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325화 (325/1,303)

325화 집담회 (2)

“뭐 하세요?”

홍창기가 다시금 박상헌 교수를 향해 물었다.

박상헌은 여전히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분명히 파일 자체는 아주 잘 만들어진 녀석이었다.

심지어 박상헌은 누가 뭐래도 이 환자의 지정의이지 않은가.

협진 내놓고 무시할 때야 올바르지 않은 처신을 했지만, 그 후로는 어찌 되었건 환자를 제대로 본 바 있었다.

지금은 무사히 퇴원도 했고.

‘그냥 읽으면 발표는 가능하겠지만…….’

문제는 환자를 잘 알고 있고, 또 이 파일이 잘 만들어져 있다는 게 딱히 박상헌에게 좋은 일이 아니란 점이었다.

오히려 악재였다.

‘이걸…… 이걸 대체 누가…….’

어떤 개새끼가 있어 농간을 부린 게 분명했다.

과연 누굴까?

지금 보니 딱히 고민할 이유도 없어 보였다.

저 앞에 앉은 다섯 중 하나이거나, 일부이거나 전부일 것이 뻔했다.

뭐가 되었건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수혁은 어떻게든 끼어 있을 거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표정을 짓고 있을 수가 없었다.

“박 교수님? 어디 아프세요?”

또 뒤에서 히죽거리고 있는 홍창기도 공범일 것이 뻔했다.

정말이지 생각 같아서는 지금 들고 있는 마이크로 머리통을 후려치고 싶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정말 그랬다간 병원에서 내쫓길 게 뻔했다.

아무리 교수가 철밥통이라고 하지만 일단 태화 의료원은 기업 병원이지 않은가.

대학 병원하고는 분위기가 다를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너무 실적이 떨어지거나 수술 후 합병증이 잦은 사람은 지방 분원이나 아예 밖으로 내쳐지기도 했다.

“아니, 아닙니다. 음. 잠시만……. 이게…… 이 파일이…….”

“파일이 뭐요? 환자 이 환자 아닙니까? 맞는 거 같은데.”

“맞는데…….”

“지정의 선생님께서 맞다고 하시면 맞는 거겠죠. 발표에는 문제가 없을 거 같은데……. 아닙니까?”

“그…….”

환자는 맞는데 내가 준비한 게 아니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누가 봐도 방금 전까지 자신이 발표하고 있던 것보다는 잘 만들기도 했거니와 케이스 집담회의 성격에 더 잘 맞기도 해서였다.

꼼수 부려서, 그냥 좀 멍청하게 보이는 것 정도로 집담회를 막으려다가 날벼락을 맞게 된 셈이라 할 수 있었다.

‘이 뒤에 뭔 내용이 있을까?’

해서 그냥 해 보려고 하니, 이제 뒤 내용이 더 걱정이었다.

지금 뜬 화면에 있는 건 딱 협진 내기 직전의 환자 상태이지 않은가.

아무래도 이 다음 장에 협진 내용이 뜰 거 같았다.

그걸 만천하에 공개하게 된다면 그걸로 끝이었다.

‘뭉갤까? 배가 아프다고 할까?’

걱정된 마음에 우물쭈물하고 있으려니, 홍창기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마우스를 클릭했다.

그러자 다음 화면이 떴다.

우려했던 대로 협진 낸 내용이었다.

“어…….”

일단 화면이 넘어왔으니 뭐라도 말을 해야 할 텐데.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지 않은가.

가만히 있으려니, 누군가 손을 들었다.

이수혁이었다.

“여깄습니다.”

“감사합니다.”

맨 앞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근처에 있던 인턴이 마이크를 건네주기도 수월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수혁에게 마이크를 주려고 그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었을 수도 있었다.

위에서야 수혁에 대한 의견이 갈리지만 후배들에게 수혁은 그저 영웅이지 않은가.

만약 수혁을 존경하지 않는다는 인턴이나 학생이 있다면 녀석이 못나서이지, 수혁의 잘못은 없을 거라는 것이 중론이었다.

수혁의 인성이 최고가 아니란 것 정도는 유명해진 마당임에도 그랬다.

오로지 실력 하나로 유독 선후배 관계가 빡빡하기로 소문난 의료계를 찢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존경심을 유발하기엔 충분했다.

“사실 박 교수님께서 오늘 컨디션이 좀 좋지 않으시다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느끼셨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발표해 주신 박상헌 교수님께 먼저 박수 부탁드립니다.”

그 후배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이수혁은 마이크를 건네받고 일어서자마자 일단 펀치부터 날렸다.

상당히 조리가 있는 내용이었는 데다가, 듣기에 그럴싸했기에 대부분 박수를 보내 주었다.

박상헌은 가만히 서 있다가 졸지에 아픈 사람이 된 셈이었다.

그럼에도 속으로는 조금 잘된 일인가 싶기도 했다.

아무튼, 아픈 핑계로 여기서 내려갈 수 있지 않은가.

“어, 그럼 의자 갖다 드려.”

그런 생각으로 천천히 물러나려고 하자, 이현종이 잽싸게 명을 내렸다.

하필이면 앞에 있던 인턴이 빠릿빠릿한 편이라 명은 즉시 이행되었다.

녀석은 단상 한참 뒤에 놓여 있던 의자를 땀까지 뻘뻘 흘려 가며 들고 뛰어왔다.

“교수님, 여기 앉으십쇼!”

이렇게 해 대는데 거절할 수 있겠는가.

그랬다간 인성 파탄 났다는 소문이 돌 터였다.

이미 보직 받기엔 텄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태화 그룹 성격상 조금 무능한 것은 참아도 인성 문제는 그냥 두지 않을 게 뻔했다.

때문에 박상헌은 그야말로 똥 씹은 얼굴이 되어 마지못해 의자에 앉았다.

“고, 고맙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 가면서였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

딱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옆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뭔 소린가 해서 고개를 돌려 보니, 무려 이하언 교수와 이현종 교수의 부축을 받고 올라온 수혁이 서 있었다.

아예 대신 발표를 할 생각인 듯했다.

‘안 돼……. 지금이라도…… 지금이라도 내려…….’

이를테면 공개 처형 시간이 도래한 셈이었다.

하지만 도망칠 틈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박 교수, 몸도 안 좋은데 어딜 가. 이따가 발표 끝나면 내가 부축해 줌세.”

이현종이 어느새 그의 손을 붙잡고 흔들어 대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석좌 교수 될 나이, 그러니까 노인인 데 반해 힘은 어찌나 좋은지.

박상헌으로서는 도저히 떨쳐 낼 방법을 찾기 어려웠다.

“자, 이 환자는 여기 보시는 바와 같이 혈뇨 그리고 빈혈이 있습니다. 혈액종양내과에 협진을 낸 이유는……. 혈뇨보다는 아무래도 빈혈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혈뇨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빈혈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기에 합리적인 판단이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이수혁은 낙담한 얼굴의 박상헌을 웃는 낯으로 바라보며 발표를 이어 나갔다.

내용이야 말할 것도 없이 훌륭했고, 목소리 톤, 말하는 속도까지 모두 박상헌보다 훨씬 우위에 있었다.

모든 청중이 수혁에게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좋아요. 거의 보정할 게 없어.]

애초에 수혁의 재능이 이렇게 말하는 데 집중되어 있기도 하거니와, 조금 실수하거나 미흡한 부분은 바루다가 잡아 주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우선 저는 차트 리뷰를 하고…….”

수혁은 다음 화면으로 넘기면서 계속 말을 이어 갔다.

환자에 대한 병력이 주르륵 떠 있었는데, 그중 신경 써야 할 만한 부분에 하이라이트가 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수술받은 시기 및 종류, 방사선 치료 그리고 환자의 체중 등등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이라이트만 해 주었을 뿐, 여기서 당장 말하지는 않았다.

“환자에게로 갔습니다. 당시 환자는 키가 171인데 반해 몸무게가 45kg 정도로 엄청나게 말라 있었습니다. 여쭤보니 수술 후 대략 1년에서 2년이 지난 후부터 식사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곤 얼굴이 가려진 환자 사진이 떴다.

누가 봐도 암 환자나 혹은 다른 만성 환자를 떠올릴 만큼 말라 있었다.

당연히 사람들은 혈뇨 자체보다는 빈혈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기껏해야 한두 달 상간에 발생한 혈뇨가 사람을 저렇게까지 망가뜨릴 수는 없어 보여서였다.

수혁은 자신이 정확히 의도한 바대로 따라오는 청중을 보며 말을 이었다.

어찌나 자연스럽고 물 흐르듯 발표가 이어지는지 강제로 발표자에서 떠밀려 내려온 박상헌마저 잠시 넋을 잃었을 지경이었다.

‘이런 망할. 이럴 때가 아닌데?’

그래 봐야 곧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정신을 차린다고 해서 뚜렷한 방도가 있는 건 아니었다.

도리어 또렷해진 정신으로 당하게 될 뿐이었다.

“환자의 몸 상태와 진술에 따라 우선 빈혈에 집중했습니다. 혈액검사 결과부터 리뷰 했는데, 우선 안에서 적혈구가 파괴되고 있을 확률은 적어 보였습니다. 다만 실혈이 있는 것은 확실했습니다. 환자의 망상 적혈구가 크게 증가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디서 실혈이 있는 걸까요?”

수혁은 적당한 제스처와 함께 질문을 던졌다.

한국인들은 원래 질문에 답변하지 않는 편이었고, 그중에서도 특히 의사들은 더더욱 그런 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그랬다.

어차피 소리 내 답하지 않을 뿐, 머리는 맹렬히 굴릴 거라는 것까지도 알아서였다.

[눈알 굴러가는 것 좀 보십쇼.]

‘김문재 교수는 확실히 우리 반대편인데도 그러네.’

[본능이죠. 그 옆에 신장내과 전병세 교수도 좀 보십시오. 둘이 비슷하게 생겨 가지고 아주 난리가 났어요.]

‘그래 봐야 이걸 바로 떠올리기는 어려울걸.’

[워낙에 드문 경우니까요.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그게 대단한 겁니다.]

청중들은 누가 지기 싫어하는 사람들 아니랄까 봐 말없이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중 몇몇은 속삭이면서 토의에 들어가기도 했는데, 그 누구도 답안에 비슷하게나마 다가가지는 못했다.

수혁은 그렇게 대강 3분가량을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을 겁니다. 환자의 나이를 고려하면 우선 대장암 또는 위암과 같은 암에 의한 위장관 출혈을 의심할 수 있겠죠. 실제로 아까 보여 드렸던 환자의 전신 상태를 보면 암을 떠올리기가 쉽겠죠. 게다가 이 환자는 이미 전립선암으로 치료받은 병력이 있습니다. 전립선암이 전이의 형태로 재발했을 수도 있고, 또 한 번 암에 걸린 환자는 아무래도 2차 암에 취약하기도 합니다.”

암 얘기를 하자 여기저기서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그게 수혁이 파 놓은 논리적 함정인 줄도 모르고 거봐 내 말이 맞지 하는 이들도 있었다.

[좋다, 잘한다. 역시 사기는 최고다!]

바루다는 사람들이 저럴수록 반전이 힘을 발한다는 걸 경험을 통해 배운 바 있었다.

게다가 딱히 코칭을 하지 않더라도 수혁이 이런 식의 발표에 능하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해서 마냥 즐거워하기만 했다.

수혁이 발표자가 아니고, 또 바루다와 지낸 지 얼마 안 된 상황이라면 인공지능이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에 신기함을 느꼈겠지만.

아쉽게도 지금 상황이 그렇게 녹록지만은 않았다.

아무리 재능이 있고 노련하다고 해도 청중을 끌고 나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환자는 6개월 전 치료 후 확인을 위한 영상 검사를 받은 상태였고, 거기서 재발이나 다른 암의 증거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기 보시면……. 깨끗하죠? 그리고 이건 입원하고 비뇨기과에서 찍은 CT입니다. 역시 깨끗합니다. 또한 조영제가 뚜렷하게 새는 곳이 없어 내출혈을 의심할 만한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이것만으로 단정할 수는 없기에 직장 수지 검사(Digital rectal exam)를 시행했으며 음성 소견임을 확인했습니다.”

수혁은 의도적으로 환자의 항문을 후볐던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일부러 과장되게 인상을 쓰면서였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검사 자체는 중요한 검사인 데 반해 아무래도 좀 꺼려지는 검사이기도 했기에 그랬다.

“자, 그렇다면 다시 묻겠습니다. 이 환자의 실혈의 원인은 그럼 무엇일까요? 지정의 또는 주치의라면 무엇을 의심해야 할까요?”

그 웃음이 잦아드는 데는 거의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수혁이 다시금 심각한 얼굴이 되어 질문을 던져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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