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345화 (345/1,303)

345화 미지의 영역 (2)

수혁은 내친김에 영상까지 보고 가자는 생각으로 자리에 죽치고 앉아 있었다.

마냥 그러고만 있던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한국인 중에서도 성질이 퍽 급한 편인 데다가, 바루다에 의한 닦달이 일상화되어 버린 존재가 바로 수혁 아니던가.

“아, 네. 이수혁 선생님.”

“네네. 안과 선생님. 당직이신가요?”

“네. 당직입니다.”

“혹시 애기 눈…… 산동 해서 볼 수 있으신가요?”

바로 안과 당직의에게 전화를 날렸다.

대부분의 레지던트들이 그러하듯 상대 또한 수혁에게 꽤 친절했는데, 딱 산동 얘기가 나오기 전까지였다.

“아…….”

산동이라는 게 동공을 확대시켜서 그 안을 보기 위한 검사이지 않은가.

이걸 해달하는 건 곧 안을 봐 달라는 뜻이었다.

괜히 산동이 잘 되나 안 되나 응급으로 봐 주세요, 뭐 이딴 말을 하는 미친놈은 없었다.

“어렵나요?”

“네, 제가 아직 1년 차라서요.”

“백 없을까요?”

“2년 차 선생님이 계시긴 한데…….”

1년 차의 목소리에서 주저함이 느껴졌다.

몇 가지 뜻이 있을 터였다.

2년 차가 무섭다거나, 아니면 2년 차도 못 한다거나.

‘안과가 분위기가 어딜 가든 엄하긴 하지.’

[왜 그럴까요?]

‘모르겠네. 근데 보통 선배가 안 보여 주면 아무것도 안 보이는 과들이 그렇다고 하더라.’

[아……. 도제식 교육이다, 이건가요?]

‘그렇대. 나도 잘 몰라.’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

아예 경험한 적이 없다고 하면 모를까, 수혁도 안과를 인턴 때 돌아봤기 때문이었다.

이제 좀 잘 수 있나 하면 일이 무섭게 떨어지는데, 데드라인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그것만 해도 열 받는 일인데, 더 무서운 일은 다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점이었다.

태화같이 그래도 내부적으로 감사 시스템이 있는 곳에서도 이런데, 다른 곳은 어떨까.

수혁으로서는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그럼 혹시 3년 차 이상 선생님 중에 지금 병원에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제가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제 곧 춘계 학회라 있으실 거 같습니다.”

“아하. 네, 알겠습니다.”

해서 수혁은 그냥 직접 연락하기로 했다.

다행히 동기 중에 아는 번호가 있기는 하지 않는가.

생전 연락도 안 하다가 이럴 때만 전화 건다는 게 조금 민망하기는 하지만.

아마 상대 또한 높은 확률로 그럴 게 뻔했다.

“어, 수혁이? 웬일?”

“응, 다름이 아니라 환자 때문에.”

“당직 안 받아? 이 새끼가 미쳤나.”

수혁의 말에 동기는 전형적인 마이너 서저리 위 연차의 반응을 보였다.

흔히 생각하기에 사람이 많은 과일수록 위 연차의 힘이 강할 거 같겠지만 실상은 반대였다.

오히려 작은 과에서 더 파괴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안과는 매일 얼굴을 봐야 하지만 내과는 솔직히 4년간 몇 번 볼 일도 없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수혁은 괜히 애먼 사람 잡겠다 싶어 재빨리 말을 이었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1년 차나 2년 차가 보기 좀 어려울 거 같아서.”

“아……. 나한테 봐달라고?”

아무래도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되고야 말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말 몇 마디 보태면 되는 일과 직접 몸을 움직여야 하는 일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어, 부탁 좀 할게. 시설에서 온 앤데……. 눈만 좀 봐줘. 좀 많이 안 좋아.”

“도움이 될 거 같아?”

“응, 큰 도움 될 거 같아.”

“결정적이야?”

“어. 결정적.”

“음.”

그래서 그런가, 이것저것 묻는 말이 많았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물어봐 놓고서 안 된다고 하는 건 또라이뿐일 테니까.

수혁이 지원할 때도 안과는 인기 과였기에 그런 친구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성적뿐만 아니라 평판도 보기 때문이었다.

들어가기만 하면 들어가기 전에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던지와 관계없이 그냥 안과 사람이 되는 게 의문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근본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알았어. 일단 내가 인턴 통해서 산동 물약 보낼 테니까……. 그거만 넣어놔 줘. 넣고 문자 주면, 20, 30분 후에 가서 볼게.”

“오, 고맙다.”

“아냐, 이 정도는 해야지. 우리 동긴데.”

“그래, 그래. 나도 도울 수 있는 일 있으면 도울게.”

“기대할게.”

게다가 수혁이 내년도부터 한자리하게 될 거란 소문이 이미 파다하지 않은가.

원래 의대 교수 하나쯤은 알아 두면 좋은 법이었다.

그 교수가 동기면서 또 태화에 있다면 더더욱 그랬다.

제아무리 태화 출신이라고 해 봐야 나가고 몇 년 지나면 남 되지 않겠는가.

본인이 벌써 의국 선배들을 그렇게 대하고 있으니, 미래도 선명히 보였다.

‘이제 슬슬 부모님들도 아픈 곳 하나씩 나오는데……. 기왕이면 태화에서 보게 하는 게 좋지.’

그래도 이렇게 저렇게 하면 남들보다야 좀 편히 볼 수는 있겠지만.

교수 직통으로 부탁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해서 안과 3년 차는 빚이라도 좀 지워 둘 생각으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곧 3년 차가 말한 대로 인턴이 점안액 하나를 덜렁 들고 나타났다.

안과에서 어지간히 빡세게 돌리는 모양인지 얼이 좀 빠져 있는 듯한 얼굴을 하고서였다.

태화 출신이거나 다른 의과 대학 수석, 차석 한 친구일 텐데 이렇게 되다니.

과연 인턴은 만만한 과정이 아니었다.

“어…….”

“인턴 선생님. 여기예요.”

“아, 네. 여기 있습니다.”

“응, 고마워요.”

“아닙니다!”

심지어 인사도 잘 받지 못한 채 후다닥 달려갔다.

뛰어서 아끼는 시간만큼 더 잘 수 있을 테니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수혁은 잠시 고달팠던 인턴 생활을 떠올리다가, 이내 몸을 일으켰다.

“어, 선배님.”

그러자 안대훈이 득달같이 달려와 수혁을 부축했다.

이제 불편한 다리에도 많이 익숙해진 참이었지만 이럴 땐 부축이 큰 도움이었다.

“어, 고마워.”

“어디 가시려고요?”

“애 결막염 있다고 했잖아. 그런데 시설에서 뭐 산동 해서 본 건 아닐 거 아냐.”

“아……. 안과 연락하시더니, 그런 거예요?”

“어. 이거 산동액인데.”

“아이, 앉아 계셔요. 제가 넣고 오겠습니다.”

“넣을 줄 알지?”

도와주는 건 고맙지만, 병원에서는 능력껏 하는 게 제일 중요했다.

괜히 의욕만 앞섰다가 삽질 되면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럼요. 저 안과 인턴 돌았습니다.”

“오, 그럼 부탁할게.”

하지만 안과 인턴이라는 말에 수혁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 혹독한 시간을 보낸 놈이라면 믿을 만하지 않겠는가.

“네, 선배님.”

해서 수혁은 대훈을 보낸 후, 동기 녀석에게 문자를 넣었다.

동기는 학회 때문에 바쁜 건지 ‘ㅇㅋ’라는 말만 보내왔다.

속상할 까닭은 없었다.

다 같이 바쁜 병원에서 이런 거 하나하나 신경 쓰다가는 한도 끝도 없을 터였다.

수혁은 대신 이제 슬슬 올라오기 시작하는 영상을 띄웠다.

[음.]

‘음.’

딱 보자마자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일단 머리뼈가 두꺼워지거나 해서 둘레가 넓어진 것이 아니란 것을 단박에 눈치챌 수 있어서였다.

‘경막하에……. 뇌척수액이 좀……. 몰린 느낌이 있는데?’

[느낌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습니다.]

CT에서는 그저 수두증 소견만 보일 뿐이었다.

이것만 해도 좋은 일은 아니긴 했지만.

그래도 예상 가능한 상황 아니었던가.

만약 뇌압이 아주 높은 상황이라면 당장 처치가 필요하겠지만.

수혁이나 바루다가 보기에 그런 상황까지는 아닌 것 같았다.

‘조영증강도 되고…….’

[그렇습니다. 뇌수막염이 강하게 의심됩니다.]

‘그럼 감염이 생겼다는 건가?’

[알 수 없습니다만, 여기 보시면 유두부종도 관찰됩니다. 이 정도의 부종이라면 당연히 안과 검진에서도 보일 겁니다. 응급으로 처치해야 될 정도의 뇌압은 아닐 가능성이 크지만…….]

‘만성으로 지속되면 이건 무조건 뇌에 대미지가 가. 아마도 뇌가 좀 작아질 수 있겠지.’

[네, 그렇습니다. 우선 뇌수막염에 대한 검사 및 처치가 필요합니다.]

‘오케이.’

단순한 수두증이라면 좀 더 지켜볼 수 있겠지만.

뇌수막염에 의해 발생한 수두증이라면 일단 원인이 뭔지 봐야 했다.

이런 나이에서 발생하는 뇌수막염은 자칫 그 자체로 치명적일 수 있었다.

아예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게 될 공산이 크다, 이 말이었다.

수혁은 자신도 모르게 환자가 있는 병실 쪽을 돌아보았다.

마침 안과 동기가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보호자는 그런 안과 동기에게 고개를 숙여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하고 있었고.

‘저게 의미가 있으려면…….’

[잠깐만, 수혁. 다시 모니터 보기를 요청합니다.]

‘왜?’

[분석 결과 이상한 부분이 하나 더 있는 것으로 사료됩니다.]

‘어디?’

[달팽이관입니다.]

‘달팽이…… 관?’

[네.]

바루다의 말에 다시 한번 더 되뇌었음에도 굉장히 생경한 단어처럼 느껴졌다.

일반인들에게도 친숙한 의학 용어일 정도로 유명한 기관이긴 했지만.

사실 내과 의사로 살면서 흔히 보는 기관은 아니었기에 그랬다.

심지어 방금 전까지만 해도 brain MRI에서 달팽이관 쪽을 봐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디…… 어?’

[조영 증강이 있습니다.]

‘여기에 염증 반응이 있다, 이건가?’

[네. 그렇습니다.]

‘음.’

뇌수막염이 있는 경우 달팽이관에도 손상이 갈 수는 있었다.

고열에 의해 달팽이관이 망가지는 건데, 이 환아는 체온이 37.3도에 불과했다.

정상 체온이라고 하기는 좀 뭣할 수 있지만, 의학적으로 발열이 있다고 판정할 수는 없는 체온이라는 얘기.

애초에 달팽이관이 손상될 정도의 고열은 40도를 웃도는 열을 말했다.

다시 말해 이 환자에서 관찰되는 달팽이관 손상의 원인은 그런 게 아니란 뜻이었다.

‘달팽이관에 직접적인 염증이 있다라……. 이것도 유전 이상과 연관이 있을까?’

[히스토리를 명확히 알지 못하니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확률로 따진다면 가장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너무 동반하는 증상이 많은데……. 이게 대체 뭐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예후가 좋지는 않을 거 같군요.]

‘음.’

바루다의 말이 잔인하게 들리긴 했지만.

사실 의학적으로만 보면 맞는 말이었다.

동반되는 이상이 많으면 많을수록 예후는 좋지 않을 확률이 치솟았으니까.

낙담하는 마음이 들어 한숨을 쉬고 있으려니, 안과 동기가 밖으로 나왔다.

아깐 인사도 없이 그냥 들어가더니 이번엔 스테이션 쪽으로 직행했다.

수혁을 똑바로 바라보면서였다.

“어, 수혁아.”

“응. 어때?”

“야, 보길 잘했다. 결막염만 있는 게 아니라……. 유두 부종도 있고. 전방 포도막염이 있어.”

“아…….”

“그런데 뒤는 완전히 깨끗하네.”

“뒤는?”

“응. 후방 유착은 전혀 없어. 염증이 완전히 앞으로 몰려 있어.”

“아…….”

눈에서 전방으로 몰려 있는 염증이라.

지금으로서는 뭐라 판단하기 어렵지만, 중요한 단서가 될 거 같았다.

수혁은 고마운 마음에 동기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마워. 이거 결정적일 거 같아.”

“고맙긴. 야, 내가 포도막염에 대해서는 처방 넣어 놓을게. 이건 시력 나가.”

“어어, 고마워.”

“그럼 나중에 커피라도 사.”

사라지는 동기를 보고 있으려니, 묵묵히 있던 바루다가 입을 열었다.

[이제 문제 목록이 더 추가된 셈입니다. 일단 이걸 추론하기 전에, 환자의 뇌수막염부터 검사해 보길 요청합니다.]

‘아 맞아. 오케이, 바로 하지.’

[감염인지 아닌지에 따라 주요 단서가 하나 더 나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