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4화 공룡들이 아부해 (2)
“어허, 점잖은 사람들이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싸움은 화이자 측에서 사람을 보내오기까지 계속되었다.
“아.”
“끝났네.”
싸움이란 게 원래 말려야 하는 게 정상이지 않은가.
특히나 세미나와 같이 교류를 위해 만들어진 자리에서라면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어느새 모여들었던 구경꾼들 입에서는 아쉬움이 새어 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구글과 애플의 싸움이었다.
둘 사이가 당연히 나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오프라인에서 이렇게 삿대질까지 해 가며 싸우는 광경을 보기가 어디 쉬운 일이던가.
“근데, 저기 저 사람은 누구야?”
“모르겠네. 저 사람 때문에 싸우는 거 같던데.”
“아……. 태화의료원 이수혁이라고 들었던 거 같아. 어제 부스에서 봤는데, 꽤 재미난 프로그램 만들었던데.”
“공학도야, 아니면 의사야?”
“의사래.”
“허.”
애플의 팀과 구글의 장첸에게만 관심이 쏠린 건 아니었다.
그 중심에 있던 수혁에게도 그랬다.
“그럼 그거 놓고 싸우는 건가?”
“그게 그렇게 대단한가……? 프로그램 만들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을 거 같은데?”
“외주 받은 곳이 태화래.”
“아……. 특허권 빡세게 걸어 놨겠네.”
다행히 화이자에서 아주 적극적으로 나선 덕에 구경꾼들은 이러쿵저러쿵 씹다 만 말만 남긴 채 떠나 갔다.
자리엔 수혁과 팀 그리고 장첸만 남았다.
“후…….”
“내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
주먹다짐으로 번지진 않았지만, 감정은 여전히 격해져 있었다.
학벌과 가방끈으로 불거져 나온 싸움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자, 이제 그만하시고요. 아니, 여기서 대체 왜 이러십니까?”
화이자 시카고 연구소 소장 헨리의 말에 둘 다 최선을 다해 숨을 가다듬었다.
회사 크기로만 따지면 구글이나 애플이나 화이자 따위라고 해도 좋을 지경이긴 했지만.
바이오 업계에서의 위상은 비교도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비록 운 좋아 개발했다는 험담은 들을지언정, 비아그라로 벌어들인 돈이 적지 않아서였다.
화이자는 그 돈의 태반을 신약 개발을 위해 재투자했고, 지금은 세계 굴지의 다국적 제약 회사가 되어 있었다.
“죄송합니다, 실례를 범했습니다.”
먼저 고개를 숙인 것은 장첸이었다.
체면을 중히 여기는 중국인들의 문화를 생각하면 대단히 놀라운 일이었다.
헨리는 같은 연구소 내에서 중국인들이 많이 있어 이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기에 의외란 얼굴로, 미소를 지은 채 화답했다.
“아닙니다. 뭐 언성만 높았지, 그렇게 소란스럽지는 않았습니다.”
“저도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하하. 자, 그럼 괜찮은 거죠?”
한발 늦은 팀 또한 부리나케 사과를 건넸다.
헨리는 그런 둘의 등을 부드럽게 두드리고는 자연스럽게 강당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자, 닥터 리도 가시죠.”
“아, 네.”
수혁도 마찬가지였다.
“어, 수혁아. 난리 났다며.”
밖에 나가 보니, 신현태가 서 있었다.
전해 듣자마자 뛰어왔는지 머리가 이리저리 헝클어져 있었다.
팀과 장첸은 민망한 마음에 한 번 더 사과를 건넸다.
계약을 성사시켜야 하는 입장에서 이런 민폐라니.
아무리 마음이 급했다고 해도 실책이었다.
다행인 것은, 어찌 되었건 이 둘 말고는 계약 대상이 될 만한 사람은 없을 거란 점이었다.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일단…… 계약서를 주시면 제가 검토하겠습니다.”
“네, 저희는 여기 있습니다. 다 준비됐습니다.”
팀은 바로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계약서를 건넸다.
반면 장첸은 낭패한 얼굴이었다.
설마하니 얘기가 나오고 바로 다음 날 저런 걸 들이밀 줄은 몰랐던 타이었다.
‘이 자식들……. 밀고 당기고 할 생각이 없구나.’
생각해 보면 수혁, 신현태 팀과 밀고 당기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짓이긴 했다.
어차피 중요한 것은 구글과 애플 간의 싸움 아닌가.
거기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다면 뭐라도 해야 했다.
10억 쓸 거 20억 쓰는 건 별일도 아니었다.
“구글 측은 아직인가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신현태가 장첸을 바라보았다.
손에는 애플 측에서 건넨 계약서 꾸러미를 집어 든 채였다.
이렇게 보니 이미 밀린 것 같단 기분이 들었다.
안 그래도 아이폰 때문에 불리한 상황인데, 이래서야 되겠는가.
“아, 사실 준비가 됐는데 제가 뽑아 오질 못했습니다. 2시간 안에, 세션 끝나기 전에 가져다드리겠습니다.”
해서 되는 대로 질렀다.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는 차차 생각해 보면 될 일이었다.
“아, 네. 저는 그럼 감염 관리 세션에 있겠습니다. 수혁이는…….”
“저는 이거 계속 들으려고요. 첫 강의부터 배울 게 많더라고요.”
“그래? 그래, 그럼. 밥 먹으러 갈 때 연락할게. 아, 밥은 우리끼리 먹을 거니까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점심 얘기를 꺼내려 했던 팀과 장첸으로서는 민망하게 된 셈이었다.
[어디서 조언을 좀 들었나.]
‘그러게. 아까랑은 또 다른 느낌이네.’
바루다와 수혁은 신현태가 다시 믿음직스러워진 것이 만족스러웠다.
뭐가 되었건 둘은 아직 애송이 아닌가.
계약 건에 대해서만큼은 어른이 떡 버티고 서 있는 것이 나았다.
“그럼, 난 가 볼게.”
“네, 교수님.”
하여간 둘은 잠시 각자 세션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다만 수혁은 계속 강의를 듣고 있지는 못했다.
장첸이 정말로 땀을 뻘뻘 흘리며 계약서를 들고 온 탓이었다.
심지어 팀도 마찬가지였다.
‘저 새끼, 아까 내가 200만으로 고치는 거 봤지? 그것보단 높게 썼을 거야. 우리가 당할 거 같냐?’
‘와……. 고새 고쳐 오는 것 좀 봐. 자라 같은 새끼.’
둘은 일촉즉발의 상황인가 하고 헷갈릴 만큼이나 서로를 격렬하게 노려보다가, 이내 수혁과 신현태에게 새 계약서 꾸러미를 안겨 주었다.
애플 것은 어쩐지 아까보다 좀 얇아진 느낌이었다.
의아하다는 얼굴의 신현태에게 팀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쓸데없는 조항들이 있어 제거했습니다. 보시기 한결 편할 겁니다.”
“아, 네.”
“구글은 원래 간결합니다.”
“네네. 그럼 검토하고 답 드리죠. 시간이 좀 걸릴 거 같은데, 그래도 되죠?”
“물론입니다.”
“네, 얼마든지요.”
계약서 검토라는 건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법이었다.
특히 이렇게 거대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치고 기다리는 데 익숙한 사람은 없었다.
흔히 외국계 기업들은 자유롭지 않나 싶겠지만, 그건 그 안에서나 통할 얘기였다.
오히려 다른 기업들과의 계약 건에 있어서는 칼이었다.
휘두를 수 있는 힘이 있으면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그럼 살펴 가십쇼.”
“좋은 답변 기대하겠습니다.”
물론 휘두를 수 있는 힘이 있기는커녕 칼 손잡이를 상대가 쥐고 있는 상황에서는 갑질이고 나발이고 없었다.
“약간 부담되네요.”
“그러니까. 저렇게 굽신거려 본 경험이 있을까?”
“식사하면서 볼까요?”
“어, 그래. 여기서 먹자. 내가 예약해 놨어.”
“여기요? 호텔 비싸지 않아요?”
“야, 나 신현태야. 얼마 전까지 병원에서 월급 얼마 주는지 확인도 안 했어.”
병원 교수들이 부자란 사실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라고 보면 되었다.
신현태처럼 돈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은 정말 부자였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도리어 로컬에 나간 의사들보다는 상황이 나빴다.
월급 자체만 놓고 보면 로컬보다 더 적어서 그랬다.
“아, 네. 그럼 부담 없이 먹겠습니다.”
“삼촌이…….”
“네?”
“아니, 과장이 사는 건데 부담이 없어야지 그럼.”
“아, 네. 과장님.”
신현태는 이쯤 해서 삼촌 소리를 요구할까 하다가 수혁이 너무 놀라는 거 같아서 급히 말을 돌렸다.
물론 별 소용은 없었다.
[이 양반 왜 이러나 했더니만 삼촌 소리를 원하는군요.]
‘응? 무슨 소리야?’
수혁은 둔한 인간이었다.
그러니까 여태 제대로 된 연애도 못 해 보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이젠 바루다를 탑재한 몸이 된 지 오래였다.
아마 바루다가 연애에 대해 상세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면, 지금쯤 솔로 탈출도 가능했을 터였다.
[조태진한테 형이라고 했죠? 그때 눈동자가 이상하게 떨리더군요.]
‘아……. 이 사람들…….’
[수혁을 두고 이상한 방향으로 경쟁하는 인간들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
[분위기 봐서, 한번 해 주시죠. 신현태는 헌신적인 사람입니다.]
‘원하신다면 해야지. 아니, 근데 뭘 이런 걸 원하셔.’
수혁이 삼촌이라 부르기로 결심하는 사이, 둘은 마리나 베이 샌즈의 시느와즈리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원래 싱가포르란 도시 자체가 미식으로 유명한 곳 아니던가.
그런 곳에서 별 다섯 개 호텔 식당을 운영하는 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분위기, 서비스 그리고 맛을 충족시키는 건 기본이었다.
딱 하나 이건 좀……. 하는 항목이 있다면 가격인데 어차피 그건 신현태가 부담할 몫이었다.
“캐주얼 중식이래. 유명하다더라고.”
“오……. 중식…….”
“중식 좋아하지?”
“전 가리는 게 없죠.”
“좋아. 룸이니까, 일단 계약서를 꺼내 보자. 어차피 코스라 알아서 나와.”
“네.”
바루다는 음식에 대한 기대로 정신이 나간 상황이었다.
[돈, 돈은 얼마나 준답니까?]
하지만 세태와 야합하기를 넘어, 자본주의에 미쳐버린 놈답게 돈 얘기가 나오자마자 바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물론 수혁도 별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기에 타박은 없었다.
심지어 신현태도 그랬다.
오히려 자기한테 떨어질 돈이 단 하나도 없어서 더더욱 그랬다.
“와……. 둘 다 눈치 싸움 진짜 못하네.”
신현태는 일단 계약금부터 바라보았다.
구글과 애플 모두 400만 달러를 부른 상황이었다.
심지어 알에스, 즉 앞으로 있을 수익 쉐어에서 털어야 할 돈이 아니라 별개임을 명시하고 있었다.
완전히 같은 조건이었다.
“그러니까요. 300만이 아니라 400만…….”
“44억이야. 병원이랑 전자에서 얼마간 뜯어 가긴 할 텐데, 그래도 교수들이 전부 빠져서 네 몫이 한 10%는 될 거야.”
“그럼 4.4억이네요. 와.”
“적은 돈은 아니지.”
한 방에 이만한 돈이라니.
감탄하고 있으려니, 바루다가 끼어들었다.
[90%를 떼네. 이 도둑놈들이.]
‘태화가 아니면 이런 계약이 안 돼. 특허권도 다 그쪽 돈으로 따 놓은 거 알지?’
[그게 뭔데요?]
‘그거 없으면 얘들이 그냥 만들면 돼. 우리 개발비 생각하면…… 얘네는 더 잘 만들 테니까 돈도 덜 들걸.’
[아. 그럼 뭐……. 그래요. 흠.]
처음에는 발광을 하더니만 납득을 했는지 잠잠해졌다.
“알에스도 0.1%야. 그럼 수혁이 네 몫이 0.01%인데……. 북미 시장 전체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아주 적은 돈은 아닐 거야. 우리나라 EMR 시장도 대학 병원은 제외가 된 시장인데도 작지는 않더라고. 너 몫으로 연간 1억은 들어올걸?”
“월급 외라고 생각하면 꽤 큰돈이에요?”
“그게 문제가 아니라, 향후 연구에도 도움이 될 거라는 거지. 얘들이 성과를 내면 낼수록 네 포트폴리오도 좋아질 거야.”
“좋네요, 진짜.”
“문제는 이 둘 중 누구로 가냐 이건데…….”
수혁은 그렇게 말하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약속이 되어 있었는지 곧 전화가 걸려 왔는데, 영상 통화였다.
“오랜만이네요, 이수혁 부센터장. 아, 아직 레지던튼가.”
화면엔 김다현 사장의 얼굴이 떠 있었다.
둘이 알고 있는 사람 중 가장 유능한, 그러면서도 가장 거물인 사람이 끼어든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