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327화 (327/1,303)

327화 집담회 (4)

이하언.

태화 의료원에서 가장 많은 판독 의뢰를 받는 복부영상 파트의 거두였다.

의존도가 높은 임상 교수들 중에서는 반드시 복부영상의학과 전문의의 의견을 듣고 나서야 수술 여부를 결정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나마 가슴이나 두경부, 또는 근골격계 등은 뭐가 되었건 임상 의사도 어느 정도 뭘 좀 볼 수 있지만.

복부는 그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장기를 찍고 판독해야 하는 복부는 영상의학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도리어 임상 의사들에게는 더더욱 어려운 부위가 되어가고 있었다.

“저 사람 왜 가만히 있대?”

“감히 이하언 교수님이 물어보는데 왜 고개를 숙이고 있어. 미쳤나?”

“아이……. 저러다 역정 나시면 또 판독실 걸어 잠그는데…….”

“아……. 안 되는데.”

병원에서 갑으로 분류되는 과를 꼽으라고 하면 다들 몇 개를 꼽겠지만, 그중 딱 두 개만 꼽으라고 하면 영상의학과와 마취과로 이견 없이 좁혀질 터였다.

영상의학과는 모든 과의 진단 및 치료 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과이고.

마취과는 수술 과가 수술을 할 수 있게 수술실을 열어 주는 데 지대한 영향 정도가 아니라 전권을 가지고 있는 과여서였다.

오죽하면 각 과 야유회 갈 때 여러 임상과에서 꿍쳐 놓았던 양주를 선물한다는 소문이 있겠는가.

“빨리 대답하세요!”

“박상헌 교수님, 설마 이유가 없진 않을 거 아닙니까!”

그나마 태화 의료원은 기업 병원이기에 합리적으로 돌아가는 편이기는 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지는 않는다는 뜻인데, 그럼에도 영상의학과의 분노는 두려운 일이었다.

특히 이하언은 어지간한 상부의 압박 정도는 무시할 수 있을 만큼의 짬밥과 실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 아닌가.

실제로 한번 지나친 판독 의뢰에 화가 난 나머지 판독 의뢰 절차를 엄청나게 까다롭게 한 적이 있는데, 모든 임상과 의사들은 그 시절을 어두운 시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혹 박상헌 때문에 다시 그렇게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일었다.

“그래요, 박 교수. 뭐 하고 있어.”

“말씀하시죠.”

특히 비뇨기과 측은 벌벌 떨고 있었다.

콕 집어서 비뇨기과 판독은 이제 이렇게 합니다 라고 하면 어쩐단 말인가.

가뜩이나 로봇 수술로 벌던 돈이 칠성과 아선에서도 로봇 도입하면서 줄어서 입지도 좁아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상부에서 얼마나 도와줄지 의문이라는 얘기였다.

“그…….”

박상헌은 어마어마한 압박에 시달리게 되었다.

고개를 숙이지 않는 한, 어디를 돌려도 노려보는 눈이 한 쌍은 넘었다.

‘야, 너는 왜 그러냐.’

심지어 류마티스내과의 김문재 교수마저도 노려보고 있었다.

지가 부추겨서 일이 이렇게 된 건데 저따위로 나올 줄이야.

‘괜히 사람들이 싸가지 없다고 하는 게 아니지.’

친구를 잘못 사귀어도 한참 잘못 사귀었다란 생각이 들었다.

“뭐 해요? 박 교수.”

하지만 자기반성조차 오래 끌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부르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보니, 어느새 이하언 교수가 바짝 다가와 있었다.

자신이 들고 있던 마이크를 건네주면서였다.

“마이크가 없어서 그러나……. 자, 이걸로 말해요.”

“어…….”

그리곤 마이크가 사라진 틈을 타서, 딱 박상헌 또는 수혁 정도까지만 들릴 만한 크기로 말을 이었다.

“내가…… 나 혼자 있을 때 말하라고 했지? 안 그러면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하게 될 거라고. 기회를 줬는데 왜 그렇게 미련해?”

“그…….”

박상헌 교수는 차마 뭐라 답은 못 하고 밖을 바라보았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하나 더 준비해 둔 게 있었다.

자세히 말하자면 안에 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면 레지던트에게 전화를 걸라고 했더랬다.

그럼 박상헌을 그 전화를 받고, 초응급상황인 척 연기하면서 나가기로 했던 것.

‘야……. 이 정도면 전화가 아니라 뛰어 들어와야 되는 거 아니냐?’

박상헌은 자신이 지시했던 사안을 하나하나 떠올리면서 문을 응시했다.

이쯤 되면 사정을 모르는 사람도 아, 이놈이 저 밖에 뭘 준비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아마 평소라면 이렇게까지 멍청한 모습을 보이진 않았을 텐데.

불행하게도 지금의 박상헌은 여유가 아예 없는 상황이었다.

“뭐……. 밖에 뭐 있어?”

이하언은 그런 박상헌을 보며 물었다.

아차 하는 생각에 고개를 돌려 보니, 어째 좀 표정이 야릇했다.

진짜로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닌 거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세한 기분이 들어, 달달 떨려오는 입술로 입을 열었다.

“그……. 왜, 왜요?”

“찾는 사람이 있는 거 같아서. 내가 맞혀 볼까?”

“그…….”

“정훈영 선생 맞지? 레지던트 3년 차. 그 친구 이 안에 있어. 밖에서 서성이고 있길래……. 들어오라고 했지.”

“허…….”

이 인간들이 작정을 했구나.

박상헌은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실제로 자세가 무너지고 있었다.

어찌나 극적이었는지, 멀리 있던 사람도 박상헌의 자세가 확 바뀌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정도였다.

“뭐지?”

“아니, 왜 이유를 말하라는데 저래?”

“설마 저거……. 별 이유 없이 그냥 싫다고 한 거 아냐?”

“에이……. 설마 말이 되나…….”

다들 웅성거리기 시작했을 때쯤, 이하언이 애초에 건네줄 생각도 없었던 마이크를 회수했다.

“지금 마이크에 대고는 말을 안 하는데……. 이유가 없었다고 하네요? 처음부터…… 혈뇨는 자기가 볼 생각이었는데, 그냥 협진을 내 본 거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복잡한 의견서를 받았으니 읽어 볼 생각도 없었겠죠.”

그리곤 만들었던 말을 마구 쏟아 냈다.

박상헌이 아니라 김문재를 비롯해서 현재 수혁의 반대파로 추정되는 인물들을 바라보면서였다.

“옳지, 잘한다.”

“아니, 바로 앞에 나서지 말고요. 형 뒤에 있는 거 누가 봐도 아는데 티까지 내서 뭘 해.”

“나도 모르게 나왔어.”

“그런 걸 좀 참으라고……. 원장이잖아.”

“참기 싫어서 때려치우잖아.”

“수혁아……. 너 어떡하니……. 이 사람 밑에서 부센터장을 어떻게 해.”

잠시 맨 앞자리에서 소란이 있었으나 이하언은 다행히 나름 노회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이현종과는 친분이 있지 않은가.

이 정도 일은 예상했던 바였다.

해서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눈빛을 쏘았다.

“분명히 말했었습니다. 원장단에서 내년 3월에 통합진료센터를 출범할 거라고요. 심지어 이게 원장단 단독으로 결정된 사안도 아니고……. 태화 바이오 측에서 제안이 내려온 거고 태화 생명에서 도맡아 추진한 겁니다. 여러분이 좋다, 싫다를 표할 일이 아니란 거예요. 근데 이런 식으로 벌써 눈에 뻔히 보이는 반발이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리곤 원래 같으면 이현종이 해야 할 말을 했다.

조금은 대놓고 하는 말이라 다들 좀 불편해하는 기색이 있었다.

그 분위기를 읽어 낸 신현태가 이현종의 옆구리를 푹 하고 찔렀다.

“아, 왜.”

“일어나라고.”

“아까는 가만히 있으라며.”

“그건 돌발 행동이고……. 이건 다 짜 놨던 일이잖아요.”

“아, 맞네. 그렇지, 참.”

“어후.”

이현종은 신현태의 한숨을 뒤로하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비록 과정은 좀 모자람이 있었으나 일어나고부터는 위엄 있으면서도 자애로운 원장 그 자체였다.

“허허, 이하언 교수님. 그건 좀 억측 아니겠습니까? 설마 박상헌 교수가 그랬을라고요.”

“아닙니다, 원장님. 제가 알아본 정황이 있습니다.”

“하하하. 그런 얘기는……. 지금 하기는 좀 곤란할 거 같아요. 그리고 박 교수도 그렇지. 눈치가 있으면 지금 같은 분위기에 설마……. 위에서 다 결정된 사안을 가지고 반대하겠습니다. 제 자리 차는 행윈데. 하하.”

“저도 그렇게 생각은 합니다. 새로 부임하신 태화 바이오 김다현 사장님 성정이……. 평소엔 부드러워도 하극상은 가만히 안 두지 않습니까? 일전에 서효석 교수 건도…….”

“어이구, 그런 얘기는 그만합시다. 내가 다 무섭네. 하하.”

그리곤 너스레를 떨었다.

지가 다 계획하고서는 좋은 사람인 척하고 있었다.

맞상대하고 있는 이하언조차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는데, 다행히 어린 친구들한테는 잘 먹히는 듯했다.

또 반대편이라고 해서 아주 무시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겁을 먹고 있었다.

‘통합진료센터……. 반대를 대놓고 하면 뒤지겠구나.’

이런 생각 정도는 들게 되었다 이 말이었다.

그렇다고 당장 포기하고픈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세상에 석박사도 안 한 신규 전문의가 부센터장이라니.

거의 학교에 들어간 순서대로 서열이 정해지고, 그 서열이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 데에 익숙한 의사들로서는 절대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록 세상이 더 이상 그렇게 돌아가지 않고, 실력 위주로 돌아가게 된 지 오래라 해도 그랬다.

본래 닫힌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사고도 닫히게 되는 법이었다.

‘뭔가 다른……. 방법을 간구해야겠네.’

‘일단은 숙이자. 숙여.’

‘박 교수는 버려. 저 친구는 끝났어.’

그렇다 해도 오랜 조직 생활을 통한 눈치는 익힌 사람들이었다.

이하언 교수 그리고 이현종 원장은 그 비슷한 대화가 나도는 것을 보고는 만족했다는 표정이 되었다.

머리가 다 굵을 대로 굵은 사람들인데 설마하니 이런 일 하나로 꼬리를 말겠는가.

생각보다 질투는 강력한 감정이기에 쉽게 마모되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심한 질투 유발자로 살아온 둘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자, 그럼 집담회 계속합시다.”

“네, 원장님. 중단시킨 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해서 이만하면 됐다는 생각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수혁은 그런 둘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즉시 말을 이었다.

“아무튼, 협진 의견은 거절되었습니다. 하지만 환자를 눈앞에서 보고 있는 입장에서, 또 분명히 의심되는 소견이 있는 상황에서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 독단으로 검사를 진행했습니다. 이는 환자분과는 얘기가 된 사안이지만 위험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사과드립니다, 박상헌 교수님.”

박상헌으로서는 얻어맞고 깽값 받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것도 레지던트한테 그랬으니 원래 같았으면 분노가 치밀어야 했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온 병원 앞에서 공개 처형을 아주 제대로 받은 마당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먼저 배설요도 조영술 및 요관 조영술은 관내 혈전 및 원위 요관의 불규칙성 같은 비특이적 소견을 보였습니다. 혈전은 분명 출혈을 시사하는 소견이지만 아직은 불충분했습니다. 다만 동맥 조영술에서는 요관이 장골동맥을 가로지르는 지점에서 가성동백류 또는 조영제가 요관으로 유출되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이는 장골동맥에서의 피가 요관으로 유출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소견입니다.”

“오…….”

아주, 아주 드문 소견이지 않은가.

여기저기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알고 보니 비뇨기 관련한 수술을 받고, 방사선 치료까지 받은 환자에서 이로 인한 장 유착이 심하게 발생할 수 있고, 이 중에서 극히 드물게 장골 동맥-요관 교통이 발생할 수 있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비뇨기과 및 혈관외과에 수술을 의뢰했고 현재 환자는 건강히 퇴원한 상태입니다. 이로써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거기에 더해 치료까지 성공적으로 된 마당이었다.

이번엔 감탄이 아니라 박수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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