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화 이걸 빈혈로 내? (2)
수혁은 잠시 더 환자를 관찰하다가 입을 열었다.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친절해 보이는 미소를 지은 채였다.
바루다는 수혁이 이럴 때마다 가식적이라고 타박했었으나, 이제는 응원하고 있었다.
[조금 부족하군요. 입꼬리를 1%가량 더 당기겠습니다.]
아니, 오히려 돕고 있었다.
수혁이 이렇게 가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면 지을수록 환자들이 왜인지는 몰라도 더 협조적이 된다는 것을 학습한 덕이었다.
‘언제는 욕하더니?’
[수혁이 세계 최고의 의사가 될 수 있다면 무슨 짓인들 못 하겠습니까. 이해할 수는 없지만 데이터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따라야죠.]
‘좋은 자세야.’
바루다가 인간이었다면 거부감에 협조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바루다는 인간이 아니라 기계 아닌가.
통계적으로 명확하게 답이 있는 문제에 대해선 납득이 아주 빨랐다.
덕분에 수혁은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역겨워할 만큼이나 자애로워 보이는 미소와 함께 환자를 부를 수 있었다.
“할아버지, 처음 뵙겠습니다. 내과 이수혁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이게 특히 나이 든 사람에게 더 효과가 좋았다.
조금 슬픈 일이지만, 바루다는 아마도 나이 든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웃으며 다가가는 젊은 사람이 드물어서일 거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하여간 이 환자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이미 호감을 보이고 있군요. 딱히 수혁을 알아본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내가 이 미소 지으면 여자들한테도 인기 많아지는 거 아닐까?’
[상처 되는 말을 듣고 싶은 겁니까? 굳이?]
‘아니, 답하지 마.’
[이따 환자 보고 나면 심층 보고서 제출하겠습니다.]
‘하지 말라고.’
수혁은 금세 라포를 쌓은 채, 동시에 바루다의 방해를 애써 무시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할아버지, 혈뇨를 보셔서 오신 거죠? 붉은 피 섞인 소변이요.”
“아……. 그게…….”
“차트에 그렇게 적혀 있어서 여쭤본 건데, 아닌가요?”
“그건 아닌데…….”
“그럼 정확히 어떻게 불편해서 오신 거예요?”
“너무 힘들어서. 몸이…… 너무 힘들어.”
“음.”
힘들다라.
이것만큼 의사 골 때리게 만드는 증상이 또 있을까 싶었다.
비슷한 증상으로는 어지럽다, 가슴이 답답하다 등이 있는데 하나같이 원인이 너무 많을 수 있는 증상들이었다.
그중에서도 힘들다는 발군이었다.
[혈뇨는 원인이고 힘들다가 결과일까요?]
‘반드시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지. 환자 몸 좀 봐라. 이렇게 말랐는데……. 혈뇨 전에도 힘들긴 했을걸?’
[그렇다면 혈뇨 또한 어떤 원인 질환에 의한 결과겠군요. 이렇게 마른 것과 같은 원인일까요?]
‘그거야 알 수 없지. 음.’
그나마 다행인 점은 지금 수혁은 환자를 처음 만나는 게 아니란 것이었다.
얼굴 보는 거야 당연히 처음이었지만, 차트를 통해 상당히 심도 있는 만남을 가진 바 있지 않은가.
덕분에 이런저런 추론이 가능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힘들었나요? 이번에 그런 건가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기본적인 질문을 생략할 수 있다는 건 아니었다.
차트란 것도 결국엔 어떤 의료진이 기록한 결과물일 뿐 아닌가.
대부분 열심히 하긴 하겠지만.
개판 치는 놈들도 있기 마련이었다.
심지어 열심히 했는데도 미흡할 수 있었다.
의료진의 실력 때문이 아니라 환자 때문이었다.
“음……. 일단…… 한두 달 전부터 유독 힘들긴 했는데…….”
“그전에도 힘들었나요?”
“응. 좀 됐어. 그건.”
환자들은 말 그대로 아픈 사람들이지 않은가.
다시 말하면 병을 갖게 된 일반인이란 뜻이었다.
절대 의학에 대한 전문가는 아니었다.
때문에 자신의 증상이나 상태에 대해 처음부터 완벽하게 진술할 수가 없었다.
연습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는데, 병원에서 환자분 오늘부터 연습합시다 이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그냥 같은 질문을 사람 바꿔 가면서 반복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 병원은 왜 같은 질문을 계속해! 니들끼리 얘기 안 하냐!’
이런 불만을 품을 이유는 없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반복되는 질문에 답하면 답할수록 진술이 자세해지고, 거기서 얻은 정보를 토대로 더욱 정확한 진료를 할 수 있었다.
수혁은 그런 생각으로 이미 차트에 있던 질문을 반복하고 있었다.
“좀 됐다는 게 얼마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음…….”
효과는 벌써 있었다.
차트에는 그저 두 달 전부터 피로했다고만 적혀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 전부터 힘들었다고 하지 않는가.
사실 환자 전신 상태만 봐도 유추가 가능했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원래 내과 의사의 추론 방식과 마이너 서저리의 추론 방식은 조금 다른 법이었다.
“한 2년?”
“2년?”
그런데 시간이 좀 길었다.
[지금 증상하고 연관이 있겠습니까? 2년은 너무 긴데요?]
‘그래도 일단 물어본 거 계속해 봐야지.’
[그건 그렇습니다. 어떤 정보든 수집하는 게 좋겠죠.]
꽝이란 생각이 강하게 들었지만.
수혁은 우선 더 깊이 캐묻기 시작했다.
“2년 전부터 힘들었다면, 정확히 어떤 식으로 힘드셨나요? 기운이 없었나요? 아니면 통증이 있었나요?”
힘들었다는 증상이 어려운 게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너무 범위가 넓은 단어였다.
내포하고 있는 뜻이 한두 가지가 아니란 뜻이었다.
마음이 힘든 것도 힘든 것이고, 일이 많은 것도 힘든 것이지 않은가.
수혁은 여기서 대충 정리되기를 바라며 환자를 바라보았다.
환자는 즉각 답하는 대신 잠시 눈을 감았다.
“기운이…… 없었지.”
그리고 대략 1분 정도 있다가 답을 해 왔다.
동시에 구강이 건조할 때 주로 나는 형태의 입 냄새가 풍겨 왔다.
[염증이 있지는 않습니다만, 지독하네요. 오래된 냄새 같은데.]
‘몸 상태가 안 좋아지면 이럴 수 있지.’
일반인이었다면 양치 좀 하지 하고 말겠지만.
수혁은 의사이지 않은가.
심지어 바루다를 탑재하고 있는 의사이기에 입 냄새조차도 하나의 정보로 기록할 수 있었다.
“기운이 없다는 게 움직이기 힘들다는 건가요?”
“그렇지. 통 뭘 못 먹었어.”
“못 먹어요? 식욕이 없으셨나요?”
“아니, 소화가 되질 않아서.”
“소화라.”
늙으면 소화 기능도 좀 떨어지는 법이었다.
10대, 20대의 뷔페 가성비와 30대 이상에서의 뷔페 가성비만 따져 봐도 쉽게 이해가 갈 터였다.
하지만 의사라면 모든 증상을 노화와 연관 지어서는 절대로 안 되는 법이었다.
아닐 거 같아도 질환이랑 연결을 지어 보아야만 했다.
“혹시 그 때문에 내시경을 받아 보신 적이 있나요?”
“있기는 한데……. 그 뭐…… 암이 있었잖아요. 그거 검진하면서 겸사겸사.”
“아, 네. 내시경도 하셨구나.”
수혁은 아까 영상만 보고 온 것을 후회했다.
바루다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녀석은 그저 후회만 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일단 영상을 차례로 띄워서 비교 분석을 해 주었다.
딱히 달라진 것은 없어 보였다.
계속 깨끗했다.
암이 재발한 것은 아니다, 뭐 이런 뜻이었다.
“잠시만요. 내시경 좀 볼게요.”
“네네. 그러세요.”
수혁은 잠시 양해를 구하고 스테이션으로 돌아와 환자의 내시경 소견을 들여다보았다.
일흔이 넘은 노인치고는 상당히 깨끗했다.
특히 위 쪽은 어지간한 40대보다 나았다.
[소식을 해서 그런가? 점막이 깨끗하네요.]
‘대장은…… 대장도 괜찮네. 응? 잠깐만.’
[왜 그러시죠?]
‘여기 이 컷 좀 봐. 말단 회장(Terminal ileum).’
[응? 아……. 조금 좁아진 부분이 있네요?]
‘생각해 보니까 수술을 했잖아. 그것도 열어서. 장 유착이 있는 모양인데?’
[충분히 가능성 있는 추론입니다. 장 유착이 심한 경우 소화 불량을 일으킬 수 있죠. 만성화될 경우, 지금 환자처럼 암액질까지는 아니더라도 심각한 근손실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게 딱히 혈뇨랑 관계가 있어 보이진 않는데. 데이터는 어때?’
[보고된 바는 없습니다.]
‘음.’
오래된 피로에 대한 궁금증은 해결된 참이었지만.
지금 있는 증상에 대해서는 아직 오리무중인 셈이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원래 의학은 시행착오를 겪어 가며 발전하는 법이지 않은가.
크게 봐서도 그렇고 작게 봐서도 그랬다.
“장 유착이 좀 있으시네요. 이건…… 이번에 치료가 되시고 나면 간단한 수술로도 해결이 어느 정도는 되실 거예요.”
“참말입니까? 이게 치료가 된다고?”
“네. 하지만 우선 혈뇨부터 원인을 알아내야죠.”
“그게…… 그렇겠지. 음.”
환자는 기뻐하다가 이내 침울해졌다.
지금 입원한 것이 잘못 먹어서가 아니라, 소변에 피가 섞여 나와서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자연스레 눈이 소변줄에 닿을 수밖에 없었다.
수혁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환자의 소변백을 바라보았다.
[빨갛네요.]
‘대충 봐도 피의 양이 적어 보이지가 않는데…….’
[그러니까요. 거의 무슨 코피 나는 사람 색깔 같네요.]
‘코피라…….’
수혁은 얼마 전 응급실에서 봤던 코피 환자를 떠올렸다.
직접 진료하던 환자는 아니어서 자세히 보진 않았지만.
하여간 진료 보는 의사도, 피 흘리는 환자도 고통스러워 보였다.
‘잠깐…….’
회상하다 보니 문득 바루다가 그냥 꺼낸 소린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거 그냥 느낌이야? 아니면 데이터에 기반한 말이야?’
[네?]
‘데이터로 분석해도 코피랑 비슷하냐고.’
[아, 분석은 안 해 봤는데.]
‘뭔 놈의 인공지능이 이래? 분석해 봐.’
[왜요?]
‘아 좀 하라면 해 봐.’
[알겠습니다.]
바루다는 별일이라는 얼굴로 분석에 착수했다.
그사이 수혁은 환자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더 해보았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차트에 쓰인 그대로의 답변이거나, 혹 더 해 주더라도 딱히 지금 증상과는 상관이 없어 보인단 뜻이었다.
[분석했습니다.]
그렇게 시간 죽이기 비슷한 대화를 하고 있으려니, 바루다가 말을 걸어왔다.
조금은 의아하다는 얼굴을 한 채였다.
이 녀석이 이럴 땐 뭔가 있다는 뜻이지 않은가.
해서 수혁은 환자와의 대화 양상을 더욱더 일상적인 방향으로 틀어 낸 후, 대부분의 신경을 바루다에게로 집중시켰다.
‘어때?’
[대량 20% 이상은 혈액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 정도 색이 나오려면 그렇습니다.]
‘20%? 그건…….’
[출혈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신장에서 걸러져서 나오는 정도로는 절대 이 정도의 양이 나올 수 없습니다.]
‘흐음.’
이 나이에는 어떤 부위가 됐건 피가 난다면 일단 암을 떠올려야만 했다.
서글프게 들리겠지만 사실이 그랬다.
같은 증상이더라도 나이가 어릴 땐 선천성 질환을, 나이가 들어서는 암 등의 종양을 떠올려야 하는 게 의학이었다.
수학처럼 모든 것에 적용 가능한 법칙이 있는 게 아니라, 통계의 집합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방금 리뷰한 영상에서 암 비슷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해서 수혁도 바루다도 멍한 얼굴이 되었다.
[뭘까요?]
먼저 입을 연 것은 바루다였다.
딱히 도움이 되는 말은 아니었다.
그저 성질을 돋울 뿐이었다.
‘그걸 네가 물어보면 어떡해?’
[평소라면 제가 답을 주지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는 수혁의 상상력이 힘을 발하지 않습니까?]
‘묘하게 기분이 나빠지는데?’
[아뇨, 답을 찾아낸다는 뜻인데요? 속담도 있던데.]
‘뭔 속담.’
[소 뒷걸음질 치다가 개구리 잡는다?]
‘이 미친놈이.’
[하여간 뭐 같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