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화 공표 (3)
“왜 말을 못 하고 서 있어?”
김승규 교수는 이례적이게도 마스크까지 내린 채 눈을 부라렸다.
그때 회의실 안에 있던 전부는 깨달았다.
착한 사람이 화내면 더 무섭다는 말은 개소리라는 것을.
원래 무서운 사람이 화내면 진짜 무섭다는 것을 바로 눈앞에서 봤기 때문이었다.
“히끅.”
그냥 바라만 봐도 이런데, 마주하고 있는 사람은 어떻겠는가.
박상헌 교수는 뱀 앞에 선 개구리처럼 온몸이 바짝 얼어 버리고야 말았다.
[죽었나?]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고.’
바루다의 걱정이 괜한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비뇨기과답게 소변이라도 지린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때쯤에서야 제대로 된 말을 꺼낼 수 있었다.
물론 원래 하려던 말은 아니었을 터였다.
“아, 아뇨. 이의…… 이의 없습니다.”
불과 몇 초 만에 영혼까지 털린 얼굴이 되어 주저앉은 그를 김문재 교수가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떻게든 자신을 엿 먹인 수혁에게 뭔가 하고 싶었을 텐데, 그게 안 되게 생겼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유, 저 소인배 새끼.’
시야가 넓은 이현종은 그런 반응 하나하나까지 다 읽어 낼 수 있었다.
특히 김문재는 예의주시하고 있던 참이라 더더욱 그랬다.
두바이에서 수혁에게 쪽 당하고 왔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였다.
생각 같아서는 불러다 족치고 싶었지만.
‘안 그래도 특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물론 지금은 분위기가 좀 반전되기는 했더랬다.
꽤 많은 과에서 수혁을 두둔하고 나선 덕이었다.
심지어 이기자나 김승규같이 거물들이 나섰는데 누가 감히 앞에서 뭐라 하겠는가.
하지만 이 사건 하나만으로 다들 수긍하리라 믿는 것은 지나치게 순진한 생각이었다.
‘그럼 더 나가 보실까.’
이현종은 박상헌이 침몰한 이래 조용해진 회의실을 돌아보았다.
어느 누구도 김승규 교수와 눈이 마주치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정말이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이럴 때 밀어붙여야만 했다.
“자, 더 얘기 없으시면……. 넘어가죠. 통합진료센터에 대해 할 얘기가 아직 아주 많습니다.”
“네. 원장님.”
해서 입을 여니, 이수혁파에 속하는 이들이 열성적으로 답해 주었다.
그중에는 심지어 흉부외과도 있었다.
이현종과는 원수지만 수혁에게는 은혜를 입은 바 있지 않던가.
‘생각보다 괜찮은 친구야.’
이현종은 고마움의 표시로 티 안 나게 고개를 꾸벅해 보인 후 말을 이었다.
“우선 태화 바이오 사장으로 취임하신 김다현 사장님의 축사가 있겠습니다. 지금 너무 바쁘셔 가지고……. 녹화한 영상으로 대체하게 된 점 양해 바랍니다. 실제 센터 개소식 때에는 당연히 참석하실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리곤 마우스를 클릭해 영상을 틀었다.
사실 지금 공개할 이유가 없는 영상이었다.
아니, 찍은 이유가 없다고 하는 게 옳았다.
이현종이 말한 대로 사장은 개소식에나 오면 될 일 아닌가?
왜 열리지도 않은 센터에 축사를 한단 말인가.
‘아……. 이거 이미 위에서 다 짝짜꿍했구나.’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이 센터를 열기로 한 것이 이현종이나 이수혁이 아니라 김다현이라는 것.
현재 김다현의 위치는 태화 의료원이 속한 생태계 맨 꼭대기이니, 거의 왕명이라고 봐야 된다는 뜻이었다.
“야……. 이거 잘되겠는데요?”
그제야 중도층이 우르르 이쪽으로 몰렸다.
왕명인데 어쩌겠는가.
따라야지.
순식간에 반대편은 소수가 되었다.
심지어 아까 손 들고 질문해 댔던 이들 중에도 후회하는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뭐, 나는 뒤끝 없어. 앞으로 잘하면 돼. 얘는 모르겠는데.’
이현종은 잠시 수혁을 돌아본 후 발표를 이어 나갔다.
“다음은……. 야, 이건 저도 예상 못 했는데. 아랍에미리트 알 나지르 왕자의 축전입니다. 개인적으로 이수혁 선생에게 신세를 졌다고 하네요.”
다음 영상은 더 황당했다.
알 나지르 왕자가 어색한 한국어로 고맙다고 하더니만 이런저런 지원을 약속하고 있었다.
원래 센터에 있는 기구들 외에 초음파나 각종 기기들을 사 주겠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센터장과 부센터장이 쓸 집무 기기들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쯤 되니 반대파들은 설 자리가 없어진 셈이었다.
지금 태화 의료원이 태화 바이오 소속이 된 채, 두바이 측과의 협업을 중대 과업으로 삼고 있는 마당에 양측 수장이 모두 지지하고 나선 마당 아닌가.
여기서 반대하는 건 그냥 미친 사람이었다.
“음, 그래서……. 일단 내년 상반기 중에 센터를 개소하게 될 겁니다. 언론 노출이 그전에도 꾸준히 있을 예정이에요. 인터뷰 요청이 있을 수 있는데, 홍보팀에서 연락하면 성심성의껏 임해 주시고. 앞으로도 통합진료센터에 의견이 있는 사람 있으면 연락하고. 자, 이것으로 회의를 마치겠습니다.”
이현종은 그런 분위기를 기가 막히게 읽어 냈다.
덕분에 활짝 웃으며 회의를 끝마칠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토 다는 이는 없었다.
그저 축하한다고 인사해 오는 사람만 있을 뿐이었다.
“축하합니다, 원장님. 이수혁 선생…… 선생이라고 해도 되겠지, 아직은. 하하 축하해요.”
“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요, 지금처럼만 해 줘요.”
그렇게 한마디씩 하고 가는 바람에 인사하는데 시간이 엄청 걸렸다.
거의 회의하는 데 걸린 시간 만큼이나 걸린 느낌이 들 지경이었다.
“어휴, 큰 산 넘었다.”
신현태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같으면 지금 원장이 내년에 내려오고 센터장이 된다는 말이 나왔을 때, 제일 커다란 관심사는 그럼 다음 원장이 누구냐 아니었겠는가.
그런데 그 관심을 죄 부센터장인 수혁이 끌어간 셈이었다.
위에서 미는 차기 원장 신현태로서는 어부지리를 얻게 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네가 뭔 산을 넘었어.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해서 이현종은 그런 신현태를 구박했다.
그럼에도 신현태는 별반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그저 수혁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 뿐이었다.
“내가 중요한가. 수혁이가 산 넘은 게 중요하지. 이제 설마 대놓고 반대하는 놈이 나오진 않겠죠.”
“그렇지. 근데 그래서 더 문제일 수도 있어.”
“네?”
“생각해 봐. 병원에 어디 좋은 사람들만 있던?”
“음.”
병원이라는 곳은 아픈 사람을 고쳐 주는 곳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당연히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다 천사여야 할 거 같지만.
알고 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어떻게 저런 놈이 의사가 됐나 싶은 놈들도 있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예전에 쫓겨난 서효석이 그랬지 않은가.
인과응보라고, 지금은 이름 바꿔서 작은 병원 당직의가 됐다던데.
나쁜 놈이 그놈 하나뿐만은 아니어서, 지금 태화에도 꽤 많았다.
“그렇지는 않죠. 이상한 사람들도 많지.”
“그래. 특히 질투심 심한 놈들이야 너무 많다고. 다들 잘났잖아. 인정을 못 해.”
“흠. 그래서요?”
“이상한 협진이 올 수도 있어. 누가 봐도 함정 같은 거. 원래 지네 과 문젠데 헷갈릴 거 같은 거 있잖아. 그런 것들.”
“아……. 설마 그럴라고요.”
“넌…… 넌 인마 원장 될 놈이 그렇게 순진해서 어떻게 하려고 그래? 세상이 뭐 다 머리에 꽃밭 차린 사람들만 있는 줄 알아? 어떻게든 남 밟으려는 놈들투성이야. 권모술수도 배워야 해.”
“그런가…….”
이현종은 머리를 긁적이고 있는 신현태를 보며 고개를 털어 내고는, 수혁을 바라보았다.
‘봐, 얘는 벌써 대비하고 있는 얼굴이잖아.’
표정부터가 달랐다.
뭐라고 해야 할까.
각오가 됐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흐리멍덩한 신현태와는 차원이 달랐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협진?’
[네. 뭐 상관은 없겠죠.]
‘하긴, 상관은 없지.’
확실히 수혁은 이현종의 생각처럼 이미 거기까지 다 염두에 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니, 오히려 이현종보다 더 앞으로 나가 있었다.
통합진료센터 얘기를 들은 직후부터 공부 범위를 늘렸다, 이 말이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야 공부 그거 한 지 얼마나 됐다고 결과가 나오겠냐 하겠지만.
수혁은 바루다 덕에 막대한 양의 데이터화가 가능한 사람 아니던가.
만반의 준비라고 하면 좀 오버겠지만.
어느 정도 대응은 가능한 수준까지는 온 마당이었다.
“수혁아, 너는 내가 무슨 소리 하는지 알아먹겠지?”
“네, 물론이죠. 알죠.”
“그래, 나는 정말…… 네가 대견스러워. 저놈은 저거 나이만 먹었지…….”
“와……. 형. 내가 그래도 감염내과에서는 거두거든?”
“지 입으로 지가 거두래. 미친 거 아니냐, 저거. 자의식 과잉이야, 저놈 저거.”
“형도 맨날 자기 입으로 관상 동맥 조영술 거물이라고 하잖아!”
“난 진짜 월드 스타니까 그렇지. 학회 가면 인마 나라별로 줄 서서 사인 받아 가.”
“와…….”
정말이지 한 대 후려갈기고 싶다는 욕망이 들끓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없는 게, 일정 부분 사실이기도 했다.
확실히 이현종은 월드 스타였다.
그가 저술한 『임상에서 바로 써먹을 수 있는 관상 동맥 조영술의 A to Z』는 해당 필드에서만큼은 베스트셀러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기도 하지 않은가.
돈독이 올랐는지 매년 개정판을 내는데, 매년 사는 사람이 꽤 많을 정도였다.
“아무튼, 수혁아. 네가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대응하기 어려운 환자가 있으면……. 옳지. 그래, 여기 있는 놈들은 다 믿을 만해.”
이현종은 고뇌하는 신현태를 두고 다시 수혁과의 대화를 시작했다.
회의실 안에 남은 면면들을 체크하면서였는데, 과연 그의 말대로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은 죄 믿을 만한 사람들이긴 했다.
이현종, 신현태, 조태진에 홍창기.
이외에도 더 있었다.
“그리고 영상의학과 김진실하고……. 소아과 이기자. 여기까지는 괜찮아.”
“일반외과 김승규 교수님은요?”
“넌 그분 얼굴을 또 보고 싶니?”
“아……. 아뇨.”
“그래. 너 자꾸 그러다 나 처치실에서 만난다. 실제로 인마, 그런 사례가 있어서 하는 말이야.”
10년 전인가.
아직 김승규 교수가 50대이던 시절, 그러니까 지금보다도 더 무섭게 생겼던 시절에 있던 일이었다.
태화 의료원 지하 강당에서 하던 생체 간이식 관련 집담회에서, 하필이면 김승규 교수가 발표하던 시간에만 둘이 심장 마비로 응급실로 실려 갔더랬다.
다들 최선을 다해 우연이라고 말은 했지만,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김승규 교수가 원인 제공을 했다는 것 정도는 알아야 했다.
‘그 이후로 공식 석상에선 항상 마스크를 하고 있지.’
이현종은 어휴 하고는 재차 말을 이었다.
“아무튼, 너 혼자 대응이 되면 좋은데. 안 되도 걱정 말라고. 우리가 있으니까.”
“네, 아빠.”
“자, 그럼 됐네. 배고프지? 밥이나 먹자. 최근에 냉면에 파전 기가 막히게 하는 집 생겼더라. 배달도 돼.”
“오. 냉면에 파전.”
“역시 입맛도 닮았구만. 부전자전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냐.”
어려운 일이 예상되면 될수록 잘 먹어야 되지 않겠는가.
적어도 이현종은 그렇게 생각했다.
해서 수혁은 배 터지게 잘 먹고 당직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EMR를 켜고 협진 버튼을 눌렀는데, 과연 꽤 많은 협진이 와 있었다.
원래 혈액종양내과이니만큼 항암에 대한 문의가 많았으나, 딱히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들도 있었다.
‘벌써 시작인가?’
[뭐……. 보여 줘야죠. 실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