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361화 (361/1,303)

361화 공룡들 사이에서 (2)

구글과 애플 틈바구니에만 끼어 있는 줄 알았더니, 화이자도 한 발 들이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공룡들 사이에서 숨 막혀 죽겠는 심정이었다.

적어도 신현태는 그랬다.

“계약서 검토를 도와주신다는 거죠?”

“그럼요. 직원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거…… 아마 뭐 빨리해야 된다고 그럴 거예요. 핑계는 다양할 겁니다. 시장이 급변하고 있다, 한 달 안에 시장 정리된다, 뭐 이런 식으로요.”

“음.”

“우리가 그렇게 하거든요. 신약 개발 중이거나 뭐라도 하나 해낸 회사들 살 때, 그게 루틴입니다. 마치 이게 막차인 것처럼 하는 거죠. 실제 그런 경우도 있지만 거의 그렇지가 않아요. 구글이나 애플이 아무리 자유로운 회사라지만, 계약서 들이밀 정도면 윗선까지 다 보고가 돼야 합니다. 그거 실패하면 담당자도 타격이 있어요. 조금 뒤로 미루고 태화 측에서도 계약 검토해도 아무 상관 없을 겁니다.”

“아……. 천천히 생각해도 된다 이거죠?”

“그렇죠. 보통 신생 회사들 이끄는 사장들이나 젊은 대표들이 실수를 많이 합니다. 본인들 꿈의 대상인 기업이 급하다고 빨리하자고 하니까 검토를 못 하고 도장을 찍어 버려요. 물론 애플이나 구글은 워낙 큰 기업이라 여론의 눈치를 보긴 하겠지만……. 글쎄 외국 기업에까지 신경을 쓸까요? 무조건 호의적으로 보는 건 좀 위험할 겁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대화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화이자는 확실히 호의로 접근한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말해 놓고 사기 치면 진짜 개새끼다.’

만약 그렇다면 당해 줘야 하지 않을까?

보아하니 연구소장이라 책상물림인 것은 신현태나 이 인간이나 도긴개긴인 거 같은데.

그런데 이만큼 능숙하게 호의를 표하고 뒤통수를 칠 수 있다면, 그건 맞아 주는 게 예의 같았다.

다시 말하면 그럴 리가 없어 보였다, 이 말이었다.

‘우리 마누라가 있었으면 훨씬 나았을 텐데…….’

부동산 계약이니 뭐니 하는 큰 건들에는 늘 아내를 대동했던 그 아닌가.

이건 그보다 더 큰 건인데 옆에는 의학 빼고는 많이 모자란 수혁이다 보니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 화이자라는 거대 기업의 인간이 그나마 도움을 주겠다 나서고 있으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어차피 계약서 초안이 작성되어 있다 해도 바로 보내진 않을 겁니다. 그게 또 협상하는 기술이라. 물론 지금 둘이 경쟁하고 있다는 것을 서로 알고 있고, 서로 그 계약 사안을 주고받을 만한 사이는 아니라 질질 끌지는 않겠지만……. 오늘 도착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아, 그럼…….”

“오늘은 어차피 부스 설치하고 다른 곳 구경하러 오신 거죠? 천천히 구경하시죠. 저는 내일 다시 직원이랑 오겠습니다. 내일은 시간 되시면 저녁이나 한 끼 하시죠.”

“아, 네네. 감사합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아뇨, 아뇨. 제가 정말 큰 도움을 받았어요. 사람이 달라졌다는 얘기를 듣는다니까요. 아무튼, 내일 뵙겠습니다. 오늘은 그냥 좀 쉬세요. 피곤하실 텐데.”

헨리는 악수를 청한 후, 아까 구글이나 애플 담당자가 그랬던 것처럼 휘리릭 사라져 갔다.

워낙에 컨벤션홀이 넓기도 한 데다가, 부스들도 많아서 마치 골목길과 같은 형상이 되어 가고 있었다.

조금만 눈을 떼도 어디로 갔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휴.”

신현태는 부스 밖으로 나가는 대신, 잠시 의자에 기대앉았다.

수혁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신현태처럼 지친 얼굴을 하고 있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다리가 뻐근해 오던 참이었다.

“어쩔래? 너 괜찮으면 구경해도 좋고. 아니면 숙소 근방으로 가서 좀 쉴까?”

“음…….”

수혁은 잠시 고민했다.

사실 심력 소모는 거의 없다시피 한 상황이었다.

모든 중요한 일은 죄다 신현태에게 맡겼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신현태 얼굴이 말이 아닌데요.]

‘그러게. 그럴 일이었나.’

[구글이랑 애플입니다. 저의 조물주 태화 전자에서조차 경계하는 기업이죠.]

‘음.’

사실 태화 전자가 저 둘을 경계한다기보다는 쫓고 있다고 해야 맞는 말일 테지만.

그런 말을 했다간 지랄발광할 것이 뻔했다.

대체 태화 전자에서 무슨 코드를 심어 놓은 건지 모르겠는데, 바루다의 태화에 대한 충성심이란 정말이지 대단한 것이었다.

“쉴까요?”

“아, 그럴까?”

“네. 클라키? 거기가 어차피 관광지 아닌가요? 저녁 먹고 돌아다니다가 들어가죠 뭐. 어차피 앞으로 며칠 계속 여기 아니면 세션 강의 들을 텐데요.”

“그래, 그게 좋겠다.”

해서 수혁은 별다른 말 없이 신현태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예상대로 신현태는 굉장히 기뻐했다.

바로 우버를 불러 숙소로 향했을 지경이었다.

샤워까지 하고 보송보송한, 반팔과 반바지로 갈아입고 나서야 얼굴이 조금 풀려 보였다.

“휴. 맥주라도 한잔해야겠다.”

“아, 저도요. 여기 진짜 후덥지근하네요.”

“그렇지? 여러 번 와 봤는데……. 날씨만 안 더우면 진짜 살기 좋을 거 같거든. 근데 너무 더워. 나같이 더위 타는 사람한테는 쥐약이야.”

“나갈까요?”

수혁 또한 반팔에 반바지 차림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나마 정장을 입고 있을 땐 마른 몸이 티가 안 나더니만.

이렇게 얇은 옷을 입으니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적나라했다.

“음.”

“네?”

“수혁아, 너네…… 3년 차 시험 보러 언제 가지?”

“12월이요.”

“그때 피티라도 끊어 줄까? 이대로 이거 되겠니? 하체 근육량이랑 수명이랑 연관 있다는 거 알지?”

“아……. 알기는 알죠.”

운동의 효용성이란 것은 굳이 입 아프게 떠들 필요가 없을 지경이었다.

예전에는 그저 지금 당장 건강해지거나, 근력을 키우는 데만 효용이 있지 않나 했지만.

연구가 점점 잘 설계되면 될수록 더 많은 효용이 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었다.

운동은 당연히 건강한 신체와도 연관이 있지만, 그 외에도 수명, 치매 예방, 암 예방, 우울증 예방 등등 인생 전반에 걸쳐 긍정적인 효과를 보였다.

[그래요. 보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살기 위해 운동을 해야 할 타이밍입니다.]

‘누가 몰라서 안 하나, 너무 바빠서 그렇지.’

[그거 환자들이 주로 하는 핑계 아닙니까? 이럴 거예요?]

‘너도 알잖아. 내가 얼마나 바쁜지. 돌이켜봐, 인마. 내가 진짜…….’

[음. 그렇긴 합니다.]

물론 그걸 다 아는 것과 실제 실천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기는 했다.

맨날 환자들에게는 담배 끊으라고 하면서 정작 자신은 끊지 못하는 두경부외과의사들도 있지 않은가.

노상 담배 때문에 생긴 암을 잘라 내고 거기에 다른 곳에서 떼온 살을 붙이는, 그야말로 끔찍한 수술을 하면서도 그랬다.

“일단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진 말고. 운동이야 천천히 하면 되지. 근데 하기는 해야 돼. 너 그거 다리 불편하다고 아예 안 하면……. 야, 그건 안 되겠어.”

“네, 교수님.”

신현태는 시무룩한 얼굴이 되어 고개 숙이는 수혁을 보며 아차 싶었다.

‘내가 자꾸 이런 얘기를 해서 삼촌이란 말이 안 나오나.’

그냥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면서였는데.

당사자만큼은 심각했다.

‘오늘 일단 옷을 사 주자. 체형이 다냐? 극복하면 되지.’

비록 옷을 잘 입는다고 자부할 수는 없지만.

이곳은 마침 싱가포르 아닌가.

정작 싱가포르에 사는 한국인들은 한국 갔을 때 쇼핑을 한다고 하지만, 어쩐지 쇼핑하기 좋을 거 같다는 착각을 주는 곳이었다.

“오……. 여기는 진짜…… 진짜 다국적 기업들이 있는 곳이다 싶네요.”

클라키라는 유흥가가 호텔에서 1분 거리에 있었다.

괜히 싱가포르가 다국적 기업들의 천국이라 불리는 게 아니라는 걸 과시라도 하듯, 거리에는 정말 다양한 인종이 우글거렸다.

누가 봐도 관광객으로만 보이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냥 이곳에 사는 것 같은 외국인들도 적지 않았다.

“메뉴만 정하면 식당은 내가 정해 줄게.”

신현태는 인파에 휩쓸려 가지 않도록 구석진 자리에 선 채 수혁을 바라보았다.

일단 싱가포르는 워낙에 학회가 자주 열리는 곳이기도 하거니와, 수혁과 둘이 오는 참이라 미리 이것저것 알아본 마당이었다.

다행히 아내 통해 이쪽 지사에 파견 나온 사람과 연결이 되어 맛집만은 자신 있었다.

“음…….”

수혁은 잠시 고민에 빠진 척을 하며 바루다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바루다가 수혁보다 오히려 더 식탐이 강해진 지 오래 아니던가.

지금도 오만 난리를 다 치고 있었다.

[싱가포르 하면 역시 칠리크랩이죠. 검색해 본 바 있지 않습니까? 점보씨푸드로 갑시다.]

굳이 신현태가 묻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미 가야 할 맛집 리스트가 있다, 이 말이었다.

그중 맨 처음 나온 것은 당연하게도 칠리 크랩이었다.

“칠리 크랩이요.”

수혁으로서도 어떤 맛인지 궁금하기도 했거니와 이런 문제로 실랑이했다가는 한도 끝도 없을 게 뻔했다.

그냥 빨리 원하는 바를 내뱉어 주는 것이 나았다.

“오, 역시. 너도 검색해 봤구나. 옛날에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점보씨푸드였다는데…… 이젠 아니래. 마침 이 근방에 있어. 거기로 가자.”

“네, 교수님.”

반면 신현태는 바루다를 모르기에 계획을 조금 틀었다.

수혁이야 고개를 끄덕였지만 바루다는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검색했을 때 거기만 나오던데. 우리가 여기 또 언제 오겠습니까. 전 최고를 먹고 싶은데…….]

‘좀 조용히 해 줄래? 먼 나라도 아니고 오면 오지.’

[그래도…….]

‘그리고 과장님이 아는 데로 가신다잖아. 이현종 교수님이랑 맨날 좋은 데만 다니는 분인데 설마 맛없는 데로 가겠어? 그런 적이 있냐?’

[그건 아니긴 하죠. 흐음.]

둘이 이러쿵저러쿵 얘기를 나누는 사이 신현태는 어느 으리으리한 식당 앞에 발걸음을 멈춰 섰다.

‘생긴 지 한 1년 된 곳이 있는데……. 거기는 진짜 비싸요. 맛은 최곤데 진짜 비싸서…… 추천은 못 드리겠네요. 괜찮은 곳들이 또 있어서요.’

현지 직원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리면서였다.

‘인당 못해도 30은 나온다고 했지.’

처음 들었을 땐 이놈이 구라를 치네 싶었다.

아무리 싱가포르가 물가가 비싼 편이로서니 게 먹는데 무슨 인당 30이란 말인가.

하지만 식당 앞에 서고 보니 그럴 만하다 싶었다.

아니, 30으로 먹을 수 있나 싶기도 했다.

“자, 들어가자.”

하지만 신현태는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기필코 내가 삼촌 소리 듣는다.’

각오를 다지면서였다.

외관이 그렇다 보니 바루다도 불만이 완전히 사그라들 수밖에 없었다.

[그럭저럭 괜찮군요.]

‘그럭저럭은 개뿔. 이런 데를 우리가 어떻게 와.’

[왕자님이 집이랑 차 다 준다는데, 그럼 월급은 다 쓸 수 있지 않아요. 충분히 오지.]

‘먹는 데 다 쓰자고?’

[달리 낙이 있나요?]

‘음.’

수혁은 괜히 핀잔주려다 뼈를 맞고는 입을 다물었다.

신현태와는 당연히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면서였는데, 그것도 음식이 나온 다음에는 툭 하고 끊어졌다.

문제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계약 잘합시다.]

‘왜 그래.’

[이런 맛을 보고도 그럽니까? 이 바루다 이 맛을 매일 볼 수만 있다면 없는 영혼도 팔 의향이 있습니다.]

‘지랄 말고…….’

[저는 없으니 이수혁의 영혼을 걸죠. 계약에서 무조건 돈을 좀 끌어옵시다.]

‘이러지 마. 너 인공지능이야.’

[닥쳐요.]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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