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화 사 뭔 신드롬? (2)
수혁은 질문을 던진 후, 환자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대훈을 데리고 나왔다.
딱 던질 때만 해도 요놈이 이 정도 말하면 바로 알아먹겠지 했는데.
표정을 보아하니 영 감을 못 잡는 거 같았다.
[앞으로 진료 보게 하려면 이런 모습은 안 보이는 게 낫겠죠.]
‘그렇지. 라뽀 깨지면 지옥이지.’
의사 환자 관계에서 신뢰도란 가장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환자가 ‘아……. 이 의사는 좀 멍청한 거 같은데…….’라고 생각하게 되는 순간, 그 의사가 멍청하건 그렇지 않건 치료는 끝났다고 봐야 했다.
뭔 짓을 해도 의심하게 될 테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안대훈은 주치의 아닌가.
병동 담당 간호사를 제외하면 환자를 제일 오래 보는 사람이 주치의였다.
치프 된 입장에서 그런 주치의의 신뢰도를 스스로 까먹을 수는 없었다.
“자, 다시 물을게. 뭐 같아?”
해서 수혁은 병동 스테이션까지 쭉 끌고 간 후에 다시 물었다.
대훈은 안도의 한숨을 한번 쉬고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분명 지금 수혁이 말해 준 증상을 다 보이는 질환은 없을 거 같았다.
물론 각각 다른 질환에 의한 증상일 수도 있겠지만, 그럴 것 같진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안 물어봤을 거야.’
분명 하나의 질환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확신을 가지고 묻고 있는 것을 보면 언젠가 한번 배운 적이 있을 터였다.
문제는 대훈은 수혁이 아니란 점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대훈에게는 바루다가 없었다.
한번 들은 말도 중요하다고 판단이 되면 저장할 수 있는 수혁과는 달리, 잊어먹는 것이 너무 많았다.
‘과골화…… 과골화면 자가 면역 질환일 텐데.’
우선은 자가 면역 질환군 하나로 좁혀 보았다.
이것만 해도 상당한 진전이라 할 수 있었지만.
애초에 자가 면역 질환군이라 해도 그 범위가 상당했다.
조금 더 좁혀야 했다.
다행히 수혁이 준 힌트가 적지는 않았다.
[수혁은 알고 낸 거죠?]
고민에 빠진 대훈을 보면서 바루다가 물었다.
조금은 미심쩍어하는 얼굴을 하고서였다.
수혁이 뭐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얼마든지 자기 대신 후배를 희생양으로 삼을 수 있을 거 같았다.
‘난 알지. 아까 특징 말해 줬잖아. 그냥 그거 앞 글자 따서 읊으면 병인데, 아냐?’
[맞습니다. 대단하군요. 저도 데이터베이스를 돌리고 나서야 알아차렸는데, 그걸 기억하고 있었습니까?]
‘너 때문에 진짜 열심히 공부하고 있잖아. 마침 류마티스 질환이기도 하고……. 김문재 교수님이 시비 걸 수도 있는데 모르는 게 있으면 안 되지.’
[역시 별로 좋은 뜻에서 공부해 놓은 것은 아니었군요. 그래도 좋습니다. 일단 공부를 했다는 것이 고무적입니다.]
짤막한 대화를 통해 바루다는 수혁이 아주 정확히 환자의 진단명을 파악했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대견한 순간이었다.
이왕이면 안대훈에 대해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싶었다.
해서 참을성을 가지고 기다리기로 했다.
아주 드문 질환이지만, 동시에 진단명이 특이해서 떠올릴 수도 있었다.
‘무릎이 더 아파졌다고 했지. 그렇다면 환자가 가지고 있던 기저 질환하고 연관이 있나? 류마티스 관절염이 심해지면서……. 과골화가 생기고 손발에 농포…… 그리고 여드름. 음. 음…….’
대훈은 정말이지 머리를 맹렬히 굴리고 있었다.
뭔가 떠오를 거 같아서였다.
‘잠깐만. 나 이거 들어 본 거 같은데. 이거……. 이게……. 그러니까…….’
관절염을 의학 용어로 부르면 synovitis였다.
여드름은 acne였고.
둘의 앞글자를 따면 ‘sa’, 즉 ‘사’라는 글자가 만들어졌다.
“그…… 사 뭔 신드롬 아닌가요?”
“오.”
“마, 맞죠?”
“맞아. 다음은 뭔데?”
“이게……. 이 환자 증상을 그냥 따서 만든 이름 같은데. 아……. 뭐라고 하지. 뭐라고 하지.”
“맞아, 그거. 해 봐.”
수혁은 꽤 기분이 좋았다.
힌트를 대량으로 퍼 주긴 했지만, 그래도 이걸 떠올리고 있다는 것이 대견해서였다.
이제 고작해야 2년 차 된 지 한 달 넘은 놈이 이 수준이라니.
대단한 일이었다.
[너무 대견한 쪽으로 몰고 가진 마십쇼. 이 환자에게서 증상을 다 찾아내고 또 그 증상을 이어 붙이는 것이 어려운 거지……. 이어 붙인 다음에 진단명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건 그런데, 쟤는 네가 없잖아.’
[오, 그것도 그렇죠. 저는 태화 전자의 정수니까요. 차이가 크네요.]
‘까불지는 말고.’
하지만 대훈은 수혁이 바루다와 한참 대화를 나눈 후에도 도저히 다음 글자를 떠올리지는 못했다.
증상을 부르는 표현이 너무 많아서였다.
어찌 보면 의학 용어가 잘못했다고 볼 수도 있었다.
대체 시대가 어느 시댄데 아직도 라틴어를 쓰고 있단 말인가.
“음. 뒷글자는 도저히 모르겠어?”
하여간 10분이 더 지난 다음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1시간을 더 기다린다고 해도 마찬가지라고 봐야 했다.
시험 봐 보면 알겠지만, 원래 모르는 건 아무리 고민한다 해도 모른 채로 남아 있는 법이었다.
“하……. 네. 죄송합니다.”
안대훈 또한 그러한 이론에 공감하는 편이었다.
의대에는 소위 땡시라고 해서 초 단위로 답을 내야 하는 방식으로 치는 시험이 있는데, 그게 쫄려서 그렇지, 실제 난이도는 평범한 시험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체감해 온 덕이었다.
“사포 신드롬(SAPHO syndrome)이야. 내가 저번 달 렉쳐 때 말해 준 적 있을걸?”
“아……. 아 맞다! 축구 기술이랑 비슷해 가지고 기억에 남았었는데.”
“생각해 보면 쉬워. synovitis(관절염)의 S, acne(여드름)의 A, pustulosis(농포)의 P, hyperostosis에서 HO를 떼와서 sapho. 사포.”
“아……. 맞네……. 아……. 근데 그럼 이 환자 치료를 어떻게 해야 하죠? 거기까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대훈의 말에 수혁은 잠시 환자 쪽을 돌아보았다.
아까 환자에게 물었던 것을 떠올리면서였다.
‘지금쯤이면 생각났으려나?’
[알 수 없죠.]
‘약이 들었을 가능성은?’
[이 정도면 거의 없을 겁니다. 과골화가 진행이 되기 전이라면 모를까, 이건 안 돼요.]
‘하긴 그렇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발걸음까지 돌린 참이었다.
대훈보다 훨씬 먼저 출발했다는 뜻이었지만, 그렇다고 앞서가긴 어려웠다.
지팡이를 짚고 걷는 쪽과 그렇지 않은 쪽의 속도 차이는 극명했다.
“제가 문 열겠습니다.”
“어, 땡큐.”
대훈은 그렇게 수혁을 앞지른 후, 문을 열어 위 연차에게의 의전을 행했다.
환자에게는 당연히 수혁이 엄청 높은 사람처럼 보였다.
“수석 전공의 선생님 돌아오셨습니다.”
“아, 네.”
소개도 이렇게 하니까 더 그럴싸했다.
그래 봐야 다 같은 전공의, 그러니까 레지던트지만.
환자가 아주 병원에 익숙하지 않은 이상에야 구별이 될 턱이 없었다.
게다가 대훈은 수혁에 대한 존경심이 하늘 높이 꽉 차 있는 사람 아닌가.
감정은 조금이라도 전염되는 법이었다.
“환자분.”
“네.”
“아까 제가 여쭤봤던 거 혹시 기억나시나요?”
“어떤…….”
“상비약 드시고 가슴 통증이나 허리 통증도 좋아지신 거 같냐는 질문입니다.”
“아……. 딱히…… 딱히 그렇지는 않았어요. 그랬으면 병원에 오진 않았을 거 같습니다.”
중년의 사내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답했다.
어쩐지 그럴 거 같기는 했다.
이 나이 때 아저씨 중에는 쓸데없이 고집 센 사람들이 있어서, 약 먹고 안 아프면 괜찮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지 않던가.
아프지 말라고 먹는 약을 먹고 안 아프면 괜찮다고 생각하다니.
곱씹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군요. 일단 환자분 진단명은 사포 증후군이 의심됩니다.”
“네? 사포요?”
“네.”
하여간 수혁은 일단 진단명부터 알려 주었다.
한번 크게 아팠으니 앞으로는 주의할 거 아닌가.
굳이 여러 번 말해서 기분 상하게 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처음 들어 보는 병이네……. 중한 겁니까?”
사포 증후군.
이거 들어 본 일반인이 얼마나 될까.
의사 중에도 드물 테니,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할 터였다.
희귀병이라 이건데, 아무래도 희귀병은 무서운 병이란 선입견이 있기 마련 아니겠는가.
그래서 그런가 환자의 얼굴엔 우려가 가득 담겨 있었다.
“음……. 아뇨. 그렇지는 않습니다. 환자분 같은 경우에는 일단 혈관 협착이 있는지 확인은 해야 하긴 하지만, 당장 목숨이 왔다 갔다 하지는 않아요.”
“아……. 그렇구나. 근데…… 그게 있으면 어찌 됩니까?”
“수술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이건 확실한 건 아니에요. 관련 검사가 되어 있진 않아서. 그리고 질환 자체에 대한 치료는 별개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어리둥절해하는 얼굴에 수혁은 자신의 잘못을 떠올렸다.
요새 하도 의사들하고만 얘기를 했더니, 그것도 패밀리처럼 지내는 똑똑한 양반끼리 얘기를 했더니 논리의 비약이 좀 있었다.
그 사람들에게는 일상이겠지만 환자를 대상으로 할 때는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아, 죄송해요. 제가 설명을 좀 헷갈리게 했죠?”
“아뇨, 아뇨. 제가 못 알아들어서…….”
“다시 차근차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네네.”
환자는 자세까지 고쳐 가며 귀를 기울였다.
꼼짝없이 심장병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뭔가 다른 얘기를 듣지 않았던가.
심지어 그 진단 과정에서 나눈 대화마저 인상적이었다.
내일은 몰라도 지금 당장은 눈앞의 이 젊은 의사의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 줄 용의가 있었다.
“우선 환자분의 병은 사포 증후군이라는 병입니다. 원인이 아주 정확하게 밝혀지진 않았지만, 보통 류마티스 관절염이 있는 경우에 잘 발생합니다.”
“네.”
“이 질환이 있으면 뼈가 자라서 가슴, 특히 여기 앞가슴이 아플 수 있어요.”
“아…….”
“또 합병증으로 혈관 협착이 동반되기도 합니다. 지금 환자분은 3개월 전이라고 하셨지만……. 상비약으로 비스테로이드성 진통 소염제를 드셔 왔기 때문에 그보다 더 오래되었을 수 있어요. 1차 약제가 이 진통 소염제라서 증상이 가려졌을 수 있거든요.”
“아이고, 이런……. 병원을 미리 올 것을.”
환자가 자책하는 모습을 보며 수혁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실 미리 왔어도 별 소용이 없었을 수도 있었다.
과골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기 전까지는 어지간한 의사에게 가더라도 진단이 잘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드문 병이었다.
“사진상에서 보면 뼈가 꽤 많이 자라 있는데, 이건 하루 이틀 자라서 될 만한 병변이 아니에요. 때문에 혈관 협착도 동반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건 검사를 해 봐서 따로 치료를 해야 해요.”
“네네. 이해했습니다.”
“질환 자체에 대한 치료는…… 일단은 아까 말씀드렸듯 일차적으로 진통 소염제를 씁니다. 근데 지금은 그게 안 듣고 있다고 봐야 해요. 먹었는데도 진행을 한 거니까요.”
“아……. 그럼……?”
“스테로이드나 다른 면역 억제제를 써 봐야 합니다. 그건 제가 환자분 상태 봐 가면서 쓰도록 하겠습니다. 우선은 너무 걱정 마세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