비교적 겪어 보기 어려운 질환들을 많이 겪어 보지 않았겠는가?
당시 태화 의료원 의료진들은 당연히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응급 의학과 세션임에도 불구하고 내과, 가정의학과 등 열성 질환을 볼 만한 과들 의료진들도 죄 몰려들었더랬다.
‘의외로…… 진짜 교과서적인 강의였지.’
[이미 다 알고 있던 거였죠. 아니지, 솔직히 수혁이 더 잘 알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뜻밖에 강의는 무척 원론적이었다.
정말이지 특별한 케이스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다.
참다 못한 수혁은 강의가 끝나자마자 가서 물었다.
혹시 아랍 에미레이트에 열성 질환이 적냐고.
그랬더니만 돌아온 답이 가관이었다.
[나는 몰라요. 제가 주로 보는 환자들은……. 미국에 있는 환자들보다 더 시원한 곳에 살아요.]
처음엔 이게 뭔 얘기인가 싶었다.
의사가 미국인이니, 혹 미국에 있을 때 엄청 더운 지방에 살았던다는 별로 재밌지 않은 농담인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자초지종을 들어 보니 이러했다.
애초에 미국인 의사를 불러다 일 시킬 병원이라면 엄청나게 단가가 비싼 병원 아니겠는가.
지금 수혁이 거닐고 있는 병원만 해도 그랬다.
이런 병원에 다닐 수 있는 현지인들은 바깥의 더위를 실감하지 못하는 사람뿐이었다.
에어컨이 빵빵하다 못해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인 곳에 살고, 그런 차를 타고, 또 그런 곳에서 쇼핑을 하거나 밥을 먹었다.
‘가서 확인해 보자고.’
[네, 그럴 만한 가치가 있겠습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수혁은 역시나 가능성이 크지는 않으나, 작은 희망은 걸어 볼 만하단 느낌이 들었다.
해서 서둘러 환자에게로 향했다.
물론 정말 작은 희망을 품고서였다.
저온이라는 게 그냥 서늘한 온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0에서 4도…….’
정말로 낮은 온도를 의미했다.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에어컨을 이렇게 틀어놓을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에어컨이 그런 온도까지 내려가지도 않을 터였다.
엔지니어들도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지 않은가.
‘이게 아니면 뭘 생각해야 할까?’
[적혈구가 정상보다 많이 파괴되는 질환 중에서 말이죠?]
‘응. 당연하지. 그럼 어디서 찾으려고. 이미 배제한 거 소생시켜?’
[말을 되게 싸가지 없게 하시네.]
‘내가 너한테 그런 말을 들을 정도는…….’
[아무튼, 음……. 분석해 보겠습니다. 다만 지금은 몸을 계속 움직이고 있어서 속도는 느립니다. 일단 저온이 맡기를 기도하고 계시죠. 암만 봐도 가능성이 아주 커 보이지는 않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