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297화 (297/1,303)

297화 급성 빈혈? (6)

수혁은 바루다의 말을 아주 잘 들었다.

무슨 말인 고 하면, 제발 저온성 자가면역용혈빈혈이 맞기를 빌고 또 빌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희망은 급속히 잦아들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완연한 실내였으나, 엘리베이터는 창이 있어 밖이 훤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태양이 작열하네, 진짜.’

[몇 도일까요? 40도?]

‘40도……. 넘을 수도 있지.’

여름에 35도만 넘어가면 진짜 죽을 거 같은 경험, 다들 해 보지 않았는가.

그보다 더한 경험을 이곳 두바이에서는 일상적으로 겪을 수 있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현지인들조차 뙤약볕이 내려쬐는 한낮에는 도보 이동을 피할 지경이었다.

어어 하다가 갈 수 있기 때문인데, 수혁은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지금 막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 이수혁 선생님. 지금 내리셔야 됩니다.”

아연한 기분에 입을 벌리고 있으려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알 막툼이 말을 걸어왔다.

“엇.”

그 말에 눈을 떠 보니 어느새 1층이었다.

사실 그런 생각을 할 필요도 딱히 없기는 했다.

진단 검사 의학과라는 곳이 어디 뭐 20층에 있고 이런 게 아니었으니까.

불과 3층에서 1층으로 오는 사이에 이런 느낌을 받았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오시죠.”

“아, 네. 감사합니다. 아니, 죄송합니다.”

“아뇨. 환자 생각에 머리가 복잡하신 모양입니다.”

“네, 좀……. 어렵네요.”

“확실히……. 제가 생각해도 그렇네요. 아직까지는 뭘 의심해야 하는지조차 갈피를 잡기 어렵습니다.”

수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대는 알 막툼을 보면서 딱히 한심하다거나 하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애초에 내분비내과 교수 아닌가.

원래 한 곳만 들들 파다 보면 시야가 좁아지게 마련이었다.

이현종은 그렇지 않던데와 같은 말은 하등 필요 없었다.

그 인간은 그냥 천재니까.

‘조태진 교수님이 있었으면 좀 달랐을까?’

[글쎄요. 조태진 교수가 혈액 질환을 보긴 하지만……. 주로는 역시 종양 쪽 아닙니까? 저는 확신이 서진 않는군요.]

‘나중에 이거 정리해서 물어봐야겠다.’

[이제 교수를 시험할 생각까지 하는군요.]

‘시험이라니. 어떻게 유추하나 보고 배울 생각이지.’

[음.]

바루다가 보기에 그렇게 순수한 의도는 없어 보였으나.

굳이 떠들어 대진 않았다.

이미 수혁의 마음은 충분히 어지러워서, 바루다가 나서지 않아도 될 거 같아서였다.

“음, 이수혁 선생.”

“아, 네. 왕자님.”

“그럼…… 이제 더 기다리는 건가?”

속으로 갈등하는 동안에도 발은 쉬지 않고 움직였기 때문에 어느새 왕자 앞에 설 수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왕자는 이제 더 이상 말초 혈액 도말 검사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 따위에 즐거워하지 않았다.

그저 아직도 아무 진단이 내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초조해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보면 철없는 생각이었다.

세상에 병원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진단이 툭툭 튀어나온단 말인가.

만약에 현대의학이 벌써 거기까지 발전했다면, 불명열이라는 진단명은 진즉에 사라지고 없을 터였다.

애초에 불명열이라는 진단명 자체가 원인 모를 열이 3주 이상 지속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하니까.

[그런 말을 왕자 앞에서 할 생각은 아니죠?]

그에 비하면 지금 환자에 대한 진단은 정말이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셈이었다.

물론 그따위 잡소리를 감히 왕자 앞에서 늘어놓을 수는 없었다.

수혁은 전문가로서의 당당함을 잃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그게 갑을 관계도 파악하지 못하고 까분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았다.

‘미쳤냐.’

해서 수혁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바루다의 의심을 무시한 채 왕자를 돌아보았다.

당연히 왕자를 볼 때는 표정을 싹 갈아엎은 후였다.

더없이 진중한 얼굴이 되었다, 이 말이었다.

“왕자님.”

“음.”

“오면서 생각을 해 보니, 한 가지 질환이 떠올랐습니다. 두바이의 지역적 특성을 고려하면……. 사실 가능성이 크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을 거 같습니다.”

“오, 그런가? 어떤 질환이지?”

아직 진단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야 실망스러운 일이었지만.

뭐가 어찌 되었건 왕자는 현재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의사들 중 수혁이 제일 뛰어나다고 굳게 믿고 있는 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끌림까지 느끼고 있었다.

비록 그게 완전히 사기에 기반한 끌림이라고는 해도, 왕자는 알지 못하지 않은가.

해서 왕자는 기대감을 잔뜩 품은 채 수혁을 바라보았다.

“저온성 자가면역용혈빈혈입니다.”

“저온?”

딱 저온이라는 단어가 나오기 전까지였다.

저온이라니?

두바이와 가장 거리가 먼 단어 아니던가.

왕자야 당연히 두바이의 더위를 느끼기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바이가 덥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무지하지는 않았다.

“저온이라는 게……. 에어컨 바람을 의미하나?”

해서 이렇게 물었더니 돌아오는 답은 더더욱 실망스러웠다.

“아뇨. 0에서 4도 정도 됩니다. 저온성 자가면역용혈빈혈을 일으키는 항체는 딱 그 정도 온도에서 최적의 활동성을 보입니다.”

“0에서 4도라.……. 그건…….”

그건 말이 안 된다는 말을 하려는 찰나, 환자가 입을 열었다.

“저…….”

병원에 오기 전부터 지금까지 내내 대부분의 의사소통을 왕자에게만 맡기고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대단한 일이었다.

의사인 수혁은 그게 비단 대단한 일일 뿐 아니라, 중요할 거라는 감을 받았다.

“네, 말씀하세요. 파티마.”

“네, 그…….”

해서 환자가 더 말할 수 있도록 그녀에게 온전히 귀를 기울였다.

파티마는 잠시 왕자를 돌아보고는 주저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최근…… 왕자님과 저는 스키에 관심이 좀 생겼어요.”

“스키…… 요?”

순간적으로 수혁은 두바이로 오는 길에 봤던 모래 언덕을 떠올렸다.

오늘만 해도 태화에서 온 이들 중 몇몇이 그리로 놀러 간다고 했더랬다.

가봐야 유적지는 별 볼 일 없고, 그저 어느 사막을 가도 볼 수 있는 모래 언덕만 볼 수 있다고 해서 관심을 껐지만.

생각해 보면 사막에 갈 기회 자체가 희귀하지 않을까?

뭐 이런 쓸데없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있을 때쯤, 파티마가 말을 이었다.

“네, 스키. 에미리트 몰 안에 있어요.”

“몰 안에……. 스키장이 있다고요?”

“네. 스키 두바이라고.”

“그게 진짜 스키장을 의미합니까?”

“네? 아, 네. 진짜 스키장이에요. 눈으로 이루어진.”

“헐.”

오일 머니, 오일 머니 하더니만.

이 미친 작자들이 기어코 사막 한가운데에 스키장까지 만들었구나.

수혁은 범인의 상상을 뛰어넘는 중동 부호의 스케일에 그만 이상한 감탄사를 내뱉고야 말았다.

어찌 보면 실례겠지만.

엄청난 짓을 저지르는 부류 중 하나인 왕자는 관용을 베풀었다.

“놀랄 일이긴 하지. 하지만 두바이라는 도시 자체가 그런……. 놀라움을 선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시야. 지금도 그러고 있고.”

하기야 미친 짓으로 따지자면 여기 있는 알 나지르 왕자가 추진 중인 블루라군, 일명 라군스 프로젝트가 더 미친 짓 아니겠는가.

인공섬으로 이루어진 도시를 만들겠다니.

대부분이 뻘로 이루어진 서해에서 하겠다고 해도 미친놈 소리 듣기 딱 좋은 짓이었다.

“아…….”

아마 평상시에 이따위 소리를 들었다면 수혁도 마냥 놀라고만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수혁은 환자가 스키장에 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인공 스키장이니만큼 바람도 세게 불지 않을 것이고, 영하 밑으로 온도가 내려가진 않았을 터.

그렇다면 오히려 0에서 4도 사이를 왔다 갔다 했을 가능성이 컸다.

[주요 증상에 관해 물어보죠. 이 환자는 그야말로 추위에 노출된 시간을 정확히 알 테니, 증상에 관해 묻기도 수월하겠습니다.]

‘그렇지. 좋은데?’

마침내 실마리를 잡은 기분이었다.

이건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된다는 직감이 아주 강하게 들었다.

“환자분.”

해서 수혁은 감히 말을 이어 나가고 있는 왕자를 무시한 채 파티마를 바라보았다.

환자는 당황한 얼굴로 왕자를 바라봤지만, 왕자는 또다시 관용을 베풀었다.

불손한 의도가 아니라 환자를 치료하기 위함이지 않은가.

더욱이 그 환자가 애인인 파티마라면 베풀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눈에서 불길이 이는 듯하구만…….’

게다가 지금 수혁의 표정은 그야말로 득의양양하기 짝이 없었다.

어지간히 자신이 있지 않고서야 이런 표정을 짓기는 어려울 터였다.

“네.”

허락을 얻은 환자는 비로소 수혁을 마주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의 미소마저 머금은 채였다.

아무래도 병원에 온 이래 받은 이런저런 처치들로 인해 조금이나마 컨디션이 좋아진 덕이었다.

그 미소가 어찌나 고혹적인지.

수혁이 아니라 다른 이였다면 잠시나마 정신이 팔렸을 게 뻔해 보였다.

하지만 수혁은 바루다 덕에 의술에 미친 사람이 된 지 오래인지라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혹 스키장 다녀온 날이나 그다음 날 소변 색이 이상한 적 없었나요?”

“아…….”

파티마는 바로 답을 하는 대신 주변을 바라보았다.

너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답하기가 좀 곤란하다는 뜻이었다.

다들 의료진이니 사실 이상한 반응이긴 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갑이 불편하다는데.

“잠시 자리를 비키지.”

“네.”

심지어 수혁 말고는 지금껏 환자의 상태나 진단에 깊숙이 관여했다고 볼 수 있는 사람도 없는 상황이었다.

본래 응급실을 책임져야 하는 교수들조차 모조리 들러리가 된 지 오래였다.

왕자의 말 한마디에 우르르 물러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자, 다시 말씀해 주시죠. 어땠습니까?”

“늘…… 그런 건 아니었는데, 조금 길게 있던 날, 그리고 그다음 날 소변이 붉었어요. 그런데 저녁부터는 괜찮길래 그냥 괜찮은가 보다 했어요.”

“피곤하진 않았나요?”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랬는데……. 스키 타서 그런가 보다 했죠.”

뭐 자연스러운 의식 흐름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 누구도 스키 타는 행위와 혈뇨를 연결 짓지는 못했을 테니까.

그 혈뇨가 빈혈로 이어질 거라는 생각은 더더욱 떠올리기 어려웠을 터였다.

어쩌면 파티마가 의료진이었어도 다르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

수혁과 바루다가 낑낑거렸을 정도로 어려운 과정이지 않은가.

“그랬군요. 음. 지금으로서는 역시 저온성 자가면역용혈빈혈이 제일 의심이 되는군요.”

“아…….”

“그게 진단명인가, 그럼?”

수혁의 말에 환자는 입을 벌렸고, 왕자는 다급히 끼어들었다.

빨리 진단이 되고 이 망할 상황에서 애인이 빨리 벗어나길 바라고 있어서였다.

“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직 진행 중인 검사가 있기도 하고……. 정황상 증거만 있을 뿐이라 완전히 다른 질환들을 배제하기는 어렵겠지만, 역시 가능성은 제일 큽니다.”

“그…… 그렇구만. 세상에 여기서 저온성 뭐시기라는 병에 걸릴 줄이야.”

수혁의 답은 상당히 유보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자는 이미 수혁이 내린 진단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앞뒤가 딱딱 들어맞으니까.

생각해 보니까 최근 들어 정말 엄청나게 자주 스키장을 가지 않았던가.

늘 건강하기만 했던 애인이 빌빌거리기 시작한 것도 대충 그즈음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사실 별다른 치료법은 없습니다. 일단 기왕 발생한 빈혈에 대해 수혈로 수치를 따라잡고, 추운 곳을 피하는 것이 현재까지 나와 있는 치료법 중 가장 좋은 치료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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