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8화 거들다 (4)
이만한 성과를 낸 프로그램이 수가 불인정 판정을 받았다라.
안타까운 일이지만, 외국에 기반을 둔 기업들에게는 오히려 기꺼운 일이었다.
어떻게든 외국으로 판로를 뚫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그랬군요.”
물론 최윤섭으로서는 충격일 뿐이었다.
다시 한번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을 심감하게 되었달까.
스타트업이라 분류되는 곳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아마 누구나 저와 같은 종류의 비감에 젖어 본 적 있으리라.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하시거나……. 다른 아이디어가 생기시면 연락 주시죠. 그래도 연간 100건 가까이 컨설팅하고, 실제 수익 모델로 연결된 사업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 말은 곧 최윤섭 정도 경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능숙해졌다고 할 만큼 익숙해졌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최윤섭 박사는 계속 비감에 젖어 있는 대신 곧장 자신의 명함을 꺼내 수혁과 신현태에게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이건 제 명함입니다.”
“저는 명함이 없어서…… 교수님께 연락 주시면 저도 그냥 세트로 연락하셨다고 생각하시면 될 거 같습니다.”
둘 다 최윤섭 박사 이름 정도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정말 조금이라도 이쪽에 관심을 두고 있고, 특히 대학 병원에 적을 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기에 그랬다.
심심하면 국회에도 출석해 질의에 응답하고 보건복지부, 의협 등 의료와 연관된 여러 단체에 나와 발표하는 사람이지 않은가.
부르는 것에 비하면 별로 변하는 것이 없어 발표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의아하긴 했지만.
정책이라는 게 그렇게 휙휙 변하는 것이 아닌 데다가, 의료계의 의견도 전혀 일치되지 않은 상황이라 그럴 것이라는 게 정론이었다.
“네, 참……. 이만한 성과 내는 프로그램이 적은데 대단하십니다.”
최윤섭 박사는 딱히 여기서 그러한 얘기를 할 생각이 없었거니와, 뒤로 빼곡히 줄 선 다른 이들 때문에라도 대화를 빨리 마무리 지었다.
“그럼 조만간 뵙겠습니다.”
“네, 박사님.”
그렇게 최윤섭이 떠나 간 다음에도 신현태와 수혁은 자리를 뜨지 못했다.
이름만 대면 다 알 만한 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질서를 지키고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신현태는 몰라도 수혁은 다쳤을 수도 있었다.
그중에서 자리에 남은 건 의외로 구글에서 나온 사람이었다.
‘이 사람이 왜 계속 있지?’
[모르겠네요.]
바루다가 비록 인공지능이긴 하지만 이쪽으로 아는 건 쥐뿔도 없지 않은가.
개발된 결과물이지 개발한 주체가 아니어서 그랬다.
수혁이 아는 정도만 알고 있다고 보면 되었다.
아무래도 수혁보다야 조금이라도 더 체계화되어 있긴 하겠지만.
애초에 인풋이 적은 상황에서는 별 차이를 보이지 못했다.
“아까 말씀드렸는데……. 저는 구글에서 전자 의무 차트 팀을 이끌고 있는 장첸이라고 합니다.”
“아, 네. 장첸…….”
이름이 무척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생긴 것도 그랬다면 정말 잊지 못할 사람이 되었을 텐데.
외모는 그저 평범한 축에 속했다.
짧은 머리에 통통하고 안경을 낀, 편견일지 모르나 흔히 공학도라고 하면 떠올릴 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듣자니 한국에서는 수익화하지 못했던 거 같은데, 맞습니까?”
“아직은 그렇습니다. 아시다시피 한국은 시스템이 달라서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그렇죠.”
장첸은 오래 걸린다는 게 아마도 영원일 거라 짐작하면서 말을 이었다.
부스 내에 위치한 테이블, 그러니까 화이자에서 중요한 얘기 하라고 마련해 둔 곳으로 향하면서였다.
‘수혁아, 이 사람 뭐냐.’
‘모르겠어요. 근데…… 막상 관심 갖다가 다 간 걸로 봐서는 다른 사람들은 수익화 비전을 보지 못한 거 같아요.’
‘끝까지 남았으니까 다를 거라 이거지?’
‘네, 구글이면…… 세계적인 기업이잖아요. 거기 팀장이면 꽤 대단한 사람 아닐까요?’
‘사칭은 아니겠지.’
‘아닐 거 같아요.’
수혁은 잠시 장첸을 홀로 두고 신현태와 속삭이듯 대화를 나눴다.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아까 둘이 들어왔던 입구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보안 요원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드나드는 모두의 얼굴과 이름 그리고 아이디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잡상인이 들어올 수는 없을 거 같았다.
[저걸 뚫고 들어왔으면 그것도 그것대로 꽤 대단한 겁니다.]
‘아……. 그렇지. 그럼.’
바루다는 심지어 잡상인이더라도 인정해 줘야 한다는 반응이었다.
수혁이 생각하기에도 그럴싸했고, 수혁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신현태도 오케이였다.
‘현종이 형이 어차피 나는 도우미라고 했지.’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아이디어를 낸 것도, 연구비를 따낸 것도 심지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할 수 있었던 성과를 낸 것도 다 수혁이었다.
나머지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보조적인 역할만 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과실도 수혁이 주도적으로 따 먹어야만 했다.
‘그래, 우리 수혁이…… 삼촌이 도와줄게.’
아직 직접 삼촌이라는 말을 듣지는 못했지만.
둘이 손도 잡은 사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정말 이상한 일이었지만.
신현태는 자각하지 못한 채 수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말씀 다 나누신 겁니까.”
장첸은 둘이 대화를 끝마칠 때까지도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냥 기다리고 있기만 한 게 아니라 화이자에서 부스 참여자들 마시라고 사다 둔 커피까지 한 캔 까 잡수고 있었다.
넉살이 좋은 사람 같았다.
“네, 팀장님…… 이라고 부르면 되나요?”
“그냥 장이라고 해도 됩니다. 호칭이야 뭐 중요치 않죠.”
그뿐만 아니라 쿨한 사람 같기도 했다.
수혁과 바루다 그리고 신현태는 알 수 없는 호감을 느끼면서 대화에 참여했다.
“음, 저희 ‘거들다’에 관심이 있으신가 봅니다?”
“물론입니다. 지금 미국에서도 엄청나게 많은 앱이나 프로그램들이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가시적인 성과를 보이는 건 드물어요. 그리고 성과를 보인 것들은 모두 시간차가 있을 뿐, 상용화가 되었습니다.”
“그렇군요.”
신현태는 거기까지 말한 후, 수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물꼬는 튼 거 같으니 실제 책임자인 네가 나서라는 뜻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슬슬 입을 털 생각이었던지라 수혁은 별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제가 알기로 미국에서 상용화된 것들은…… 텔레닥터나 약 배달, 뮴, 프리 같은 게 있는데……. 저희도 가능할까요? 사실 환자들에게는 딱히 와닿지 않는 것들이라서요. 주로는 b to c 산업들이 주목을 받는 거 같아서요.”
“오.”
수혁의 말에 장첸이 놀라움을 표했다.
지금 이 말은 그래도 업계에 대해 최소한의 이해도가 있어야 나올 만한 말이어서 그랬다.
‘아, 그래. 이 나이에 벌써 부센터장이라고 했지. 태화면…… 칠성병원보다도 큰 병원인데 말야.’
태화 전자와 칠성 전자 모두 핸드폰 시장에서 구글의 안드로이드를 이용하고 있기도 하고 또 글로벌 시장을 사이좋게 갈라 먹고 있는 기업들이기도 하지 않은가.
애플과의 싸움에도 조금씩 밀리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 해도 점유율 자체는 어마어마한 기업들이었다.
모름지기 구글의 팀장급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이 두 기업에 대해서는, 딱히 모바일 부서가 아니라 해도 알고 있어야만 했다.
한국 기업과는 달리 원하면 언제든 부서가 변할 수도 있는 입장이라 더더욱 그랬다.
“맞습니다. 지금은 그렇죠. 주로 고객들에게 선택받거나, 환자들이 실제 효용을 크게 느낄 수 있는 상품들이 주도하고 있기는 합니다. 표면적으로는 확실히 그렇습니다.”
“표면적……?”
“하지만 b to b 시장이 훨씬 큽니다. 가령 텔레닥터만 해도 그렇죠.”
“텔레닥터가요?”
“원격 의료가 완전한 형태의 진료를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장첸은 얼굴에 친절한 미소를 띤 채 질문을 던졌다.
굳이 원격 의료에 대한 지식이 없다고 하더라도, 진료 현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답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늘 받아야만 하는 약을 받아야 하거나, 또는 지금 당장 병원에 가야 하는지 안 가도 되는지 정도에 대한 조언을 받는 건 무리가 없을 터였다.
하지만 반드시 의사를 만나야 가능한 형태의 진료가 훨씬 많지 않은가.
우선 검진만 해도 그랬다.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아는 게 아니라,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의사가 제일 잘 알게 되는 법이었다.
“아뇨, 그건 아니죠. 경우에 따라서는 대면 진료로 이어 주긴 해야겠죠.”
“그렇습니다. 원격 의료로 시작되었다 해도 결국, 대면 진료는 필수적입니다. 누군가 그 환자를 직접 봐야 해요. 가능하다면 의사도 환자도 원격 진료로 진료했던 사람을 원하겠죠. 기록에 남는다 해도 어찌 되었건 주고받은 걸 다 남길 수는 없으니까요.”
“음……. 그렇겠네요.”
“하지만 텔레닥터는 아직 지역 기반의 원격 진료를 지원하고 있지 않아요.”
“음.”
지역 기반의 원격 진료라.
수혁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신현태 또한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연신 팔뚝을 비비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결국, 큰 병원이 지역 의료를 접수하겠군요.]
‘1차 의료는 그대로 두면 다 망하겠는데.’
[의료 질이 떨어질 겁니다.]
‘이건 정책적으로 뭐 어떻게 보호책을 펼치긴 해야겠네.’
1차 의료의 역할은 결코 경시되어도 될 종류의 것이 아니지 않은가.
대학 병원에서 하지 못하는 일들이 거기선 가능했다.
물론 장첸은 의사도 아니고, 딱히 의료 환경에 대해 관심이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이게 될 것인지 아닌지에만 관심이 있었다.
공학도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내면엔 사업가의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일원화된 진료 차트가 필요합니다. 구글이 그것을 지원하고 있죠.”
“아…….”
“그 말은 곧 수많은 병원들의 차트를 저의 구글에서 만들고 있다는 뜻입니다.”
“거기에 이 프로그램을 편입시키겠다, 이 뜻이군요.”
“정확합니다. 어차피 병원들은 우리 아니면 애플을 선택해야 합니다. 양자택일인데, 거기서 이만한 성과를 낸 프로그램이 더 있으면 아무래도 이쪽으로 기울겠죠.”
“가능은 한 겁니까? 편입하는 게요.”
수혁의 말에 장첸은 슥 하고 부스를 둘러보았다.
여전히 모니터에서는 이현종이 떠들어 대는 영상이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장첸이 주목하고 있던 건 빈 컴퓨터였다.
아직 아무도 안 만져 봤겠거니 하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돌아가고 있었다.
“어, 저거.”
“제가 돌려 봤습니다. 태화 전자에 외주 주신 거죠? 거기서도 로열티 일부를 쥐고 있고요.”
“네, 그렇습니다.”
“태화 전자는 기본적으로 리눅수가 아니라 안드로이드 기반의 프로그램을 만드는 회사예요. 라이벌이 애플이니 그럴 수밖에 없죠.”
“아…….”
“아주 익숙하다 이거죠. 일주일만 있으면 이식할 수 있을 거예요. 프로그램 코드가 다 필요하긴 하지만…… 그거야 계약하면 바로 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로열티는 충분히 지불할 겁니다. 제 윗선이라 해 봐야 몇 없어요. 설득이 어렵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