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299화 (299/1,303)

299화 왕가는 은혜를 갚는다 (2)

“이수혁 선생.”

왕자는 마호가니 탁자 뒤에 놓인 육중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제아무리 VIP 병실이라지만 너무 쓸데없는 물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막말로 아파서 들어온 사람이 왜 이런 것이 필요하단 말인가.

아마 오늘 말고는 더 이상 쓸 일도 없을 거 같았다.

‘그런 것치고는 너무 고급이네.’

[고급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제 데이터상에는 이런 물건이 아예 등록되어 있지도 않은데.]

‘용량 부족하다고 다 지웠으니까 그렇지?’

[아뇨, 사실 아직 좀 남아서 안 지웠는데요?]

‘그냥 감이지. 감. 설마 여기 그지 같은 거 갖다 놨겠냐?’

[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딱히 감만 이게 고급이라고 말해 주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척 보기만 해도 진짜 비싸 보였다.

느낌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갈색이라고 해도 다 같은 갈색이 아닌 그런.

“네, 왕자님.”

속으로는 온갖 호들갑을 다 떨고 있는 주제에, 수혁은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대꾸했다.

적어도 남들이 보기엔 초연해 보였다.

아마 왕자가 한국의 명언을 좀 뒤적거렸다면, 최영 장군의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을 떠올렸을 터였다.

그만큼 수혁은 눈앞에 놓인 고급진 물품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알아보니까…… 원래 엄청 부자는 아닌 거 같던데.’

두바이 왕자쯤 되면 이런저런 줄이 있기 마련이었다.

특히 한국 기업과 커다란 일을 하고 있는 왕자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당장 전화 한 통에 달려온 두바이 영사관 직원들만 해도 여럿 있었다.

‘원장이라고 해 봐야……. 연봉이 겨우 2억이 안 되던데.’

연봉 2억에 겨우라는 말이 가당키나 한가 싶지만.

금전 감각이 남다른 왕자에게는 정말이지 ‘겨우’였다.

‘사람이 대범한 거지. 뭐……. 돈에 욕심이 없거나.’

하도 돈에만 관심 있는 놈들이 꼬이다 보니, 왕자는 이런 사람이 좋았다.

돈보다는 뭔가 다른 것에 더 관심이 있는 사람들.

왕자는 이제 굳이 그러한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오, 웃네.]

덕분에 바루다는 곧장 왕자의 기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좋은 뜻이지?’

[당연하죠. 인간사회에서 저런 미소는 다 좋아요. 상대가 사기꾼만 아니면.]

‘왕자가 나한테 사기 칠 확률은?’

[있겠습니까?]

사기란 상대가 내게서 무언가 얻을 것이 있을 때 치는 것 아니겠는가.

두바이 왕자가 대체 수혁에게 뭘 바랄 게 있단 말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수혁은 다소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앉지.”

“아, 네.”

물론 겉으로는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수혁이 뛰어난 연기자인 것도 있지만.

바루다가 협력자이기 때문인 것이 더 컸다.

바루다는 이런저런 신경을 최대한 조절하여 수혁의 평정심을 유지함은 물론이거니와, 표정도 조절해 주고 있었다.

“이번엔…… 정말 고맙네.”

“아뇨, 아직 완전히 확진이 된 것도 아닌데요.”

“아냐, 이미 상태가 엄청 좋아졌지 않나? 시기도…… 딱 맞아떨어지고. 아까 이수혁 선생도 자신의 진단에 확신한다고 했지 않나. 그…… 저온성…….”

“네, 보다 쉬운 이름이 있습니다. 환자분 증상하고도 연관이 있는 이름이니 보다 기억하기 쉬우실 겁니다.”

“아, 뭐지?”

“발작성 한랭혈색소뇨증입니다. 말 그대로 추운 날씨에 혈뇨를 보는 질환이란 뜻이죠.”

“아하.”

확실히 저온성 어쩌구 하는 것보다는 이게 마음에 와닿았다.

해서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원래 수혁을 부른 목적을 떠올렸다.

‘은혜를 갚을 땐 확실히 해야지.’

지금이야 태화의 그늘 아래 있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사람 인생 아니겠는가.

이렇게까지 뛰어난 사람이라면 무조건 연을 만들어 놓는게 좋았다.

그리고 그 인연은 굵직하면 굵직할수록 좋았다.

“아.”

“왜 그러지?”

그러는 사이 수혁의 핸드폰이 울었다.

수혁은 잠시 그것을 내려다보고는 다시 왕자를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표정이 좋긴 했지만, 지금은 더더욱 그러했다.

“제가 처방한 검사 결과가 나왔군요.”

“어떤?”

“이 발작성 한랭혈색소뇨증에서 특징적으로 관찰되는 항체입니다. 도나스 랜드스타이너 항체(Donath-Landsteiner Ab)라는 건데, 이게 양성으로 나왔습니다.”

“그 말은?”

“진단명이 맞았다는 거죠.”

“그렇군. 역시…….”

왕자는 어차피 보상을 줄 생각이었지만, 이것으로 더 결심이 단단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 보니 아까보다도 더 망설임이 없어졌다.

“좋아. 꼭 지금 진단이 되어서는 아니지만, 더 쉽게 말할 수 있겠어. 이수혁 선생, 나는 알 나지르일세. 원래 이름을 말하자면 훨씬 더 길겠지만……. 그렇게 말해 봐야 기억할 수도 없겠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사실 기억하려고 하면 얼마든지 가능하기는 했다.

수혁에게는 바루다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굳이 앞에서 잘난 척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바루다는 지금 그따위 이름을 데이터화할 정신이 없어 보였다.

[돈, 돈, 돈!]

자본주의에 매몰되어 버린 의료 목적 인공지능은 그저 돈만 외쳐 대고 있었다.

수혁이 조금만 더 떳떳한 입장이었다면 뭐라고 했을 텐데.

‘돈, 돈, 돈!’

실상 비슷한 놈인지라 그저 잠자코 있었다.

“우선 돌아가는 비행기 편은……. 원하는 날짜가 있으면 언제든 말하게. 전세기를 띄워 줄 거야.”

“네? 전세기요?”

“그래, 전세기.”

“아니……. 그렇게까지는…….”

“그냥 받게. 나한테는 그렇게까지 큰일이 아니야. 그저 작은 배려야. 보상이랄 것도 없네.”

“아……. 네, 감사합니다.”

전세기라.

영화에서 보던 그런 건가.

비행기 얘기 나왔을 때만 해도 일등석이나 떠올렸던 수혁은 그만 아연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허, 정신 차려요. 배려라잖아, 기껏해야.]

그 바람에 바루다가 조금 바빠졌다.

여기서 정신줄을 놓게 되면 아무리 바루다가 신경 조절을 하고 있다고 해도 무리였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수혁은 왕자 앞이라는 자각을 잊지는 않은 상황이라 곧장 수습이 가능했다.

“그리고…… 내가 개발 중인 라군스에 있는 빌라 중 한 곳을 내어주지. 소유권을 양도하고 싶은데……. 그렇게 되면 세금도 있고 또 관리비까지 들어가니 그냥 내가 다 부담하고, 이수혁 선생은 원할 때면 언제고 오게.”

“아…….”

“그냥 고맙다고 하면 돼. 자네는 그럴 자격이 있어. 스스로 그렇지 않다고 판단하는 건 의미가 없네. 내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수혁이 왕자를 대면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던가.

그 말은 곧 바루다가 왕자를 분석할 시간도 많이 확보했다는 뜻이었다.

덕분에 바루다는 왕자의 말이 진심이며, 지금부터는 뭘 받든지 그저 고맙다는 말이나 하는 게 최선이라는 결론을 쉽게 내릴 수 있었다.

수혁은 너무 커다란 것들을 받고 있는 참이라 망설여졌지만.

뭐 어쩌겠는가.

어차피 수혁은 대부분의 인간관계를 바루다에게 의지하고 있지 않은가.

인간이 인공지능에 인간관계에 대해 의지한다는 게 참 이상한 일이긴 했지만.

다른 가정은 별의미 없는 일이었다.

이미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으니까.

‘여기 빌라……. 못 해도 수십억짜리들이던데.’

[재산이 조 단위라면서요. 껌값이지.]

‘그런가? 난 도통 이해가 잘…….’

[닥치고 고맙다고나 하라니까?]

‘알았어.’

수혁이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바루다와 바쁘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왕자는 입을 쉬지 않았다.

“또…… 한국에는 뭐 지낼 곳이 있나?”

“네? 아……. 지금은 레지던트라 당직실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당직실? 병원에서 산다고?”

“네.”

따지고 보면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레지던트라는 말 자체가 거주민이라는 뜻을 담고 있지 않은가.

이를테면 병원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대부분 레지던트는 정말 그렇게 살았다.

하지만 알 나지르에게는 충격과 공포였다.

세상에 그렇게 사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 얼굴이었다.

“그럼……. 밖에는 집이 없나?”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지 질문이 이어졌다.

수혁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니까.

“네. 그렇습니다. 학생 때는 기숙사에서 살았고……. 지금은 병원에서 삽니다.”

“거참.”

아빠가 원장이라더니.

집 한 칸 해 줄 돈이 없단 말인가.

알 나지르는 어휴휴 하는 소리를 내고는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종이 하나를 슥 하고 밀었다.

지도였다.

태화 의료원 근처가 그려진 지도.

“여기……. 보면 이 건물 보이나?”

“아……. 네.”

“이게 내 거야. 태화만 진출하는 게 아니고, 우리 쪽도 진출하거든. 아, 아직은 짓고 있어.”

“아…….”

“거기 5층까지는 상업 시설인데, 그 위로는 오피스고, 여기 30층부터는 오피스텔이야. 여기 중에 하나 고르면 그건 분양 안 하고 내 소유로 남기지. 사용은 마음대로 하고.”

“아……. 감사합니다.”

얼핏 봐도 수혁이 알고 있는,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지금 수혁 또래들이 사는 오피스텔하고는 평형부터 달랐다.

방이야 하나뿐이었지만, 거실이나 부엌 그리고 화장실 크기가 엄청났다.

거의 30~40평은 되는 듯했다.

세상에 강남에 30, 40평짜리 오피스텔에 거저 살 수 있게 될 줄이야.

[입 좀 의식적으로 다물래요? 내가 하려니까 너무 힘든데?]

‘안 벌어지게 생겼냐? 뉴스 안 봐? 이거 10억도 넘어.’

[아니……. 방금 라군에 받은 빌라는 몇십억이라면서요.]

‘그건 별장이고, 이건 집이잖아.’

[뭔 차이인지 모르겠네…….]

하여간 바루다가 지껄여 준 덕에 수혁은 조금이나마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물론 그 안정을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왕자가 준비한 선물이 끝이 없었기에 그러했다.

“가구나 전자기기도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하게. 아니면 내가 알아서 채워 넣으라고 지시할 테니 그렇게 해도 좋고. 그리고…… 여기가 병원하고 거리가 좀 있으니 운전을 해야겠지?”

집 다음은 차였다.

남들 눈이 있는 데다가, 수혁은 다리가 불편해 운전을 즐길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했는지 세단이 주어졌다.

‘G90…….’

[음, 좋은 차군요.]

거기에 더해 기사도 약속했다.

원장도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야 기사가 없는데, 일개 레지던트가 기사라니.

“감사합니다.”

“일단은…… 이렇게만 해 두지. 하지만 끝이라고는 생각 말게. 앞으로 더 큰 일을 하게 되면, 더 크게 도울 일이 있을 거야.”

“저는 이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합니다.”

“나는 그렇지가 않으니 괘념치 말게. 그럼…… 언제 갈 건가?”

왕자는 지금 당장 간다고 해도 전세기를 잡아 주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그러고 싶기도 했다.

두바이에서의 생활이 좋기는 했지만.

두고 온 가족 아니, 가족 같은 사람들이 생각나서였다.

‘이제 슬슬 아빠랑 과장님이랑 조 교수님이 보고 싶기도 한데……. 안대훈이랑 하윤이 걱정도 좀 되고.’

[그래도 더 있다 가시죠. 적어도 파티마가 퇴원하게 될 때쯤으로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감사하다는 말만 하라고 했지만 너무 많이 받았어요. 더 줄지 또 누가 알아요?]

하지만 수혁은 세태와 야합한 바루다에게 굴복했다.

“우선은 환자분 퇴원할 때까지는 있겠습니다.”

“정말인가? 그럼 나야 고맙지. 고맙네.”

“아닙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바루다보다 먼저 수혁이 야합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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