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2화 김문재 (1)
다이나믹 했던 한 주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수혁은 어제 봤던 환아를 생각하며, 커피잔을 들었다.
병동에서 선물로 준 것이었는데 수혁은 원래 이런 종류의 소소한 선물을 자주 받는 편이었다.
답이 안 보이던 환자를 해결해 주거나, 또는 쓸데없이 복잡했던 처방을 간소화해 둔 데에 대한 보답이었다.
“아, 선배님.”
순전히 수혁과 같이 다녀서 커피를 얻어먹게 된 대훈이 입을 열었다.
“어, 왜.”
“근데…… 오늘은 오실까요?”
“응? 아.”
꽤나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알아듣는 게 그리 어렵진 않았다.
지금 시점에서 대훈의 ‘오실까요?’가 지칭하는 목적어는 딱 한 명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김문재 교수님?”
“네. 요새 도둑 회진 도시잖아요. 쪽지 하나 남겨 놓고. 덕분에 저는 편해서 좋기는 한데……. 환자들이 좀 이상하게 생각해서.”
“그렇긴 하지. 환자분들이 많이 물어봐?”
“맨날 물어봐요. 특히 이 병동은 고참 환자분들이 좀 많으니까…….”
“음.”
내과는 원래 만성질환을 많이 다루는 과이니만큼, 각 분과마다 터줏대감이라 할 만한 환자들을 많이 데리고 있는 편이었다.
덕분에 이비인후과나 안과 같은 마이너 서저리 과에서는 단 한 번도 생각지 못했을 고충들이 있었다.
가령 환자들이 병원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지금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의사가 어떤 직급인지 가운만 봐도 알고 있다든지 하는 문제들이었다.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인턴이나 레지던트들의 운신의 폭이 좀 좁아지기 마련이었다.
아무튼, 그중에서도 류마티스 쪽 질환들은 평생을 두고 관리해 나가는 질환들이 대부분이니만큼 고참 환자들도 굉장히 많았다.
“반복해서 입원하셨던 분들이 좀 이상하게 생각하시는 거 같아요. 이런 적이 없잖아요. 원래 병동 뒤집어 놓고 회진 도시는 분인데…….”
“좋은 일 아닌가? 환자분들도 시끄러운 거 별로 안 좋아하잖아.”
“그렇긴 한데……. 또 어떤 분들은 좀 불안한가 봐요. 김문재 교수님이 뭐 큰 병에 걸렸다더라……. 아니면 의료 소송에 휘말려서 죽어 지낸다더라 뭐 이런 소문이 돌아요.”
“아……. 뭐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다.”
대상이 김문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환자들이 너무하네 싶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 ‘김문재’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회진 돌러 올 때마다 하루 종일 이 시간만 기다렸나 싶을 정도로 기세등등한 얼굴로 병동에 나타나지 않던가.
‘야! 주치의!’
기차 화통을 삶아 잡수셨나, 목소리도 어지간히 컸다.
일단 주치의 이름을 크게 한번 부르시고는 쥐 잡듯이 털어 내는데, 입원한 환자들 중엔 실제로 그 소리에 따라 시간을 아는 이들도 있었더랬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우선 오기 전에 병동에 전화부터 걸렀다.
그리곤 수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슬며시 나타나서 조용히 회진을 돌고 사라지고 있었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벌써 일주일 넘게 이어지고 있으니 다들 수군거릴 만했다.
“저야 상관없는데, 또 교수님이시긴 하잖아요. 괜히 소문 이상하게 나면…….”
“병원에 좋을 게 없지.”
“네. 그렇지 않아도 칠성이라 아선에서 계속 네거티브 전략들고 나온다던데. 이번에 보셨어요? 만족도 조사에서 우리가 세 병원 중 3등이래요.”
“그럴 수밖에 없어. 거기 지금 당일 진료 보잖아. 펠로우 선생님들 외래가 7시에 끝난대. 로컬에서도 원성이 자자하다더라. 대학 병원이 무슨 놈의 진료를 그렇게 많이 보냐고.”
“환자들이야 좋겠죠. 굳이 큰 병원으로 안 와도 되는 환자들을 끌어당기는 거긴 한데……. 진짜 필요한 환자들도 보기는 보는 거니까요.”
“근데 너 병원 걱정 되게 한다? 역시 교수 생각 있는 거야?”
보통 레지던트들은 내가 이 병원을 언제 나갈 수 있을지에 관해서만 고민하는 편이었다.
어차피 4년 계약직들 아닌가.
병원 걱정을 하는 건 교수들과 같은 정규직들의 얘기일 뿐, 레지던트 중에서는 솔직히 지금 당장 볼 환자 수가 줄어든다고 하면 좋아할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예외가 있다면 수혁처럼 오매불망 교수를 꿈꾸는 이들이었다.
병원이 잘돼야 티오가 날 거 아닌가.
“아, 네. 저는…… 저는 그렇죠. 아무래도 하하.”
“그래, 내가 봤을 때 너네 연차에서는 네가 제일 열심히 하는 거 같아. 한다면 네가 해야겠지.”
“감사합니다.”
“근데 논문은 썼어?”
“이제 주제 찾고 있습니다. 아, 케이스 리포트는 하나 했고요.”
“그럼 일단 졸국 조건은 채웠는데……. 그래도 교수 하려면 논문 점수 좋아야 되는데. 내 것 좀 더 줄까?”
“아, 그럼 감…… 어.”
논문 주는 선배들은 대개 나쁜 놈들이란 말이 있었다.
말이 주는 것이니 사실 시키는 것이나 다름 없어서였다.
하지만 수혁이라면 얘기가 많이 달랐다.
태화 의료원의 기라성 같은 내과 의국 출신 중에서도 전무후무하다는 평을 듣는 천재 아니던가.
수혁이 주는 논문은 일단 계획서부터가 달랐고, 어떻게든 좋은 곳에 실리기 마련이었다.
해서 대훈은 껄껄 웃으며 고개를 숙이려다가, 돌연 스테이션 뒤쪽으로 시선을 박았다.
“왜, 아.”
김문재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아마도 수혁을 보기 어려워서일 터였다.
‘소문을 들었나?’
그럼에도 나타난 것은 최근 병동에서 돌고 있다는 흉흉한 말들 때문이리라.
김문재가 아무리 성격이 개차반이라 한들 심복 하나 없겠는가.
보내온 세월이 있는 만큼 류마티스 병동에 한해서는 그렇다 이 말이었다.
“흠흠.”
김문재는 평소와 달리 소리치는 대신 헛기침을 해 댔다.
교수가 이쯤 했으면 레지던트로서는 먼저 인사를 해야만 했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그중에서도 수혁이 일단 먼저 고개를 숙였다.
[뭔 일 꾸미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인사는 하시죠. 수혁을 좋게 보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위아래 없는 사람이라는 소문이 돌면 태도를 바꿀 겁니다.]
‘조태진 교수님이 해 준 말, 네가 생각해 낸 것처럼 하지마.’
[티가 났군요.]
‘내가 바보냐?’
딱히 조 교수의 조언이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의대가 얼마나 폐쇄적인 곳인지 수혁 또한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한번 선배는 영원한 선배란 말이 대부분의 경우에서 통하는 곳이기도 했다.
심지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외과 의국에서는 천장에 위 연차는 하늘이라는 말을, 바닥에는 아래 연차는 바닥이라는 말을 붙여 놓기도 했더랬다.
일반적인 회사에서는 질 나쁜 농담으로 통용될 법한 말이지만, 병원에서는 아니었다.
우선 교수들도 웃어 넘겼다.
“어, 그래. 이수혁 선생. 회진…… 준비됐나?”
“네, 교수님.”
아무튼, 수혁이 체면을 좀 봐준 셈 아닌가.
김문재 교수는 여기서 어깃장을 놓을 만큼 눈치 없는 사람은 아니어서 자연스럽게 컴퓨터 쪽으로 향했다.
사실 트집 잡을 것도 업긴 했다.
수혁은 김문재 교수가 잡아내기도 전에 문제를 알아내고 해결하고 있었기에 그랬다.
심지어 수혁이 써 놓은 것을 보고 나서야 김문재 교수도 비로소 떠올릴 수 있는 것들도 있을 지경이었다.
“그래……. 이 환자들은 내일 퇴원시키고.”
“네.”
“오늘 입원한 환자는 봤나?”
“아, 아뇨. 아직 올라온 환자가 없었습니다.”
“그래? 외래에서 처방 냈는데……. 아직 안 올라왔나 보네.”
김문재 교수로서는 수혁의 우수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게다가 박상헌이 당할 땐 느낀 바가 정말 많았더랬다.
자기가 당할 땐 그저 기분 나쁘고 말았지만.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바라보니, 박상헌이 그래도 교수는 교순데 얼마나 처절하게 망가지는지가 잘 보여서였다.
‘어차피 대세는 거스를 수도 없어.’
또 김문재 교수가 이런저런 루트로 알아본 바에 의하면 수혁이 쥐고 있는 줄이 그저 원장선에서 끝나는 것도 아니었다.
태화 생명 사장을 넘어 태화 바이오 사장 김다현이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여기가 일반적인 대학 병원이라면 그래도 개겨 볼 수 있겠지만.
태화는 기본적으로 기업 병원이었다.
이사장의 명이 절대적이다 이 말이었다.
‘그럴 거면 그냥 협조하는 게 낫지.’
당랑거철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수레바퀴에 덤비는 사마귀처럼 무식한 짓은 저지르지 말라는 뜻인데, 김문재는 자신이 바로 그런 사마귀가 되고 싶진 않았다.
당장 여기서 나가게 되면 불러 주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평소에 인맥 관리는커녕 대학 교수로 부릴 수 있는 진상을 다 부리고 있어서였다.
‘게다가 이 환자……. 이 환자는 진짜 모르겠어.’
무엇보다 오늘 외래에서 본 환자가 너무 어려웠다.
예전 같았으면 설마 그래도 교수가 모르는 것을 한낱 레지던트가 어찌 알까 했겠지만.
얼마 전 수혁은 면역 글로불린 D 증후군도 진단해 낸 참이었다.
그 얘기를 소아과 쪽에서 전해 들었을 때 어찌나 놀랐던지.
“이 환자인데, 기록 띄워 봐.”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두근거릴 지경이었다.
만약 류마티스 쪽으로 협진이 왔다고 해도, 자신이 그 질환을 제때 진단할 수 있었을까?
자신이 없었다.
“아, 네.”
“일단 히스토리를 보면…….”
김문재 교수는 심각한 얼굴로 차트를 깠다.
그러자 외래에서 썼다고는 믿을 수 없으리만큼 기다란 기록이 주르륵 떴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환아의 나이였다.
“어…….”
“응, 어린애야. 나한테 다니는 목사님 한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베이비 박스 사업을 하시거든.”
“아.”
베이비 박스란 아이를 낳았는데 형편이 곤란해 키우기 어려운 지경이라면, 제발 유기하지 말고 이 박스 안에 넣어 달라는 취지로 만들어진 사업이었다.
쉬운 사업은 아니었다.
부모의 익명성이 보장되는 만큼 다양한 아이들이 보내지기 때문이었다.
그중에는 이번 케이스처럼 아픈 아이들도 다수 섞여 있었다.
사정은 이해할 수 있었다.
가뜩이나 어려운데, 선천성 질환까지 있는 아이를 키우는 건 고난일 테니.
수혁이나 대훈도 태화에서 지원하는 이 사업에 대해선 알고 있었기에 별다른 질문을 더 하는 대신, 차트에 집중했다.
“환아는…… 일단 생후 1달에서 2달 정도로 추정돼. 워낙 아팠어서 그런지, 아니면 영양이 별로여서 그런가……. 작아. 2.9kg이야.”
“아, 그렇네요. 환아 주수나 이런 건 전혀 알 수가 없는 건가요?”
“알 수 없지. 아이 엄마가 누군지도 몰라. 원래 그런 사업이니까.”
“그렇군요.”
김문재 교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수혁을 잠시 돌아보았다가, 말을 이었다.
다시 시선을 차트를 향해 고정하고서였다.
“그래도 아이 엄마가 적어 놓은 메모에 아이 증상이 쓰여 있긴 해. 여기 보면……. 아이는 태어나고 얼마 안 돼 열이 있었고…… 발진이 있었다고 해. 발진 양상은 내가 찍은 거, 보이지?”
“음. 특징적이진 않네요.”
“그래, 맞아. 발진은 그래.”
이 정도의 발진은 너무 많은 질환에서 일으킬 수 있었다.
게다가 아이가 방치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지금은 벌레 물림 상처까지도 생각해야만 했다.
[아뇨, 벌레 물림은 아닙니다. 너무 패턴이 일정합니다. 일부러 개미굴에 던져 놨다면 모를까, 이런 형태는 어떤 질환에 의한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오케이.’
다행한 점이 있다면 수혁에게는 바루다가 있다는 것이었다.
녀석은 순식간에 사진을 파악해 수혁에게 자신이 분석한 바를 보고했다.
평소보다 신속했는데, 이미 히스토리에서 중한 환자일 것이라는 게 짐작이 갔기 때문이었다.
“얼굴을 봐.”
“아.”
짐작은 곧 확신이 되었다.
아이의 얼굴이 일반적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