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4화 가자 싱가포르 (2)
싱가포르 창이 공항은 사람 많기로 유명한 공항이지 않은가.
수혁과 신현태가 가는 날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싱가포르가 목적지인 사람 그리고 싱가포르를 경유해 다른 곳으로 가는 사람 등으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짐 찾았어?”
“네. 여기.”
“잘했다, 빨리 나가자. 여기 더 있다간 치여 죽겠어.”
“그러니까요. 와 여긴 진짜 사람 많네요…….”
해서 신현태는 급히 수혁을 데리고 공항을 빠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후덥지근한, 동남아 특유의 날씨가 둘을 반겨 주었다.
“으아.”
“옷 갈아입길 잘했지? 진짜 5분만 밖에 있어도…… 정장 다 젖는다니까.”
“그렇네요. 와…….”
아직 해 쪽으로 나가지도 않았음에도 그랬다.
열린 문 사이로 흘러나오는 차가운 바람이 아니었다면, 반팔을 입고 있단 사실도 딱히 도움이 되진 않았을 터였다.
그야말로 남국이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깨닫게 해 주는 날씨였다.
“일단 택시를 타자. 우버 불렀거든? 번호가…… 오 저거네.”
다행한 것은 옛날과는 달리 공항 앞에 늘어선 택시를 다 기다렸다 탈 필요가 없어졌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신현태는 나름 신문물에 익숙한 편이라 이미 학회 갈 때마다 여러 번 써 본 적이 있었다.
그 덕에 수혁도 편하게 택시에 바로 올라탈 수 있었다.
“차가 좀 작지? 그나마 큰 걸 불렀는데도 이렇네.”
“네? 아뇨. 둘이 타기엔 충분한대요?”
“그래. 이게 목적지도 등록한 대로 가니까 좋더라고. 너도 혼자 외국 나갈 일…… 이제 종종 생길 테니까 가면 써 봐.”
“네, 감사합니다.”
숙소는 클락키 근처에 있는 비즈니스 호텔이었다.
나름 4성 호텔이고 또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것이라 시설이 후지다는 느낌은 없었지만.
아무래도 직전 여행지가 두바이였고 또 김다현과 왕자 덕에 정말 좋은 곳에 묵고 온 마당이었기에 비교를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 속물인 바루다가 더했다.
[후지다…….]
‘후지긴, 인마. 이만하면 깨끗하지.’
[로빈데 층고 낮은 거 보세요. 이래서 숨이나 쉬겠나?]
‘3미터는 되어 보이는데 뭔 소리야. 내가 최홍만이냐?’
[그래도 영 답답한데요.]
‘어차피 비즈니스 호텔이잖아. 앞으로 학회 가면 거즘 이런 데 묵을걸.’
생각해 보면 학회 차 간 곳에서 좋은 호텔에 묵는다는 거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어차피 대부분 시간은 학회에서 보내지 않겠는가.
게다가 학회에서 나온다 해도, 어차피 거기서 만난 이들과 시간을 보내기 마련이었다.
놀러 가는 학회는 60세 이상의 교수들에게나 허용되는 편이었다.
그마저도 요새는 줄어들고 있었고.
[음.]
‘입술 내밀지 마. 그런 표정 아주 짜증 나.’
[왜요? 드라마에서 보니까 이런 표정 지으면 상대가 어떻게든 해결해 주던데?]
‘그건…….’
네가 주인공이면 그럴 수도 있단 말을 하려다 참았다.
일단 그냥 바루다의 이런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게 어이없을뿐더러,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도 없었다.
벌써 신현태가 다리가 불편한 수혁을 대신해 체크인을 마치고 돌아오고 있었다.
“자, 올라가서 옷만 갈아입고 바로 가자. 여기서 컨벤션홀까지 거리가 좀 있어. 부스야 뭐 알아서 설치하고 있을 텐데……. 그래도 가 보는 게 좋지. 이건 우리가 호스트니까.”
“아, 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무리를 해도……. 그쪽으로 호텔을 잡을 걸 그랬네. 미안.”
“아, 아닙니다. 교수님.”
수혁이 괜찮다고 했음에도 신현태는 어쩐지 좀 아쉽단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여간 너무 착하셔서 탈이야.’
[단지 미안해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맞을까요?]
‘안 그럴 일이 뭐가 있어?’
[그건 모르겠습니다.]
수혁의 판단이 냉정하게 보면 맞을 터였다.
신현태쯤 되는 사람이 왜 이런 표정을 짓고 있겠는가.
미안해서가 아니라고 하면 달리 설명할 수 있는 말도 없었다.
하지만 신현태의 진짜 이유는 좀 달랐다.
‘아까 조태진이한테는 형이라고 했지…….’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교수라는 놈이 어떻게 그렇게 뻔뻔하게 형이라는 호칭을 레지던트에게 요구한단 말인가.
더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건 그게 너무 부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나한테는 삼촌이라고 해! 하고 소리치고 싶었다.
‘이게 입 밖에 내기가 어렵네.’
벌써 인천공항으로 가던 밴 안에서도, 비행기에서도, 여기 오는 차량에서도, 지금 이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몇 번이나 고민했는지 몰랐다.
사실 삼촌과 조카 같은 사이인 것은 맞는 거 같은데.
이미 그렇게 생각한 지도 오래됐는데.
그래서 호칭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와, 조태진 이 개새끼.’
이현종한테 아빠라고 하는 건 용인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은가.
이미 남들 앞에서, 그것도 병원 안도 아니고 학회 가서 내지른 마당에 그걸 뭐 어쩐단 말인가.
수혁에게 해가 되는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서 말렸겠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불세출의 기인이자 천재라 평가받는 이현종의 아들이란 평은, 힘이 됐으면 됐지 반대가 될 확률은 거의 없었다.
‘선수를 쳐? 선배는 가만히 있는데?’
하지만 조태진이 앞서 나가는 것을 눈앞에서 보고 있자니 참으로 착잡했다.
특히 둘이 있을 땐 삼촌이라고 부른다고 거짓말한 결과라는 걸 신현태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돌리고 싶은데 지금은 그럴 수도 없었다.
이미 조태진은 수혁의 형이었고, 자신은 한낱 구라쟁이에 불과했다.
“교수님? 뭐 하세요?”
“어, 응?”
수혁이 부르는 소리에 정신은 차려 보니, 반바지를 반쯤 내리고 멍하니 서 있었다.
어느새 방 안에 들어와서 옷을 갈아입다가 중간에 조태진을 떠올리면서 생각도 멈춰 버린 모양이었다.
하여간 망할 놈이었다.
조카 앞에서 이런 꼴로 서 있게 하다니.
“어어, 뭐 생각 좀 하느라. 그래, 빨리 갈아입어야지.”
신현태는 따지고 보면 별 잘못도 없는 조태진을 속으로 씹어 대면서 옷을 갈아입었다.
체격이 꽤 좋은 편인 데다가, 워낙에 정장 입을 일이 많은 직업이라 그런지 태가 좋았다.
그에 반해 수혁은 뭔가 좀 이상했다.
남의 옷을 입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고 보니 면접 때도 그랬었던 거 같았다.
‘오, 옷을 사 줄까?’
신현태에게는 그게 기회처럼 생각되었다.
어떻게든 선물이라도 주면서 삼촌이라고 불러 달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체면 생각하면야 당연히 모양 빠지는 일이지만, 삼촌이라고 불릴 생각을 하니 눈앞이 흐려지는 기분이었다.
“교수님?”
“어? 어어.”
그러다 보니 양말을 신다 말고 있었다.
그다음에는 팔을 넣다가 그랬고, 또 다음에는 넥타이를 매다가 멈췄다.
모두 수혁에게 삼촌으로 불리고 싶단 생각 때문이었다.
[좀 이상한데?]
‘마음이 콩밭에 가 있으신가.’
둘이 완전히 정장을 차려입고 밖으로 나온 것은 옷을 갈아입기 시작한 지 10분도 훌쩍 지나서였다.
“오……. 여기가 컨벤션 홀이군요.”
“응. 엄청 유명한 호텔이야. 이거 때문에 이 일대 땅값이 올랐대.”
“막상 안으로 들어오니까 오히려 이 호텔 안에서는 이 호텔이 안 보여서 별로네요.”
“어, 정확해. 저 반대편에서 보는 뷰가 좋아서, 저기가 올랐대. 어떻게 보면…… 죽 쒀서 개 준 거지.”
“그렇군요. 그래도 컨벤션 홀이 되게 좋네요.”
“좋지……. 사람도 엄청 많네.”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의 컨벤션 홀은 둘의 말대로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아직 정식으로 행사가 시작하기 전임에도 그랬다.
부스를 설치하고 있는 인원들까지 있으니, 어쩌면 지금이 제일 혼잡한 시기일 수도 있었다.
“아, 닥터 리!”
어렵게 어렵게 배정된 자리를 향해 걸어가고 있으려니, 누군가 수혁을 불렀다.
미국 연수 같을 때 봤던 헨리였다.
화이자의 연구소장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는 물론이거니와, 앞으로 있을 연구 방향의 가닥을 잡는 세미나이니만큼 그가 온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도 아니었다.
“헨리. 요새는 좀 어때요?”
기억을 더듬어 보니 이메일로 안부를 물어본 지도 벌써 1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어찌 보면 좋은 일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연락이 왔을 테니.
“아주 좋아요. 약 때문인 걸 몰라 가지고 고생했던 시절을 생각해 보면……. 어휴.”
게다가 헨리는 정말 좋은 인상의 소유자가 되어 있었다.
처음 봤을 땐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전형적인 싸가지 없는 백인 남자였는데.
확실히 이명이 있으면 사람이 피폐해지는 모양이었다.
[보기 좋은 그림이군요. 데이터화해 두겠습니다.]
‘잉? 이걸?’
[언젠가 수혁이 공부하기 싫다고 할 때 이걸 들이밀면 열심히 하겠다, 싶어요.]
‘하.’
바루다는 훈훈한 광경에서까지 굳이 끼어들어서 이상한 소리를 해 댔다.
다행히 수혁은 이제 바루다의 멘탈 공격에도 그리 흔들리지 않았다.
“이쪽은 제가 모시는 신현태 교수님입니다.”
“아, 닥터 신. 이름은 알고 있습니다. 감염내과 쪽으로……. 꽤 유명하시죠.”
“감사합니다. 신현태입니다. 반갑습니다. 미국에서 수혁이가 도움을 많이 받았다던데요.”
“아뇨, 아뇨. 제가 도움을 받았죠. 평생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덕분에 이런 세미나에도 참석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둘을 소개하고 또 대화를 이끌어 나갈 수 있었다.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헨리. 이렇게 큰 세미나에 저희 프로그램이 올라오게 될 줄이야……. 이번엔 화이자뿐만 아니라 여러 국가 기관에서도 온다던데, 맞나요?”
“아뇨, 계획서 다 읽었습니다. 이미 완성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던데요? 그만한 성과면…… 관심 보낼 만한 나라나 병원 체인도 많을 겁니다.”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뇨, 아뇨. 진짜 그렇습니다. 저희가 딱 디지털 헬스 케어 분야에서 원하는 모델이 이거예요. 너무 무겁지 않은 프로그램이면서…… 기존의 업무 수행에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
원래 인공지능이 처음 바이오 헬스 분야에 소개되었을 때만 해도 사람들의 기대는 어마어마했더랬다.
드디어 의사들의 업무 수행이 대체되는 거 아니냐, 뭐 이런 얘기들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하지만 막상 도입하려고 해 보니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최초, 그리고 최고라는 평을 받던 왓슨이 어떻게 되었는가.
이젠 바루다와 같은 완성형 에이아이는 포기한 지 오래고, 단지 임상 시험 모집 같은 것들을 수월하게 하기 위한 프로그램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수혁과 신현태가 내놓은 이 제품은 현시점에서 그야말로 최고의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었다.
“아, 그런데 그때는 이름이 정해지지 않지 않았습니까? 혹시 그사이에 이름이 생겼나요? 그렇지 않다면 그냥 초안대로 ‘패혈증 예측 기기’로 가도 좋을 겁니다. 이름이 직관적이라.”
“음.”
헨리의 말에 수혁과 신현태는 서로를 돌아보았다.
둘이 정한 이름이 있어서였다.
바루다에 비하면 좀 약하지만, 프로그램 수준차를 생각해 보면 이게 딱일 거 같았다.
“거들다 어떨까요? 우리말로 돕다라는 뜻입니다.”
“돕다? 아……. 음, 취지에 맞는 이름 같은데요? 의료진을 도우니까요.”
“네. 그렇게 가려고 합니다.”
“좋죠. 알겠습니다. 그렇게 준비하라고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