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화 가자 싱가포르 (1)
신현태, 이현종이 애정 싸움 비슷한 것을 치르긴 했지만.
아무튼 간에 일은 제대로 하기는 했더랬다.
기일에 맞추어서 일이 끝나기는커녕 훨씬 일찍 끝났다, 이 말이었다.
덕분에 이현종은 주말마다 신현태와 18홀이 아니라 36홀을 돌 수 있었고.
신현태는 무거워진 다리를 끌고 병원 로비에 들어서야만 했다.
캐리어 하나를 끌고서였다.
“아이고.”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 그 형……. 골프 못 쳐서 한이 맺혔나.’
그나마 아내도 골프를 같이 쳐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부부싸움으로 번졌을 뻔한 일정 아니었던가.
아니, 같이 쳤는데도 좀 불편해져 있었다.
너무 힘든 일정이라 그랬다.
‘나도 이렇게 힘든데……. 오늘 출근은 할 수 있으려나?’
노는 사람도 아니고, 바쁘기로 치면 오히려 신현태보다 더한 사람이었다.
돈도 더 잘 벌었는데, 그걸로 구박도 안 해서 감사할 뿐이었다.
그런 아내를 이렇게 고생시키다니.
모자란 형을 가장 친한 친구로 둔 대가치고는 제법 혹독한 편이었다.
“아, 교수님!”
“어어. 수혁아.”
하지만 상념은 수혁의 얼굴을 보자마자 휘리릭 사라졌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신날 지경이었다.
‘얘랑 둘이 싱가포르 간다!’
놀러 가는 것도 아닌데 그랬다.
“와……. 가방 엄청 크시네요?”
“어? 어, 뭐 그렇지. 정장 챙겨야 되잖아.”
“저는 그냥 입고 가려고요.”
“그래서 정장이구나. 근데…… 너 거기 되게 더울 텐데, 괜찮겠어? 창이 공항이야 시원한데……. 딱 밖에 나가면 후덥지근해.”
“아, 그래요? 봄인데…….”
싱가포르 가면서 봄 타령이라니.
아마 수혁이 아니라 다른 레지던트였다면 여기서 뒤통수라도 후려갈겼을 터였다.
하지만 수혁이지 않은가.
‘귀여운 녀석. 이렇게 허당끼도 있어야 사람 같지.’
답답하기는커녕 미소만 지어졌다.
“아냐, 아냐. 더워. 일단 옷 갈아입고 와. 근데 가방이 작네. 이거밖에 없니?”
“아……. 네. 제가 해외 나가 본 게 레지던트 때 가 본 게 다라서요. 두바이도 사실 더웠는데 생각을 못 했네요.”
“그럴 수 있지. 동남아가 더울 수 있다는 걸 어떻게 다 알겠니.”
너무 다 이해를 해 주려다 보니까, 조금 비꼬는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너무 애쓰네요. 그러게 제가 더울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차피 안 걸어 다닐 거니까 괜찮을 줄 알았지.’
[두바이에서처럼 기사 붙을까 봐서요? 거기 두바이 왕자 옵니까? 아니면 김다현 사장이 갑니까.]
‘그건 아니지…….’
물론 수혁이나 바루다가 오해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기엔 이미 신현태를 너무 오래 겪었다.
“어어, 수혁아! 아직 안 갔지!”
해서 순순히 옷을 갈아입고 대강 양복을 안 구겨지게 들고 가야겠단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누군가 달려들었다.
조태진이었다.
얼굴은 알아보지 못했지만.
번쩍 안아 들리는 순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교수님!”
“넌 왜 왔어, 이 새벽에.”
“왜 왔긴요. 수혁이 가기 전에 보려고 왔지!”
조태진은 껄껄 웃고는 수혁을 내려놓았다.
그리곤 끌고 온 무언가를 건넸다.
가방이었다.
“어……. 이게 뭐예요?”
“가방이지. 너 전에 아이오와 갈 때도 그렇고, 두바이 갈 때도 그렇고 보니까 너무 가방이 후지더라고. 네가 그렇다고 뭐 돈 주면 새로 살 놈도 아니고……. 그래서 내가 샀지.”
가방은 척 보기에도 좋아 보였다.
잘 굴러가고, 무엇보다 튼튼했다.
이것이 수혁의 감상이었다면, 신현태에게 가장 인상적인 건 역시 브랜드였다.
‘미친놈이 캐리어 가방을 명품을 줘?’
어차피 수혁은 통합진료센터로 가게 될 몸 아닌가.
그 말은 곧 자기 품을 떠났다 이건데 왜 이렇게까지 공을 들이는지가 궁금했다.
‘나보다 더 친해지려고 이놈이.’
물론 답은 알고 있었다.
신현태도 수혁을 딱히 제자로서만 좋아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이런 똑똑한 놈은 그냥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지는 법이었다.
질투가 나기 시작하면 얘기가 좀 다를 수도 있겠지만, 다행히 신현태는 이현종 때문에라도 똑똑한 것에 대한 질투심에 대해서는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수혁에 대한 친밀도라면 어떨까?
‘절대 질 수 없다, 이 새꺄.’
해서 신현태는 신경질을 냈다.
“야, 뭐 이런 걸 줘. 가기 전에 불편하게!”
“내가 다 들었어요. 어차피 정장 넣고 갈 수가 없잖아, 이놈의 가방은. 내가 전에 들어 보니까…… 결국, 다 구겨져서 새로 다렸다며. 두바이야 일정이 좀 여유롭고 약간 관광 느낌이었다고 하지만. 여긴 아니잖아. 바로 가야 되지?”
“그…….”
“자자, 이거 봐. 이거 보면……. 따란. 안에 정장 포개서 걸게 되어 있어. 좋지?”
맞는 말의 향연이었다.
그렇다 보니 신현태도 더 끼어들지 못했다.
수혁은 아예 신이 날 지경이었다.
바루다도 그랬다.
가방 가격 따위는 짐작도 못 하고 있음에도 그랬다.
[확실히 가방 안에 정장을 걸 수 있게 되어 있으니 좋군요. 가뜩이나 와이셔츠도 몇 개 없는데……. 그러고 보니 받는 돈은 다 어따 씁니까?]
‘나갈 일이 없으니까 그냥 안 쓰고 있지.’
[나갈 일이 있잖아요? 그것도 외국을?]
‘너 두바이 다녀와서 이게 내 두 번째 외출이라는 거 알고 있냐? 첫 번째는 심지어 교수님들이랑 밥 먹으러 간 거야.’
[아…….]
바루다는 마냥 좋아하다가, 수혁이 점점 인간미가 없어지고 있는 이유를 깨닫고 혀를 찼다.
연애라도 하면 좀 나아질 거 같기는 했다.
비교 대상이 별로 없기는 하지만.
수혁이 여태 보아 온 드라마를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던가.
“그리고 봐 봐. 빨래할 거는 여기다 넣으면 돼. 여기 이렇게 보면 탁탁 개서 들어가게 되어 있는 곳도 있고.”
“와, 진짜 좋네요.”
“그렇지?”
“감사합니다, 교수님.”
“인마, 이럴 때는 형이라고 하는 거야.”
“네?”
“이현종 교수님한테 아빠라고 하고, 신현태 과장님한테 삼촌이라고 하잖아. 나한테는 형이라고 해.”
“어…….”
이현종한테 아빠라고 하는 건 맞았다.
하지만 신현태한테는 삼촌이라고 한 적이 없지 않은가.
해서 신현태를 돌아봤더니, 삭 하고 눈을 피했다.
‘설마 내가 삼촌이라고 부른다고 했나.’
왜 지위도 높고 나이도 많은 사람들이 대체 왜 이럴까.
“형이라고 해 주라.”
몹시 궁금했지만, 지금은 그 호기심을 처리할 때가 아니었다.
조태진이 부디 자신만 소외시키지는 말아 달라는 얼굴로 수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런 비유를 교수에게 감히 써도 되나 싶기는 한데, 비 맞은 고양이 같았다.
전직 씨름부 출신 고양이라니.
끔찍하지만 어쩌겠는가.
“알겠어요, 형…….”
“옳지. 한 번 더.”
“형.”
“더.”
“형.”
“아, 고만해, 이제!”
형이라는 호칭을 그만두게 된 것은, 신현태가 역정을 부리고 나서였다.
참을성이 없다는 말을 쓸 수는 없었다.
벌써 열 번도 더 넘게 반복하고 있었으니까.
조태진 스스로도 내가 좀 심했다 하고 있던 참이었기에,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네네. 과장님. 그럼 제가 수혁이 가방 챙길게요. 어차피 갈아입고 오는 동안 시간도 없고.”
“그걸 왜 네가 챙겨.”
“삼촌이 뭘 이런 거까지 해요. 형이 하는 게 낫지.”
“그…….”
신현태는 사실 삼촌이라 불려 본 적이 없다는 말을 하려다 애써 참았다.
지금 그런 말을 했다간, 조태진에게 평생 진 기분이 들 거 같아서였다.
“알았다. 네가 해라.”
해서 그냥 시키고 말았다.
그사이 수혁은 딸각 소리를 내며 사라져 갔다.
간단하게 갈아입을 옷을 챙겨서였다.
“근데 과장님.”
딱 수혁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조태진이 입을 열었다.
꽤 진지한 얼굴이었다.
적어도 레지던트에게 형 소리 듣고 싶어서 난리 치는 놈이 지을 만한 표정은 아니었다.
“왜, 조 교수.”
“이번에 가시는 거 말이에요.”
“뭐, 이거 또 수혁이랑 둘이 간다고 뭐라고 할 생각이면 하지 마. 안 그래도 현종이 형한테 구박 엄청 들었어.”
그러나 정작 꺼내는 소리는 결국 싱가포르 얘기였다.
해서 화를 팍 내려는데, 조태진이 급히 말을 이었다.
“아니, 아니. 그런 거 아니고요. 내가 무슨 미친놈입니까.”
“그럼 뭔데.”
“원래 화이자에서 여는 세미나가…… 되게 폐쇄적이었잖아요. 화이자랑 거래하거나 R&D 투자된 곳들만 들어갈 수 있고 그랬던데.”
“아, 맞아. 부스도 그렇고, 참여자들도 그렇지.”
이유는 간단했다.
바이오 시장에서 보안은 생명보다 더 귀한 것 아니겠는가.
상대적으로 생산이 설계보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쉬워서였다.
물론 특허권이 다 설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뭐가 되었건 아직 시장에 내기 전에 다른 놈이 먼저 똑같은 약을 만들 수도 있다는 전제 자체가 불쾌했을 터였다.
“그런데 이번엔 부스만 제한이고 참여자는 신청을 받더라고요.”
“어?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설마 가냐?”
“아……. 미리 알았으면 가죠. 근데 저도 어제 들었어요.”
“음. 그건 뭐…….”
신현태는 단둘이 오붓하게 가는 여행에 조태진이라는 방해꾼이 달라붙지 않았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조태진 또한 신현태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았지만.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정말 부러워서이기도 했고, 또 중요한 얘기를 꺼낼 참이기도 해서였다.
“제가 누구한테 들었는지는 안 궁금하세요?”
“아, 그래. 누구한테 들은 건데? 그게 오픈이라고 해도…… 완전 오픈이 아닐 텐데.”
애초에 폐쇄적인 세미나 아닌가.
TV 광고를 때렸을 리도 없으니, 오픈이 되었다는 걸 안다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이 이 분야에서 꽤 중요한 일을 한다고 가정할 수 있었다.
심지어 부스로 참여하는 신현태와 이수혁조차 알지 못하는 사안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제 동기 녀석인데……. 아시려나. 보건복지부에 들어간 애 있잖아요. 본1 땐가 행시 붙어 가지고, 인터뷰도 했었는데.”
“아……. 대충은 기억난다. 근데 얼굴이랑 이름은 몰라. 그 친구가 그래?”
“네. 각국…… 그러니까 화이자가 판단하기에 그래도 보건 의료 쪽으로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국가의 의료 정책 관련 부서에 초청장이 왔대요.”
“초청장을? 다국적 제약 기업이?”
“네.”
“음.”
이상한 일이었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인 것은 맞지만, 다국적 제약 회사에서 좋아할 만한 나라는 아니기에 그랬다.
약 가격조차 시장에 맡기는 대신 정부에서 후려치고 있는데 어떻게 좋아할 수 있을까.
임상 시험은 또 놀라우리만치 개방적이어서 어느 정도 관계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그걸 감안한다 해도 절대로 호의적인 시선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이번에 디지털 헬스 케어 쪽이 좀 확대됐잖아요. 아니지, 들어 보니까 거의 뭐 처음 여는 거나 다름없다던데?”
“어, 그렇긴 해. 절반이 이쪽 부스니까…… 이만한 규모는 처음이지. 작년만 해도 10분지 1 정도밖에 안 됐거든.”
“네. 아무래도 그거 때문에 한국 정부에 어필하려는 거 같아요. 초청장이 굉장히 정중하게 온 데다가, 화이자 코리아에서 따로 찾아오기까지 했대요.”
“흠……. 그래? 그래서 정부에서도 간대?”
“네. 간대요.”
“오. 그럼 수혁이 소개시켜 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