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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닥터-298화 (298/1,303)

298화 왕가는 은혜를 갚는다 (1)

“그렇구만……. 허…….”

왕자는 아연한 얼굴이 되어 애인, 파티마를 바라보았다.

와서 수액도 맞고, 수혈도 시작해서 그런가 혈색이 좋아져 있었다.

피곤해 보이던 기색도 사라져 있었다.

더더욱 아름다워 보인다는 뜻이었다.

‘그대로 치료하지 않고 있었다면 죽었을까?’

그러진 않았을 거 같았다.

뭐가 되었건 0에서 4도 사이의 저온만 피하면 최소한 실혈이 계속되지는 않는 병이라는 거 같으니까.

아무리 스키장이 좋아도 몸이 피곤해 죽을 지경이 되면 쉬지 않겠는가.

그렇게 쉬다 보면 알아서 피는 보충이 될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혁에게 입은 은혜가 작아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치료받지 않았으면…… 평생 골골대게 됐을 거야. 그게 아니더라도……. 한동안 골골댔겠지? 여행이라도 가게 되면……. 이유를 알지 못하고 아프게 되었을 것이고.’

두바이 왕자라는 건 그저 돈이 많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호칭이 아니었다.

어떤 능력을 타고나서 얻은 지위와 부가 아니지 않은가.

그저 신분이 그랬을 뿐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불공평한 일이란 뜻인데, 오히려 그래서 더 공고했다.

어지간히 잘못된 일만 저지르지 않는다면 무슨 짓을 해도 지위와 부는 절대 흔들리지 않았다.

그 말은 재벌 총수들보다 행동반경이 훨씬 넓다는 뜻이었다.

“파티마, 올해 캐나다에서 스키 타려던 건 취소해야겠네.”

당연하게도 세계 방방곡곡 다니는 것이 취미인 왕족들이 쌔고 쌨다.

막말로 돈도 그렇게 많은데 뭐하러 더운 나라에 계속 있단 말인가.

특히 두바이가 그야말로 미친 듯이 더운 여름 시즌에는 대부분 왕족이나 석유 부호들은 외국에 나가 있기 마련이었다.

“아, 네. 왕자님. 그래야…… 겠네요. 죄송해요, 저 때문에.”

“아니, 아니지. 나 때문에 네가 아팠던 거야. 미안해. 정말…….”

왕자는 잠시 자신이 파티마와 새로운 취미로 스키를 골라내었던 동기를 떠올렸다.

그저 스키가 재밌어 보여서만이었다면 미안하다는 말까진 안 나왔을 터였다.

그야말로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 않은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의료진 중 수혁을 제외한 모두가 경악하고 있는 걸 보면, 지극히 드문 상황이라고 보면 되었다.

‘괜히 자랑하고자 하는 마음에……. 거길 데려간 게 잘못이지.’

하지만 왕자의 가슴 한켠엔 조금은 부끄러워지는 동기가 숨어 있었다.

바로 과시욕.

내가 이렇게나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내보이고 싶은 욕심.

사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창피해할 일도 아니긴 했다.

누구라도 사막 한가운데에 스키장을 지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자랑하고 싶지 않겠는가.

‘이수혁…….’

하지만 지금 왕자는 그 때문에 파티마에게 미안했고, 여기서 더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게 만들어 준 수혁에게는 고마웠다.

“그럼 이수혁 선생.”

“네, 왕자님.”

“일단…… 지켜보면 된다는 건가? 아무것도 안 하고?”

“아……. 정확히 말씀드리면, 아무것도 안 하는 건 아닙니다. 이미 빈혈이 발생했기 때문에 이걸 천천히 교정하기 할 겁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원하는 만큼 교정되고 있는지도 볼 것이고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제가 지금 생각한 거 외에 다른 원인이 있다는 얘기니까요.”

“아……. 그럴 가능성은 근데 거의 없다는 거지?”

“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바루다도 동의한 바였다.

아니, 동의한 정도가 아니라 열성적으로 긍정하고 있었다.

[제가 다시 복기해 보고 있는데……. 이번 진단 과정은 정말 대단하군요. 반드시 돌아가면 귀국 보고회에 이거 넣으세요.]

‘딴 건? 다른 것들도 꽤 하지 않았냐, 나?’

[뭐……. 그렇긴 하죠. 근데 이만한 건 없습니다. 정말 어려운 진단이었어요.]

생명이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진단은 아니었다.

하지만 꼭 그런 상황이라야만 진단이 어려운 건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그러한 상황을 일으킬 수 있는 질환은 한정되어 있어서 진단 난도는 떨어질 수도 있었다.

그에 비해 지금 이 파티마라는 환자가 겪은 일련의 상황은 정말이지 대단한 것이었다.

특히 바루다가 복기한 과정을 슥 돌아보니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천재구나, 나는.’

[그…… 제 도움이 결정적이었다는 생각은 안 들고요?]

‘네가 있다고 다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제가 다른 사람 머리에 들어가서 생착할 가능성은 0이니 무의미한 가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내 에너지 써서 머리 굴리는 거잖아. 그냥 한번 해 봐. 될 거 같냐? 이건 다 내가 우수해서 가능한 일이야.’

[으음.]

바루다는 더 이상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납득은 한 모양인데, 그걸 굳이 입에 담기는 싫은 모양이었다.

세상에 인공지능 주제에 싫은 감정이 있어?

어이가 없었다.

[아, 근데…….]

여기서 좀 더 시간이 주어졌다면, 좋고 싫은 걸 떠나 애초에 인공지능이 약한 단계라도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에 위화감을 느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쉽게도 수혁은 바루다의 이어지는 말에 집중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상당히 중요한 말이었으니까.

[저온성 자가면역용혈빈혈은 우연히 생기는 질환이 아닙니다. 선행하는 감염이 있어야 합니다.]

‘아……. 그래, 맞아. 감염병을 겪고……. 낮은 확률로 이게 생기지.’

자가면역이 뭔가.

자기 면역이 자기 자신을 공격하는, 정말이지 이상한 병 아니던가.

이런 부자연스러운 현상은 결코 흔하게 일어나지는 않았다.

무언가 몸에 커다란 변화가 있다거나, 혹은 감염 때문에 과다하게 생겨난 항체들이 이상한 짓을 저지르게 된다거나 하는 선행 조건이 필요했다.

저온성 자가면역용혈빈혈의 경우엔 특정 감염 질환들이 있는 후, 극히 드물게 발현했다.

[전통적으로 저온성 자가면역용혈빈혈의 가장 큰 원인은 매독입니다.]

‘음.’

매독.

아마도 성병 중에서는 제일 유명한 녀석 아닐까.

최근에는 에이즈가 워낙에 날뛰고 있긴 하지만.

아직도 인류 역사에서 제일 많은 사람을 죽인 성병은 이 녀석일 터였다.

‘그걸…… 의심한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파탄 나겠죠?]

‘몰래 끼워 넣어서 검사해 보긴 해야겠네.’

[그게 낫겠습니다.]

수혁은 잠시 파티마를 돌아보았다.

아까 궁금한 것을 죄다 쏟아 내듯 물어보았고, 수혁은 그에 대해 성심성의껏 답해 준 참이라 지금 당장은 딱히 근처에 있을 이유는 없어 보였다.

게다가 이제 곧 VIP 병실로 올라갈 참이었다.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 근데 매독이 주된 원인이었던 것도 옛날얘기 아냐? 요새는 뭐…….”

[그것도 그렇습니다. 최근 들어서는 단핵구나 홍역, 수두 등도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사실 대한민국이라면 홍역이나 수두는 범인으로 찍기가 참 어렵긴 할 터였다.

보통 어린 시절 앓고 지나가거나 예방 주사를 맞지 않던가.

매년 매서운 겨울이 찾아오는 상황에서 기왕에 발생한 저온성 자가면역용혈빈혈을 저 나이가 되기까지 모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더운 나라였다.

얼마든지 가능성은 있었다.

‘오케이, 그럼 그것도 다 검사하자고.’

[네. 매일 혈액 검사를 나가긴 할 테니까 섞어서 나가면 될 겁니다.]

‘주의를 줄 필요는 없겠지? 성병이면 옮잖아?’

[그건 결과 나오고 나서 말하죠. 설마 병실에서 할까요?]

‘음.’

여기서 뭐라도 코멘트를 좀 해 보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수혁은 전혀 경험이 없는지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디서 어떤 식으로 거사가 치러지는지도 사실 모르지 않는가.

[제가 괜한 것을 물었군요, 죄송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은 바루다였다.

아무리 기억을 돌리고 돌려서 검토를 해 봐도 수혁이 해 본 것은 간접 경험뿐이었다.

‘죄, 죄송은…… 이럴 때만 그렇게 따박따박 사과하지 마.’

[제가 알기로 인간사회에서 수혁 나이에 아무 경험이 없는 건 크나큰 비극 아닙니까? 그래서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미안하면 거기서 끝내 인마. 후벼 파지 말고.’

[알겠습니다. 이제 웬만하면 수혁의 무경험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겠습니다.]

‘아오.’

정말 끄집어내서 팰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을 텐데.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가능한지 여부를 넘어, 그런 짓을 했다간 오히려 숙주인 수혁이 죽을 수도 있었다.

신경외과 수술 기록을 보면 도저히 제거할 수 없는 부위에 틀어박혀 있다고 했으니까.

“이수혁 선생님. 이제 곧 올라갑니다. 같이 가시죠.”

해서 여기 어디쯤 아니었나 하는 지점을 긁적이고 있으려니, 알 막툼 교수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뒤를 돌아보니 정말로 준비가 다 끝나 있었다.

아무리 처치가 간단해졌다고 해도 챙겨야 할 게 한두 가지는 아니었을 텐데.

과연 진짜 VIP의 위력이란 대단한 것이었다.

“네. 그러죠.”

“참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이만한 단서로 거기까지…….”

“네? 아,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직은 확진은 아닌데요, 뭐. 도나스-랜드스타이너 항체(Donath-Landsteiner Ab)의 존재를 확인해야 합니다.”

“네……. 그렇긴 하지만…….”

알 막툼 교수는 방금 수혁이 말한 항체의 이름이 생소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잠시 풀 죽은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이내 수혁은 이 병원에 있는 그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천재이면서 동시에 배움과 동경의 대상이 되는 태화에서조차 그렇다는 것을 떠올리고 나서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축하드립니다.”

“네?”

“알 나지르 왕자께서는……. 왕자님들 중에서 꽤 호방한 축에 속하시는 분이거든요. 어떤 식으로든지 간에 보답을 하실 겁니다. 절대 허투루 넘어가지는 않을 거예요.”

“아……. 뭐 대가를 바라고 한 건 아닌데.”

거짓말이었다.

수혁은 그 누구보다 간절하게 대가를 바라고 있었다.

장본인인 수혁을 제외하고 이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바루다였다.

평소라면 당연히 비난을 퍼부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지금의 바루다는 처음의 순진했던 바루다가 아니지 않은가.

이미 수없이 많은 부분에서 세태와의 야합을 이룬 후였다.

[잘한다. 진짜 연기 하나는 끝내줘.]

‘근데 진짜 뭐 줄까?’

[모르죠. 밥 한 끼로 땡 치진 않을 거 같은데.]

‘너무 호방해서 아무것도 안 주진 않겠지.’

[시발놈이.]

‘응?’

[이럴 땐 욕을 해도 좋지 않을까요?]

‘뭐……. 그렇긴 하지.’

잠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꼭대기 층이었다.

VIP실은 두 가지 종류였는데, 파티마는 그중 왕족들에게만 허락되는 곳에 들어갈 수 있었다.

꼭대기 층의 거의 3분지 1을 차지하는 병실이었다.

병실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저택 같은 느낌을 주었다.

“자, 그럼……. 오늘 피곤하실 텐데, 좀 주무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해서 파티마가 누워 있는 방 말고도 많은 방이 마련되어 있었다.

왕자는 그 방 중 어느 하나에서 수혁을 불렀다.

평소 달고 다니던 비서들마저 물리친 후였다.

그 순간 수혁은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정산 시간인가?’

[그런가 봅니다.]

‘후.’

[정신 차리시고, 고고.]

‘오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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