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302화 (302/1,303)

302화 기다렸다구! (3)

“흠.”

수혁은 거북한 숨결을 내쉬었다.

이현종, 신현태에 조태진까지 모였는데 설마하니 그대로 병원으로 직행할 일이 있겠는가.

셋은 당연하다는 듯 맛집으로 향했다.

명분은 충분했다.

오랜 시간 외국에 나가 있던 수혁에게 맛있는 한국 음식을 먹여 보자, 뭐 이런 것이었다.

마침 수혁도 바루다도 좀 얼큰한 음식이 땡기긴 했던 참이라 먹는 동안엔 좋았더랬다.

“어후.”

[거 작작 좀 먹지. 누가 쫓아오기라도 한답니까? 뭘 그렇게 급히 먹었어요.]

하지만 먹고 난 다음의 더부룩함은 별개의 문제였다.

특히나 무언가 해야 할 일이 있는 경우에는 더더욱 성가셨다.

‘간만에 매운 거 먹으니까 확 당기잖아. 지도 아까는 저것도 먹고 저것도 먹으라고 난리법석을 피워 대 놓고서 이러네?’

[그야…….]

따지고 보면 바루다도 별로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굳이 머리를 굴리지 않더라도, 바루다가 먹어 보라고 했던 반찬 가짓수가 열 개는 넘었다.

이현종이 이럴 땐 다른 곳보다 한정식집을 가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 덕이었다.

[아무튼, 환자나 좀 띄워 봐요.]

아무리 생각해도 불리하다고 판단이 되었는지, 바루다는 고개를 좌우로 털어 내고는 환자 얘기부터 꺼냈다.

의사에게 환자 얘기로 화제를 돌리는 행위.

반칙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효과 있는 일이라 생각하면 되었다.

특히 거의 5, 6일간 농땡이 피우면서 진료 현장에서 떠나 있던 수혁에게는 더더욱 그러했다.

그 말을 듣는 즉시 수혁은 비난을 멈추고 당직방 컴퓨터 모니터에 환자 차트를 띄웠다.

혈액종양내과 조태진으로 솔팅을 한 채로였다.

‘어……. 환자가 왜 이렇게 많아?’

[그러게요. 주치의는 누구…… 우하윤이네요. 혼자 29명을 보고 있네? 백은…… 아, 백은 이수혁이었겠군요. 그럼 진짜 혼자 봤겠네.]

‘휴가 시즌도 아닌데, 왜 이러지?’

[데이터 분석 결과 원래 혈종에서 조태진 교수는 이렇군요. 그간 수혁이 워낙에 빨리빨리 퇴원할 환자에게 퇴원 결정을 내려 주어서 20명 미만으로 유지되었던 겁니다. 조태진 교수 또한 마음먹고 덤벼들면 가능하겠지만, 교수들은 워낙에 외래도 많고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하죠.]

‘아……. 이야, 교수님 진짜 힘드셨겠는데.’

어쩐지 식사하는 내내 말없이 약간은 한 맺힌 듯한 얼굴로 게장만 퍼먹고 있더라니.

부교수 레벨이면 이제 슬슬 병원에서의 일뿐만 아니라, 대외적인 일도 쌓여 가는 시점 아니던가.

학회 일이라거나, 또는 펀딩 따 온 연구라던가 하는 일들이 엄청나게 많아진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외래 숫자도 일반의인 수혁과는 비할 수 없이 많았다.

그런 와중에 1년 차와 함께 이 많은 환자를 봐야 했다니.

어쩌면 어지간한 1년 차만큼이나 힘든 시간을 보냈을 수도 있었다.

아니, 나이가 들면서 줄어들었을 체력을 생각하면 훨씬 더 힘들었을 터였다.

‘하윤이는 어떻게 됐으려나?’

[반 죽었겠죠. 평범한 1년 차가 어떻게 이만한 환자를 혼자서 봅니까? 조태진 교수 성격에 내깔겨 두진 않았을 테지만……. 그렇다고 주치의의 무게가 사라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 말은 조태진 밑에 있는 우하윤은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을 거란 뜻이 되었다.

아직 알고 있는 게 부족하거나, 알고 있는 것을 제대로 체득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만한 환자를 보는 건 부담을 넘어 재난이었으니까.

‘약간 미안해지네?’

[뭐……. 그럴 것까지는 없겠죠. 어련히 알아서 휴가 연장 허가를 내주었을까요.]

‘지금부터라도 좀 제대로 봐 볼까…….’

[일단 입원 기간이 긴 환자부터 보시죠. 보낼 수 있는 사람은 빨리 보내 주는 게 좋겠습니다.]

‘오케이.’

결정을 내린 수혁은 우선 환자 명단을 재원 일수로 줄을 세웠다.

무려 열흘이 넘어가는 환자만 해도 다섯을 넘어가고 있었다.

이중엔 반드시 집에 가도 되는 사람들이 있을 터였다.

그게 아니라면 무언가 놓치고 있는 게 있거나.

[김환기 환자. 이 사람은 차트 플로우가 이상합니다. 판단에 오류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퇴원 보류하시죠.]

‘응, 내 생각도 그래. 이건……. 정상적인 흐름이 아니지.’

수혁과 바루다는 그들 중 좀 이상하다 싶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퇴원 오더를 무자비하게 넣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엄청나게 빠르지는 못했다.

어느 정도 환자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변화만 감지해서 판단을 내리는 게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싹 파악을 해 나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후.”

그렇게 1차 정리가 끝났을 땐 이미 2시간 정도가 흐른 후였다.

그나마 15명 정도는 루틴에 해당하는 환자들이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2시간 아니라 4시간이 주어졌어도 모자랐을 터였다.

[일단 이 8명은 내일모레 싹 퇴원시키도록 하죠. 미흡한 점이 있다면 내일 하루 동안 해결할 수 있겠습니다.]

‘문제는 여기 이 세 명인데.’

[음.]

그렇다고 일이 다 끝났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플로우가 이상하게 꼬인 환자들이 있었다.

다행이라면 상태가 그리 나쁘지 않다는 점이었다.

다만 한 명의 환자는 좀 이상했다.

‘다른 환자들이야 뭐 검사 좀 긁다 보면 나올 거 같아. 임프레션을 영 이상하게 잡은 건 아니니까. 근데 이……. 김환기라는 환자는 이상해. 검진한 거 보면 딱히 뭐가 없는데 열이 나잖아.’

[뭐가 없다기보다는 이비인후과에서 우선 축농증 의심하에 치료 중에 있습니다.]

‘내시경 사진 봐. 3일 전에 찍은 거긴 한데……. 농이 있긴 해도 아주 심하진 않잖아. 당시 엑스레이를 봐도 뭐……. 기껏해야 상악동 정도? 워낙에 면역이 떨어져 있어서 그런 거라고 봐야 하나.’

[이후로는 사진이 없는 게 걸리는군요. 계속해서 드레싱은 진행하고 있다고 하는데, 보시면 차트에 같은 내용이 반복됩니다.]

바루다가 지적한 대로였다.

환자에 대한 이비인후과 협진 차트에는 객관적 소견에 농성 비루라고 쓰여 있었고, 진단명에는 축농증 그리고 치료 계획에는 드레싱 및 항생제 지속만이 반복되고 있을 뿐이었다.

3일 동안 계속 같았다.

심지어 첫날을 제외하면 내시경 사진도 없었다.

‘환자 상태는 계속 나빠지잖아. 의식 레벨이…… 원래도 명료하진 않았지만, 지금은 졸린 수준이야. 하윤이 병원에 있으려나?’

[모르…… 지금 그냥 전화 거는 겁니까? 당직 아니면 어쩌려고?]

‘아직 열 시도 안됐는데 설마 자겠어?’

[그거…….]

바루다는 그런 게 갑질이라는 말을 하려다 말았다.

별다른 생각이 떠올라서는 아니었다.

그저 상대가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아서였다.

“아! 선생님 오셨어요!”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심하다 싶을 정도로 반기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원래 같았으면 최고의 치프 이수혁과 함께하는 꿀 스케줄이어야 할 이번 달을 지옥처럼 보내고 있는 와중 아니던가.

수혁의 귀국은 그 지옥의 종말을 의미했다.

“어, 어어. 그동안 고생 많았지?”

“아……. 도저히 아니라고는 말씀 못 드리겠어요…….”

1년 차 레지던트가 하는 일 중 병동 환자 보는 일은 당연히 메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윤은 지금 누군가 그럼 그것만 하면 되냐고 한다면, 묻는 사람 싸대기라도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무리 힘든 스케줄을 돌고 있다고 해도 응급실 당직은 돌아가며 서야 했다.

또한 각종 컨퍼런스 등의 준비도 해야 했다.

동시에 4년제였던 것이 3년제가 되면서 벌써 논문 압박까지 들어오는 중이었다.

마치 사방에서 죽어라 하고 외치는 듯한 기분이 든다고 해야 할까?

‘예전엔 이거보다 더 힘들었다고 하던데.’

황당한 것은 이게 정말로 과거보다는 나아진 것이라는 점이었다.

지금은 그래도 병원들이 그토록 반대하던 전공의 특별법이라는 게 생겨서 주당 88시간 이상 일하지 못하게 두고 있지 않은가.

물론 법이 그럴 뿐 대부분 어느 정도 어기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그 비슷하게 맞추려는 노력은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덕분에 병원들은 저임금으로 끝도 없이 부리던 레지던트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호스피탈리스트(병동 전담의)를 비싼 값에 고용하고 있었다.

전원 전문의로 이루어진 병동 전담의들 덕에 레지던트 일이 얼마간 줄어들 수 있었다.

“그래……. 힘들었지.”

그래 봐야 힘든 건 매양 마찬가지라는 걸 잘 알기에 수혁은 우선 위로부터 해 주었다.

“이젠 좀 나을 거야.”

앞으로는 더 좋아질 거라는 희망도 주었다.

“근데 지금 병원이야?”

물론 본론은 그런 것들하고는 하등 관계가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 봐야 수혁은 환자 보는 일을 좋아하는 인간 아니던가.

원래도 그랬었냐고 하면 물음표가 들러붙겠으나, 바루다를 만나고 난 이후로는 정말로 그랬다.

진짜 잘하게 된 데다가, 원장부터 그 이하 교수들까지 나와 우르르 칭찬을 해 주고 있으니 그렇게 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아, 네. 선배님도 병원이세요?”

원래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 봐야 한다는 말이 있을 만큼, 수혁이 전화 건 의도가 뻔해지는 상황이었지만.

하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저 수혁의 도움만 받을 수 있다면 그걸로 어지간한 일은 무시할 수 있었다.

“어. 어디야? 환자 정리 좀 하자.”

“아, 아! 제가 갈게요. 당직실 아니세요?”

“아냐, 아냐. 음……. 11층으로 갈게. 혈종 병동으로.”

“아……. 네. 저 여기 있어요. 기다리고 있을까요?”

“그래? 그래, 그럼. 바로 갈게.”

“네, 선생님.”

그렇게 전화를 끊은 수혁을 바루다는 묘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늘 네가 연애할 기회는 없을 거라고 말은 했지만.

오늘처럼 강한 확신이 든 건 처음이었다.

세상에 아무리 친구 존에 들어간 지 오래라고 해도 간만에 하는 전화를 이렇게 삭막하게 끌어 나간다고?

바루다는 혹 자신이 수혁의 감정 체계를 건드린 건 아닌가 하는 걱정까지 들었다.

‘야, 환자 수치 데이터화 좀 해 봐. 가면서 고민 좀 하게.’

그에 반해 수혁은 전혀 하윤과의 통화에 의미를 두지 않는 모습이었다.

바루다는 그런 수혁을 보며 잠시 당황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겠는가.

지가 스스로 그런 삶을 살겠다는데.

애초에 그러길 원했던 바루다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네. 입원 이후 진행한 검사 모두 데이터화 진행했습니다. 영상 자료도 데이터화합니다.]

‘오케이. 이 정도면 뭐……. 됐어. 가자.’

해서 수혁은 가면서도 내내 환자에 대한 고민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결론은 역시나 축농증만으로는 현재 환자 상태가 설명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섣불리 다른 질환일 가능성을 떠올리는 것도 어려웠다.

우선 폐가 너무 깨끗했다.

발열의 가장 흔한 원인, 특히 면역 저하자들에게서 가장 흔한 원인이 되는 폐렴이 배제되었단 뜻이었다.

‘하윤이나 교수님이 축농증으로 확신하고 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네, 이렇게 보면.’

[그렇죠. 명확한 발열원이 있는데 꽝 나온 걸 굳이 다시 들춰 볼 이유는 없습니다. 게다가 이 환자는 매일 오전 흉부 엑스레이를 찍고 있어요. 전혀 변화가 없습니다.]

‘으음……. 그럼 너는 축농증 같아?’

[면역이 억제되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치료가 안 될 정도는 아닙니다. 저도 이 경과는 이상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럼 뭐 같아.’

[모르니까 우하윤에게 가는 거 아닙니까?]

‘되게 당당하네?’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할 수 있는 게 진짜 전문가의 태도라고 들었습니다.]

‘누구한테?’

[수혁이 자주 보는 유튜브에서 본 거 같은데요.]

‘이런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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