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화 기다렸다구! (1)
그러한 연유로 수혁은 일주일이나 더 있다가 귀국길에 올랐다.
이미 다른 팀원들은 5일 전에 갔으니, 꽤 늦어진 셈이었다.
“음.”
그렇다고 딱히 초조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좋았다.
정말이지 지난 일주일은 꿈 같은 일주일이었던 탓이었다.
[왕자가 화끈하긴 하네요.]
그렇게 많은 걸 쥐여다 준 것으로도 모자라 지내는 숙소까지 변경해 주었더랬다.
덕분에 수혁은 팔자에도 없었을뿐더러,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버즈 알 아랍에서 묵을 수 있었다.
룸서비스니 뭐니 하는 건 모조리 왕자 개인 카드를 걸어 둔 덕에 먹는 것도, 무언가 하는 것도 제한이 없었다.
수혁이 해야 할 일이라고는 하루 두 번 병원에 가서 환자 파티마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그마저도 처음 이틀 정도나 좀 할 일이 있었지, 그다음부터는 안정적인 것을 넘어 퇴원도 가능한 상황이었던지라 거의 수다 떠는 것에 지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이번엔 전세기라니. 세상에…….’
수혁은 널찍한 좌석에 앉아 앞에 놓인 술잔을 내려다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맛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술이라 그리 반갑지만은 않았다.
[이 양반이 또 모르는 소리 하시네. 이게 신의 물방울인지 뭔지에 나온 거라니까요.]
‘아니……. 왜 인공지능이 술을 탐하냐고. 이게 말이 돼?’
[맛은 온전히 내가 느낄 수 있으니까요.]
‘이건 심지어 커피처럼 내 뇌 기능이 향상되는 것도 아니잖아. 아니지. 그런 정도가 아니지. 아예 반대잖아? 이런 걸 마시라고 해?’
[그냥 비행기도 아니고 전세기 타고 가는데 설마 뭔 문제 있겠습니까? 이 기회 아니면 언제 이런 술을 이렇게 여유롭게 마실 수 있겠어요.]
다 바루다가 강요한 탓에 받아 둔 것이었다.
한 가지 좋은 점이 있다면 원하는 술이 있으면 준비해 주겠다고 한 왕자의 비서마저 수혁이 언급한 와인 이름을 듣고 조금 놀랐다는 거 정도였다.
‘아……. 와인을 정말 즐기시는 분이군요. 왕자님께서 아시면 또 좋아하실 겁니다.’
왕자도 좋아한다고 하니 뭐 잘한 짓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굳이 쓴 술을 마셔야 되는 이 상황이 달가운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수혁은 아까 바루다가 일러 준 술의 이름을 기억도 못 하고 있었다.
애초에 관심이 없던 탓도 있었지만.
이름이 워낙에 어려워서이기도 했다.
‘아까 뭐라고 했더라.’
[프랑스 부르교뉴 지방의 브티크 와인 와이너리인 ‘도멘 빌라우드 시몽’의 샤블리 와인이죠. 샤도네이 품종 100%로 만든 이 와인은 파인애플과 사과 등 과일향이 가득 피어난다고 합니다.]
‘뭔……. 어디서 본 거야.’
[호텔 와인 리스트에 써 있더라고요.]
‘그때 마시지, 그럼.’
[괜히 맛없으면 음식에 누가 되니까요.]
‘이 자식…….’
원래 와인 마니아들은 마리아주니 뭐니 해 가면서 음식과 와인을 페어링하는 방식으로 즐긴다고 하지 않던가.
술에 대해서라면 문외한이라고 할 수 있는 수혁이지만, 그럼에도 이 정도는 알고 있었다.
신현태나 이현종이 그래도 와인 마니아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음식에 누가 될까 봐 안 먹어?
그 말은 곧 바루다 또한 수혁과 다를 바 없는, 와인에 대해 아는 거 하나 없는 놈이란 뜻이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바루다가 뛰어난 녀석이라고 해 봐야 스스로 인풋을 쌓을 수는 없는 존재이지 않은가.
뭐가 어찌 되었건 간에 수혁이 쌓지 않은 인풋은 바루다에게도 그러했다.
[하여간 마셔 봐요. 난 설명 보자마자 너무 궁금하던데. 포도를 가지고 만들었는데 왜 파인애플과 사과맛이 난다는 걸까요? 굴이랑 먹으면 더 맛있다는데 과연 어떨까요?]
하지만 안 마시기도 뭐한 상황이었다.
이미 술을 따라 준 승무원도 기대 가득한 얼굴이지 않은가.
아마도 귀한 술일 터였다.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그걸 먹고 수혁이라는 알 나지르 왕자의 귀한 손님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었다.
‘모르지, 새꺄.’
[마셔 봐요. 빨랑.]
‘알았어.’
해서 수혁은 잔을 들고 조심스럽게 맛을 보았다.
아까 바루다가 말해 준 맛이 느껴지는지 느끼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우면서였다.
바루다 또한 수혁의 미각을 극대화시킴으로써 수혁을 도왔다.
“음.”
그래서 그랬을까?
지금껏 숱한 술자리를 가졌음에도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맛있네.”
[그렇네요? 술이 맛있을 수도 있네요. 과연……. 부티크 와인…….]
‘부티크 와인이 뭔데?’
[잘 모르죠. 근데 비싼 거래요. 비싸면 좋은 거 아닙니까?]
‘뭐…….’
수혁은 왜 인공지능이 이렇게 세속적으로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진 않았다.
그렇지 않은가.
특히 이번 여행에서 그걸 많이 느꼈다.
돈을 적당히 쓰면 그보다 싼 값에 더 좋은 것을 사고 먹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정말 많이 써 버리면 무조건 최고를 사고 먹을 수 있었다.
‘너 아까 이것만 달라고 한 게 아니지?’
[그럼요. ‘몽 드 밀리우’, ‘레 프뤠즈, 샹 볼 뮈지니’, ‘뉘 생 조르주’, ‘클로 드 부조’ 등 말한 건 많죠.]
‘다 먹어 볼까?’
[수혁의 알코올 분해능이 걱정인데요. 지금도 살짝 부담되는데.]
‘그래도 이때 아니면 언제 먹어 봐. 네 말대로지, 뭐.’
[하긴 그것도 그렇습니다.]
해서 수혁은 방금 바루다가 언급한 술을 싹 다 요청했다.
그 술에 어울릴 만한 간단한 안주까지 포함해서였다.
덕분에 수혁은 아주 잠깐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고, 긴 숙취에 시달려야만 했다.
아무래도 비행기를 타고 있다 보니 숙취의 정도가 더했다.
‘좋은 술 마시면 머리가 덜 아프다더니……. 다 구라구나…….’
[이제 슬슬 내릴 텐데, 괜찮습니까?]
‘괜찮아 보이냐? 그러고 보니까 너는 왜 괜찮아?’
[저는 원하면 감각을 동기화할 수도 있고, 끊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끊었죠. 뭐 하러 쓸데없는 감각을 느낍니까?]
‘와……. 이 개…….’
그 말은 곧 달면 삼키고 쓰면 뱉겠단 뜻 아닌가.
세상에 기생충도 이런 기생충이 또 있을까?
항의하고 싶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가뜩이나 머리가 아픈데 착륙하고 있는 와중이라 더더욱 골이 아파 왔기 때문이었다.
환장할 노릇인 것은, 그럼에도 표정은 평온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제가 수혁의 체면을 고려, 얼굴 표정은 관리하고 있습니다.]
‘하…….’
그래서 그런가, 승무원 중 어느 누구도 딱히 수혁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팔자 좋은 젊은 친구가 좋은 술 먹고 늘어지게 자더니 일어나서 앉아 있다고만 생각했기에 그랬다.
덜컹.
비행기는 곧 착륙했다.
그와 동시에 수혁의 폰으로 연락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그냥 플러스 친구들이 보내는 광고성 문자였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다.
이현종, 신현태, 조태진이 보낸 것들이 그랬다.
[언제 오니.]
[공항이다.]
[기다리고 있어.]
내용이 굉장히 길었는데, 요약해 보자면 이랬다.
네가 언제 오는지 궁금하고, 그러다 못해 공항까지 왔다.
‘아으…….’
[복에 겨웠네요, 수혁. 두바이에서는 왕자가 보내준 차를 타고, 여기서는 신현태가 모는 차를 타고 가게 생겼으니까요.]
생각해 보면 그렇긴 했지만.
지금은 생각이라는 거 자체를 하기가 좀 버거운 상황이었다.
‘머리만 안 아프면 좋겠는데……. 약 먹으면 안 되나.’
[안 되죠. 아세트아미노펜은 간 독성이 있지 않습니까? 가뜩이나 술 먹었는데 그걸 먹었다간 부작용이 심하게 될 겁니다.]
‘그럼 비스테로이드성 소염제는?’
[속을 쓰리게 할 가능성이 크죠. 산도가 높은 와인일수록 그럴 가능성이 있는데, 같이 먹게 되면……. 어휴.]
‘그렇게 내 몸 생각하는 놈이 술을 먹게 해?’
[분해 효소가 부족한 것은 제 잘못이 아닙니다, 수혁.]
‘와…….’
화가 났지만 뭐 어쩌겠는가.
맨정신으로도 바루다를 당해 내기 힘든데.
하여간 수혁은 겨우겨우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 수속을 마치고 짐을 챙겨다 밖으로 향했다.
“수혁이다!”
“내 새끼 왔네!”
“야, 수혁아!”
동시에 세 아저씨를 발견할 수 있었다.
셋은 발견이라는 단어를 써도 되나 싶을 정도로 큰 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특히 이현종은 이산가족이라도 만나게 된 듯한 얼굴이었다.
덕분에 주변에서도 시끄럽다는 이유로 눈살을 찌푸리기보다는 그저 응원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놈! 얼마 만이야!”
수혁은 기껏해야 2주도 안 되었다는 말을 하기보다는 그냥 이현종에게 안기는 것을 택했다.
이상하게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두바이의 화려함도 좋았지만.
이쪽의 푸근함이 더 수혁에게는 맞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형, 형! 애 숨 막혀!”
푸근함이 도가 지나치다는 느낌이 들 무렵 신현태가 끼어들었다.
힘으로만 따지면 이현종은 신현태에게 상대가 되지 않기 때문에, 곧 이현종은 무력하게 떨어져 나갔다.
본인도 수혁이 숨이 막히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이기도 했다.
“아……. 그러면 안 되지. 얼굴 좀 보자. 어휴……. 얼굴이 상…… 아니, 살쪘네. 거기 음식이 입에 맞았니?”
“현지에서 엄청 신경을 많이 써 줘 가지고요.”
“하긴, 그럴 테지. 얘기는 들었어.”
“들으셨어요?”
“당연하지. 나 원장이야. 김다현 이사……. 아니지, 너도 알지, 이제?”
“네.”
“그래, 너 거기 있는 동안 인사 개편됐어. 아직 병원은 그대로지만……. 원장단은 대강 알고 있어. 너랑 나는 이제 통합진료센터로 가는 거야, 내년부터.”
“그것도 들었어요, 아빠.”
“허허. 그래, 센터장 대신 아빠라고 불러라.”
이현종은 기분이 무척이나 좋은지 껄껄 웃더니,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신현태가 나설 차례가 되어서였다.
생각 같아서는 철석같이 막고 싶었지만, 마냥 그럴 수는 없었다.
수혁이 이놈과 해야 할 일이 있어서였다.
그냥 일이 아니라 수혁에게 득이 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아빠 된 입장에서 훼방을 놓아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그래, 수혁아.”
해서 이현종은 뒤로 물러났고, 그 자리에 신현태가 슥 끼어들었다.
“네, 과장님.”
“너 전에 국건영 그거…… 논문 낸 거. 미세 먼지.”
“아, 네.”
“그거 엑셉트 되어 가지고, 실리기로 했는데, 점수가 높지는 않아.”
“그럴…… 수밖에 없죠. 사실 현상에 대한 분석이니까요. 아직 동물 실험 단계에서 규명해야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신현태는 자신의 레지던트 시절을 떠올리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수혁을 바라보았다.
‘내가 쓴 논문이 기대보다 못 미친 곳에 실리게 되었다고 하면 우울했을 텐데…….’
생각해 보면 반응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수혁은 벌써 NEJM에도 내 본 경험이 있지 않은가.
신현태는 질투보다는 대견함을 품고는 수혁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그래, 사실 그건 중요한 건 아니고.”
“네.”
“화이자 포럼 말이야. 이번에 홍콩에서 열리게 되는 거.”
“아……. 네.”
“거기 제출할 내용 다 정리됐어. 장덕수 교수가 너 없는 동안 고생 많이 했다. 메일로 보내려다가, 그냥 같이 보면서 얘기하는 게 나을 거 같아서 안 보내고 파일로 가져왔어. 가면서 볼까 하는데, 괜찮지?”
“아, 네! 그래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