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323화 (323/1,303)

323화 협진을 냈으면 인마 (5)

살인자.

또는 살인범.

이만큼 의사에게 모욕적인 언사가 있을까.

이 자리에서 가장 오래 의사 노릇 해 온 이하언 교수야말로 가장 잘 아는 사실이었다.

“쯔쯔…….”

그런데도 이런 말을 했다는 건, 명백한 비난이었다.

왜 정당한 의견을 무시했냐고 하는.

또 원장을 비롯한 태화 의료원의 기둥들이 내린 결정을 무시했냐는 뜻이기도 했다.

설마하니 태화라는 이름값을 등에 짊어진 사람들이 사사로이 결정을 내리겠는가.

그들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냉혹한 검증을 거쳤을 터였다.

그 모든 것들을 무시해서 더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면 모르겠지만, 박상헌은 지금 환자 하나를 죽일 뻔한 참이었다.

‘와……. 못하는 말이 없네. 이 양반도 결국, 원장 라인인가.’

하지만 박상헌은 여전히 삐딱하기만 했다.

애초에 그릇이 작은 탓이었다.

“왜 답이 없어? 지금 바로 수술방 연락해야 할 거 아냐.”

“아. 네네.”

하지만 그렇다고 또 이하언 앞에서 대놓고 대들 만큼 담이 큰 것도 아니었다.

박상헌은 이하언의 으름장이 있자마자 고개를 끄덕이고는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이하언 교수는 박상헌이 수술실과 통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자신도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수신인은 혈관외과 김선근 교수였다.

“아, 교수님.”

외과는 어찌 되었건 영상의학과와 긴밀할 수밖에 없는 과였다.

아무리 임상 경험이 쌓이더라도, 영상 정보가 없이 무턱대고 배를 여는 건 무식한 짓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분초를 다투는 외상 외과라면 얘기가 조금 다르겠지만.

그쪽에서도 환자에게 시간이 있는 상황에서는 거의 무조건 영상 검사를 하고 의견을 물어 왔다.

주로 대동맥류 또는 박리 등을 다루는 김선근 교수에게 영상의학과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었다.

“어, 김 교수. 지금 시간 있나? 내가 알기로 연구 시간인데.”

그래서 그런가 이하언 교수의 전화 받는 태도가 정중하다 못해 공손할 지경이었다.

아무리 선후배 사이라 해도 지나친 감이 있었다.

하지만 이하언은 그게 당연한 것이라는 양 대화를 이어 나갔다.

“네? 아유, 시간 있죠. 교수님, 무슨 일 있으세요?”

“나한테 별일이 생긴 건 아니고……. 김 교수 장골 동맥-요관 교통 환자 본 적 있나? 전에 내가 한번 판독해 준 기억이 있는데……. 그거 집도의가 김 교수였는지 이 교수였는지 기억이 안 나네.”

“아……. 그거 저는 아닙니다. 집담회에서 이 교수가 발표했었습니다. 희귀 케이스로요.”

“그거 할 수 있겠어?”

“아……. 지금 환자가 뜬 겁니까?”

“어. 비뇨기과에 혈뇨로 입원했는데……. 지금 영상 검사해 보니까 그거야. 드문 질환인데 올해 이상하네. 내 평생 두 번 보는데 그게 다 올해야.”

이하언 교수는 이제 62세.

석좌 교수로 임용되지는 않았으니 정년이 겨우 3년밖에 남지 않은, 노회한 의사였다.

게다가 어지간한 병원에 있던 것도 아니고 국내에서 가장 환자가 많은 태화 의료원의 교수이지 않은가.

단순히 환자 수만 많은 게 아니라 태화 의료원은 오랜 기간 대학 병원으로서의 역할을 해 온 바 있었다.

어려운 케이스가 몰린단 뜻이었다.

그럼에도 딱 둘밖에 보지 못했다는 건 정말이지 엄청나게 드문 질환이라는 얘기가 되었다.

“저야 좋죠. 희귀한 질환 보는 게 흔한 일도 아니고……. 안 그래도 이 교수님이 역시 급할 때 생각나는 건 자기라고 떠들어 내는 통에 빈정도 상했습니다.”

“오케이. 그럼 수술 가능한 거지?”

“네. 교수님.”

“그래, 잠시만.”

원래 협진 수술이라는 게 이렇게 쉽게 결정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일단 대학 병원 교수들이라는 사람들이란 톱니바퀴 돌아가는 듯한 스케줄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 아닌가.

외래나 수술이 없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학회 일이라든지, 연구라든지 아니면 집담회든지.

무조건 뭐가 있기 마련이었다.

‘와……. 그냥 막 한다고 하네. 하긴 이하언 교수님이 높긴 하지…….’

하지만 누구 말인데 거기서 안 된다는 말을 꺼낼 수 있단 말인가.

김선근 교수는 다른 사람에게 아쉬운 소리 좀 하자는 생각으로 수술을 승낙한 참이었다.

박상헌으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그냥 비뇨기 수술이라면야 혼자서도 가능하겠지만.

장골 동맥은 복부 대동맥에서 이어지는 분지 같은 것도 아니고 그냥 좌우로 나뉘어서 내려가는 거대한 동맥이었다.

그런 동맥을 혈관 외과적인 수련도 없이 함부로 다룰 수는 없었다.

“수술방 어디로 잡았지?”

“본관 12번입니다.”

“어, 김 교수. 들었지? 12번이래.”

“아, 네. 내려가겠습니다.”

“아니, 아니. 방에서 연락 가면 내려가. 어차피 열고 접근하는 건 여기 박상헌 교수가 할 거야. 비뇨기 계통인 데다가, 이전에 수술을 했을 거 아냐. 그냥 들어가다가는 사고 치지.”

“아……. 네네. 그렇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해서 박상헌은 곧장 수술실 위치를 말해 주었다.

이하언은 그걸 김선근에게 전달했다.

그렇게 협진 수술이 성사되었다.

위에서 찍어 누르듯 만든 결과물인데, 다행히 비뇨기과도 혈관외과도 만족했다.

한쪽은 까다로우면서 위험한 술기를 넘길 수 있어 좋았고, 한쪽은 실로 보기 드문 질환을 다룰 수 있게 되어 좋았다.

“음. 일단 됐고.”

이하언 교수는 수술까지 결정된 후에야 한시름 놓았단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수혁을 돌아보았다.

따지고 보면 이 녀석이 이 모든 것을 진두지휘한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냥 의심만 한 게 아니라……. 검사까지 했지. 그건 어지간한 뚝심으로는 어려운 일이야. 뭐? 우리 아들이 심약해? 정말 웃기는 양반이라니까…….’

교수가 내 환자라고, 건들지 말라고 했는데 그냥 냅다 검사를 추진할 줄이야.

이제 보니 실력만 있는 게 아니라 강단도 있는 친구였다.

“이수혁 선생. 이 환자……. 무슨 생각으로 이 검사를 한 거지?”

마음에 들었다.

해서 웃는 얼굴을 한 채 물었다.

그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박상헌이 인상을 썼지만, 아주 잠시뿐이었다.

누누이 말하지만, 소인배는 강자 앞에서만큼은 약한 모습만 보일 수 있었다.

“아……. 네. 혈뇨의 양상이 좀 이상했습니다. 신장이나 그 위에서 기원했기보다는 요관 자체에서 발생한 양상이었습니다.”

“뭐로 의심한 거지?”

“혈뇨에 포함된 혈액의 양입니다. 만약 그만한 출혈이 신장 전에 있었다면 신장 기능이 나빠졌을 겁니다. 그만큼 급격한 유실이 있었습니다.”

“아하. 그래서 이 검사를 했구만.”

“네. CT상에서는 별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그 또한 요관 내의 출혈이라면 얼마든지 그렇게 보일 수 있을 거 같았습니다.”

“그래, 합리적인 추론이야. 근데 그렇게 의견서를 전달했더니……. 여기 박 교수가 거절했구만?”

박상헌은 슬슬 분위기가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은근슬쩍 문 가까이로 가고 있던 중이었다.

하지만 눈치 빠른 이하언이 문을 가로막았기 때문에 몰래 도망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

“어딜 가.”

“수술…… 수술 때문에요.”

“내가 영상이라고 수술 아예 모르는 줄 알지? 간이식 뜨면 아직도 수술방 들어가서 직접 혈관 확인해주고 있어. 이제 막 방 정리하고 있을 텐데 뭘 가. 저기 환자도 아직 있는데.”

“음.”

게다가 수술 드립도 통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이하언은 수술실 돌아가는 것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대답이나 해. 아까 그 의견을 거절한 거지?”

“그…….”

“정확히 어떤 검사를 하자고 했는데 거절했지?”

이하언은 냉막한 얼굴에 다시 미소를 띤 채 수혁을 돌아보았다.

온도 차가 어찌나 심한지 박상헌이 유리병이었으면 지금쯤 깨졌을 거 같았다.

“혈관조영도와 배설요도 조영술 및 요관조영술 입니다.”

“아주 합리적이네? 근데 왜 거절했지? 이유가 있나?”

이하언은 다시 박상헌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 웃은 적이 있냐는 듯, 차가운 얼굴을 하고서였다.

박상헌으로서는 딱히 할 말을 찾기 어려웠다.

‘건방져서…… 건방져서 그랬지.’

이따위 말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과학자여야 할 의사로서 댈 수 있는 근거가 아니었다.

아니, 어떤 사람도 이런 근거를 대서는 안 되었다.

최근 문제 되고 있는 갑질 그 자체였으니까.

“대답하긴 해야 할 거야. 지금은 나 혼자 듣고 있지만, 다음엔 아닐 거니까.”

해서 입을 꾹 다물고, 어서 이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으려니 이하언이 말을 이었다.

“네?”

다음엔 아닐 거라니.

이게 대체 뭔 소리란 말인가.

심상찮은 느낌에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장골 동맥-요관 교통. 이거 정말 드문 질환이야. 게다가 저번에 혈관 외과에서 수술한 환자는 다른 병원에서 이미 이 질환을 의심하고 전원을 온 거지만, 이 환자는 우리 병원 환자잖아. 전형적이기도 하고. 이런 거 집담회에 내야지 뭘 해.”

“아니……. 그럼…….”

“이 질문 안 나올 거 같아? 왜 협진 의견서대로 하지 않았냐고, 안 물어볼 거 같아?”

“그…….”

“아, 지금 환자 올라가네. 가 봐. 잘 생각해 보고. 내 앞에서야 뭐 이럴 수도 있는데. 수백 명 앞에서 이러면 망신이지. 그렇겠지?”

“어…….”

박상헌은 마치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삐걱거렸다.

이하언은 그런 박상헌 보는 게 짜증스러웠는지 슥 옆으로 비켜선 후, 밖으로 냅다 밀어 버렸다.

“저 화상.”

이하언은 그렇게 비척거리며 사라져가는 박상헌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문을 닫았다.

그리곤 수혁과 김진실 교수를 바라보았다.

“이번에 병원 집담회 있지? 거기에 이거 올려 버려.”

아주 단호한 표정을 하고서였다.

동시에 김진실 교수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오늘 박상헌 교수가 보여 준 모습은 물론 좀 짜증 나는 게 맞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병원 집담회에 올려서 조리돌림을 하자니.

‘태화 의료원 집담회는…… 녹화까지 하잖아.’

그냥 녹화만 하는 게 아니라 병원 유튜브에 올리기까지 했다.

홍보 팀에서야 우리 병원이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하고 어필하는 것이지만.

올라가는 발표자 입장에서는 절대 그렇지가 못했다.

흑역사라고 해야 할까.

“뭘 그런 얼굴을 하고 있어. 아까 내가 얘기했잖아. 이거 진짜 중요한 케이스가 다른 목적이 있어서는 아냐.”

이하언은 그런 김진실을 보며 허허 웃었다.

하지만 김진실은 이하언이 이런 사람이 아니란 것을 너무도 잘 알았다.

이현종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히 짓궂은 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 있으시잖아요. 다른 목적.”

“사실 있지. 괘씸한 놈이. 감히 누가 내린 결정인 줄 알고 반항을 해?”

이하언은 싱거우리만치 쉽게 인정하고는 인상을 썼다.

“김 교수. 아니, 진실아. 여기 이수혁 선생이 하고자 하는 통합의료센터 말야. 이거 원내에서만 하는 얘기가 아냐. 더 큰 그림 그리고 있다고. 지금 재 뿌리는 놈들이 미친놈이야.”

“큰 그림이요?”

“자세한 얘기는 뭐 회의에서 하도록 하고. 이번 기회에 본보기를 보여야지. 올려, 이거.”

“알겠어요. 그래도…… 너무 까지는 마세요. 교수예요, 박상헌 교수.”

“누가 모르나. 그리고 나는 나설 기회도 없을걸.”

“무슨…….”

“원장님 올 거 아냐.”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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