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9화 류마티스내과 (2)
다음 대화는 싱가포르에 관한 것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워낙에 학회를 많이 하는 도시라 그런가 다들 한 번쯤은 다녀와 본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먹을 곳이 많군요.]
딱히 불편한 시간은 아니었다.
애초에 호감을 가진 사람들의 조언 아닌가.
게다가 도움이 되는 정보도 너무 많았다.
특히 바루다에게 그랬다.
‘동남아 음식만 나오는 호텔 뷔페라……. 여긴 꼭 가 봐야겠습니다.’
[음……. 내가 동남아 향신료 좋아하긴 하지.]
‘그러고 보니 의외로 취향이 이국적이네요. 외국 가 본 게 레지던트 때가 다면서.’
[어릴 때 정말 아무거나 막 먹고 커서 그래. 딱히 취향이랄 게 없다가……. 돈 벌면서 배운 거야, 급하게.]
‘같잖은 동정표 위한 다큐멘터리는 찍지 말고요.’
[이 새끼가.]
‘일단 더 들어 봅시다. 칠리…… 크랩? 이것도 맛있나 본데.’
이보다 더 들뜬 적이 있었나 싶을 지경이었다.
수혁도 이해는 됐다.
원래 맛집은 교수들이 제일 잘 안다고 하지 않던가.
오늘만 해도 참 쉽게는 알 수 없는 맛집을 뚫은 참이었다.
해서 한동안 수혁과 바루다는 교수들의 추억 어린 수다에 집중했다.
‘으어……. 오늘도 늦었다. 이게 아빠랑 밥 먹으러 갔다 오면 기본 4시간이네.’
다른 잡담도 끊임없이 이어졌기에 그랬다.
들어와 보니 11시였다.
그럼에도 마냥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건, 그 시간 동안 함께했던 이들 덕분이었다.
특히 마지막에 조태진이 보여 준 퍼포먼스는 압권이라 할 수 있었다.
[이런 미친! 150? 술도 거의 안 마셨는데?]
바루다가 그것을 따라 했다.
[아……. 난 뒤졌다……. 여보 미안해…….]
머리를 싸매며 주저앉는 것까지 완벽했다.
뒤이어 이현종이 실은 자기가 먼저 계산했다고 할 때 그 겸연쩍어하는 표정이라니.
제자 된 도리로 눈앞에서 웃지 않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홀로 당직실에 들어왔을 때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하하하하!”
한바탕 호탕하게 웃어 재꼈다 이 말이었다.
마침 수혁의 당직방 앞을 지나던 이들이 있어 소문은 와전되었다.
‘확실히 천재는 천잰데 좀 이상하지?’
‘괜히 혼자 당직방 쓰는 게 아니라니까…….’
1년 차 초반에 비하면 이수혁 미친놈 설이 많이 수그러든 편이었지만.
완전히 사그라들진 않았기에 그랬다.
당장 조태진만 해도 신들렸다는 걸 믿고 있지 않은가.
그 외에도 조금씩 이상하다고 믿는 사람은 정말 많았다.
“근데……. 음. 류마 가는 건 얘기를 하다 말았네.”
[가긴 가야죠.]
홀로 있을 땐 간혹 이렇게 혼잣말처럼 바루다와 얘기를 하기도 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수혁과 바루다는 오늘도 루머를 양산하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한 채 대화를 이어 나갔다.
“하……. 나도 껄끄러운데, 그 사람은. 너무 대놓고 깠잖아.”
[그건 그런데……. 껄끄러운 거로 치면 그 사람이 더할걸요. 아랫사람한테 까였는데……. 신나겠어요?]
“그것도 그래. 뭐……. 커피라도 사 갈까?”
[놀리는 줄 알 거 같은데……그냥 환자나 열심히 보세요. 교수야 월요일에 보겠지만, 업무는 내일 턴 하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 주말에 턴 하지.”
원래는 월마다 턴 하는 것이 원칙이기는 했다.
하지만 평일에 손바꿈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특히 태화 의료원처럼 워낙에 환자가 많은 병원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해서 편의상 달 바뀌는 주 주말에 턴 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내일부터 수혁은 류마티스내과를 돌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주치의가 누구더라. 아, 대훈이네.”
[안대훈이에요? 그럼 좀 편하려나.]
“하윤이보다는 낫겠지. 1년 차랑 2년 차는 다르니까.”
[그래 봐야 레지던트 레벨이죠. 지금은 누가 보고 있습니까?]
“어디 보자…….”
해서 수혁은 바루다의 조언을 따라 환자 파악에 나섰다.
어차피 너무 많이 먹은 터라 잠도 잘 안 오기도 하기에 겸사겸사하는 일이었다.
또 류마티스내과라는 곳이 아무래도 마이너 분과다 보니 환자가 많은 곳도 아니지 않은가.
주로 외래 진료가 다이기도 해서, 병동은 편한 편이었다.
“입원 환자가……. 오 그래도 8명이나 있네.”
[혈종에 비하면 정말 적군요.]
“그럴 수밖에 없지. 류마티스에서 입원하는 환자분들은……. 대개 초진 아니면 정말 중증이니까.”
[그렇죠. 보니까……. 5명은 초진이네요. 아직 진단명도 안 붙었습니다.]
“나머지 셋은…… 아……. 이분은 폐렴이 왔네. DNR 붙었어.”
편한 편이라고는 해도 태화의 류마티스라면 얘기가 조금 다르긴 했다.
중증도가 다른 곳하고는 판이하게 차이가 나기 때문이었다.
작은 병원들에서 토스 하고 토스해서 오게 되는 경우도 많았다.
말하자면 답이 잘 안 나오는 환자들이 꽤 있다, 이 말이었는데 이 환자가 그랬다.
[방법이 없네요. 안타깝지만……. 이 환자는 늦었습니다.]
심지어 바루다나 수혁이 나서도 그랬다.
아무리 뛰어난 의사-인공지능 콤비라 해도 애초에 현대 의학 자체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아무래도 이런 경우를 거의 매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음, 다른 환자를 볼까.”
처음엔 잘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의사인데 환자를 적당한 선에서 포기해야 한다니.
이게 말이 되나 싶었더랬다.
하지만 계속해서 바이털을 보려면 오히려 조금은 담담해져야 하는 필요가 있었다.
그게 잘 안 되는 사람의 경우 잘하다가 돌연 내과를 그만두거나 하는 사태가 발생하곤 했다.
다행히 수혁은 바루다의 도움까지 받을 수 있었기에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받진 않은 상황이었다.
[이 환자……. 입원한 지 벌써 3일째고 검사가 다 들어갔는데 진단명이 그저 증상으로만 되어 있네요.]
‘아, 그렇네.’
해서 수혁은 어렵지 않게 다음 환자로 넘어갈 수 있었다.
찾아낸 환자는 바루다가 방금 말한 것처럼 이미 입원해서 검사를 이것저것 한 마당이었다.
그러나 아직 딱히 의심되는 질환명을 찾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우선 수혁은 환자의 입원 기록부터 들여다보았다.
박진하 남자 52세였다.
‘주소가……. 흉통이네? 왜 류마로 왔지?’
[병력을 보니까 원래 류마티스 관절염이 있었네요. 근데…… 관리가 아주 잘되는 편이었고……. 외래 왔는데 흉통이 있다고 하니까 일단 심전도 찍고 이상 없어서 입원시켜서 검사 들어간 모양입니다.]
‘트레드밀이 예약되어 있네. 류마 쪽으로 의심을 하진 않는가 보다.’
트레드밀은 운동부하검사라고 보면 되었다.
일부 협심증의 경우, 일상생활을 할 때는 증상이 없다가 심장에 부담이 가면 증상이 오는 게 보통이기에 운동을 강제로 시킨 후 증상을 유발시키는 검사였다.
말만 들어도 좀 위험해 보이는 검사이니만큼 입원해서 진행하게 되어있으며 철저한 관리 감독하에 이루어지는 것이 원칙이었다.
때문에 입원한 지 3일이 지났음에도 아직 검사가 시행되지 않은 참이었다.
[김이 팍 새네. 병력 상…… 아무래도 협심증 가능성이 커 보이긴 합니다.]
‘그렇긴 하지? 그래도…….’
[일단 우리가 보게 된 이상 다른 질환일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겠죠.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까, 내일 아침에 한번 가 봅시다. 주말 아침에 오는 의사는 특히 더 반가워하기도 하고요.]
‘오케이. 그럼 일단 자자.’
수혁은 기록창을 내린 후 침대 위에 누웠다.
바루다는 수혁이 숙면을 취할 수 있도록 멜라토닌 분비를 활성화시켰다.
수면제 먹은 사람처럼 의식을 딱 끌 수는 없겠지만.
이것만으로도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특히 거의 매일 잠들기 직전까지 머리를 풀로 돌리고 있는 수혁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띠띠띠.
심지어 바루다는 아침엔 알람으로서의 기능도 겸하고 있었다.
‘으.’
딱히 수혁에게 늘 좋게만 느껴지는 건 아니긴 했지만.
기능만 놓고 보면 이보다 더 능률적으로 수혁을 굴릴 수 없어 보이는 상황이었다.
만약 이러한 사정을 수혁이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면 조금 소름이 끼치겠지만.
등잔 밑이 어둡단 말도 있지 않은가.
지나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벌어지는 일은 오히려 더 파악이 어려운 법이었다.
심지어 이건 가까운 정도가 아니라 몸 안의 일 아닌가.
‘이제 그만.’
[통계를 보면 여기서 1분 정도 지속하는 것이 수혁이 완전히 의식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됩니다.]
‘하…….’
[지속합니다. 띠띠띠.]
해서 바루다는 뜻대로 수혁을 조종할 수 있었다.
“으, 시원하다.”
덕분에 수혁은 10분도 채 지나기 전에 샤워까지 싹 마치고, 새 수술복을 입을 수 있었다.
아니, 거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숫제 크룩스까지 신은 채 방을 나섰다.
우선 카페 가서 슈와 커피를 사 들고 어제 봐 둔 박진하 환자 병실로 갈 생각이었다.
“어, 선생님.”
병동에 도착하자 안대훈이 인사를 해 왔다.
아직 8시도 채 안 된 참이라 이른 시간인데 벌써 출근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어제 당직 서고 퇴근 전이거나.
뭐가 되었건 간에 기특한 일이었다.
보통은 제아무리 당직의라 해도 주말 이 시간엔 뻗어 있으니까.
“아, 대훈아. 너 있을 줄 알았으면 커피 하나 더 사 올걸.”
“아닙니다, 선생님. 전 빈속에 먹으면 속이 쓰려서요.”
“그래? 내시경 한번 해 봐야 되는 거 아냐? 아직 그럴 만한 나이가 아닌데.”
“그렇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대훈은 1년 차 때보다도 더 듬성해진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웃어 보였다.
하도 늙수그레하단 말을 많이 듣다 보니 조금만 어리단 얘기만 들으면 저렇게 웃었다.
[단순해서 좋아요.]
‘그러게. 이게 단 한 번도 안 통하는 적이 없네.’
그걸 수혁이 늘 계산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마냥 웃지만은 못하겠지만.
수혁은 타고난 연기자였고, 바루다는 그것을 더 강화하는 데 있어 도가 튼 지 오래였다.
“하여간……. 너도 이번 달 류마더라?”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소문 좋던데. 3월부터 잘 돌았다고.”
“아, 아뇨. 선생님이 다 잘 가르쳐 주신 덕이죠.”
수혁은 겸양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대훈을 보며 슬며시 웃었다.
당연히 수혁보다야 못하지만 그래도 지금 2년 차 중에서는 압도적이란 평이었다.
거의 매해 교수가 배출되는 규모의 태화이니, 결국, 대훈이 유력한 차기 교수 후보가 되었단 뜻이기도 했다.
[말 잘 듣는 놈이 있으면 좋죠. 얜 군대 갔다 와야 하니 그사이에 센터 자리 잡으면 밑에 꽂아도 좋고요.]
‘너무 김칫국 급하게 들이키는 거 아니냐?’
[꿈꾸는 건 자유라고 배웠습니다.]
‘넌 항상 그런 것만 배우고 기억하더라.’
[그것도 제 자유…….]
잘됐다는 생각과 함께 수혁은 말을 이었다.
“내가 쭉 리뷰 해 보니까 특이한 환자가 하나 있던데. 누군지 알겠어?”
“아……. 네. 저도 그렇지 않아도 하나 걸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군데?”
“박진하 환자분이요. 흉통을 주소로 류마 입원한 거부터가 좀 특이해서요.”
“그렇지?”
“그리고 어젯밤에도 흉통 호소해서 콜이 왔었습니다.”
“어, 그래? 아, 너 당직이지. 어떻게 했는데?”
흉통은 정말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중요한 증상이었다.
오죽하면 응급실에 들어가자마자 진료 보고 싶으면 우선 가슴을 부여잡으란 말이 있겠는가.
‘아……. 분위기 갑자기 시험이네…….’
수혁은 당연하다는 듯 다리를 꼰 채 대훈을 응시했다.
대훈은 마른침을 삼키며 급하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아까 칭찬까지 들은 마당에 절대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