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7화 뇌경색? (2)
“엇.”
엠뷸런스에 탑승하자, 환자는 비로소 손을 내렸다.
구급대원 중 하나가 바로 그를 알아보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자 환자가 아주 언짢은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사이 내안근 마비가 더 진행한 탓에 아까보다도 더 무서운 얼굴이 되어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원래 구급대원을 비롯한 의료 행위에 참여하는 이들은 전부 그 과정에서 획득한 개인정보는 누설해서는 안 된다는 법이 있지 않은가.
그 어떤 나라를 막론하고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특히 싱가포르는 법도가 엄하기로 유명한 나라 아닌가.
“아니……. 일단은…….”
환자는 그따위 사과보다는 치료를 원했다.
하지만 구급대원의 조치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의료 행위는 일정 부분 부작용을 동반하고 있지 않은가.
중대한 의료 행위로 가면 갈수록 그 부작용 또한 더 심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100% 안전하기만 하면서 효과 있는 치료는 환상 속에서나 존재했다.
“우선 메토클로프라미드, 케토프로펜하고 덱사메타손을 주시죠.”
그때 수혁이 나섰다.
[현재 이 구급차 안에 구비된 약 중에는 그나마 이것들이 효과가 있겠습니다.]
바루다의 도움을 받아 가면서였다.
“어……. 당신은…….”
“저는 의사입니다. 대한민국 태화 의료원 통합진료센터의 부센터장입니다.”
“어…….”
뭔가 화려해 보이는 직함이었다.
하지만 너무 어렸다.
“저도 의사입니다. 태화 의료원 감염내과 교수입니다. 지금 뇌경색 또는 뇌출혈이 의심되는 상황이니……. 이 친구 말대로 하는 게 좋겠어요.”
신현태는 그에 비하면 훨씬 그럴싸했다.
그렇지 않아도 세미나 참석 및 계약 때문에 정장을 착용하고 온 참이라 더더욱 그랬다.
아직 정장 태가 잘 나지 않는 수혁에 비해 항상 맞춤 정장을 입고 다니는 신현태는 멋들어진 중년 신사였다.
“하지만 싱가포르에서는……. 의사가…….”
물론 그렇다고 넙죽 말을 듣지는 않았다.
법적인 문제는 여전하지 않은가.
이 둘이 아무리 뛰어난 의사라 해도 대한민국에서의 이야기였다.
싱가포르에서는 자격이 없었다.
“이 환자 잘못되면 책임질 겁니까? 뇌혈관 질환에서 초동 조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잊었어요?”
“대원분. 아까보다 명백히 더 진행하고 있어요. 두통도 더 심해지고 있고요. 뇌압 상승 소견일 수 있습니다. 다른 것보다도 덱사메타손은 줘야 합니다.”
“그…….”
하지만 의사들만큼 사람 생명 가지고 다른 이 설득하는 데 능한 이들이 있겠는가.
안 하면 죽는다는 데 뭐 어쩌겠는가.
대원은 결국, 굴복하고야 말았다.
“알겠습니다.”
덱사메타손뿐 아니라, 요구했던 약 전부를 주었다.
왜애엥.
그사이 차량은 쉴 새 없이 달렸다.
러시아워건 아니건 간에 죽어라 막히는 것이 싱가포르 아닌가.
오죽하면 주요 시간에 도로를 이용하려면 따로 또 세금을 찻값에 포함해 내야 할까.
하나 엠뷸런스만은 예외였다.
“얼마나 걸리죠?”
“이제 한 5분이면 갑니다.”
“그건 다행이네.”
수혁은 두통과 메스꺼움이 발생한 것은 무려 10시간이나 되었지만.
어지럼증 자체는 불과 수분도 채 되지 않았던 것을 기억했다.
뇌경색이나 뇌출혈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커다란 혈관에 덜컥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얼마든지 있었다.
특히 이렇게 젊은 환자에게 발생한 상황에서는 오히려 비일상적인 경우를 더 염두에 둬야만 했다.
“선천성 질환 때문일 수도 있어. 겸상 적혈구 빈혈(Sickle cell anemia)이라거나…….”
차 안에서 자초지종을 듣고 또 나름 검진을 해 본 신현태가 입을 열었다.
[확실히 이 양반도 똑똑합니다.]
‘그렇다니까. 괜히 내과 교수냐.’
바루다나 수혁 또한 상정하고 있는 질환 중 하나였다.
이곳이 동남아시아인 것을 감안하면 꽤 가능성이 크기도 했다.
겸상 적혈구 빈혈은 적혈구가 유전적 결함에 의해 일반적인 형태가 아닌 낫 모양의 형태를 띠게 되는 질환을 의미했다.
적혈구가 훨씬 쉽게 파괴되기에 악성 빈혈도 드물지 않게 발생하는 질환이었는데, 당연히 생존에 유리한 유전자는 아니었다.
동북아시아나 유럽, 아메리카 등지에서는 그 때문에 극도로 드물었다.
하지만 동남아시아에서는 예외였다.
“네, 여긴…… 말라리아 창궐 지역이니까요.”
“오히려 겸상 적혈구성 빈혈이 안전할 수도 있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또 나이가 많아.”
사슬 낫 모양의 적혈구가 갖는 거의 유일한 이점은 말라리아에 대한 내성이었다.
대한민국에서는 말라리아가 별것 아닌 질환으로 치부되곤 하지만 여전히 해마다 수억 명이 감염되고, 수십만이 사망하는 무서운 질환이었다.
치료제들이 그나마 나온 지금에도 이럴 지경이니, 옛날에는 어떻겠는가.
말라리아가 창궐하는 지역에서만큼은 겸상 적혈구성 빈혈을 일으키는 유전자형을 지닌 이들이 보다 많이 살아남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네, 나이가 많죠. 겸상 적혈구성 빈혈 때문에 뇌경색이 올 수는 있지만……. 그 경우는 대부분 소아입니다.”
“물론 검사는 해 봐야 해. 아마 여기서는 루틴일 거야.”
그렇다고 단정 짓기엔 모든 상황이 딱 들어맞는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바루다가 이 의견을 부정하고 있었다.
[입술 색만 보면 빈혈은 아닙니다.]
‘아……. 지금 혈압이 올라가서 그런 건 아닐까?’
수혁은 아까 구급대원이 오자마자 쟀던 혈압 결과를 떠올렸다.
150/88.
명백한 고혈압이었다.
뇌출혈의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보통은 결과로 봐야 할 터였다.
특정 수준을 넘어가는 통증이나 일반적이지 않은 증상은 여러 가지 이유로 혈압을 올리기 마련이었다.
[아뇨. 아까와 이렇게까지 일정한 색은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음……. 그럼…… 뭐지?’
[지금은 알 수 없죠. 일단 병원입니다.]
구급대원의 말대로 5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차량은 싱가포르 종합 병원에 도착했다.
규모가 상당했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싱가포르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또 가장 커다란 국립의료원으로 총 공공 병상의 25%를 점유하는 병원이었다.
“자, 이쪽으로!”
차량이 멈추자마자 대원들이 능숙하게 환자를 응급실로 끌고 갔다.
미리 환자에 대해 언질을 들은 의료진이 대기 중이었다.
그중 하나가 부리나케 뛰어와 환자의 얼굴부터 확인했다.
“괘, 괜찮으세요?”
“호들갑 떨지 마세요…….”
“죄송합니다. 자, 바로 처치실로! 가려, 가려!”
연예인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공인인 모양이었다.
그것도 대중에 아픈 모습을 보이면 안 되는 종류의 공인.
수혁은 거기까지는 어렵지 않게 생각했지만, 거기서 더 뭔가를 유추해 내진 못했다.
“정치인인가?”
경험이 많은 신현태는 달랐다.
내과 과장이 되기 전에도 VIP 진료를 많이 보던 그 아니던가.
과장이 된 다음에는 정말이지 뻔질나게 왔는데, 하나같이 얼굴을 가리거나 정규 진료 시간이 아닐 때 왔다.
민폐도 그런 민폐가 없었는데.
아무리 민간 병원이라고 해도 보험은 전 국민 건강 보험 당연 지정제를 채택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정치인을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네?”
“얼굴 가리는 게 그런 거 같은데. 연예인이면 일하다 아픈 걸 굳이 숨기겠어?”
“정치인은 사정이 다른가요?”
“정치인은 무조건 아프면 악재지. 오늘내일하는 사람을 누가 뽑아.”
“아.”
그런가 싶었다.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아직 수혁은 이해 타산적인 시각으로 환자를 볼 만큼 노회한 의사는 아니었다.
“누구시죠?”
해서 빨리 환자에게나 가야지 하고 걸음을 옮기다 보니 처치실 입구에서 막혔다.
황당했다.
같이 가 달라고 해서 온 건데 막다니.
“어…….”
“아, 제…… 제 지인입니다.”
하지만 딱히 또 할 말이 마땅치는 않아서 망설이고 있으려니, 환자가 손짓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앞을 가로막고 있던 간호사는 사과까지 하고는 옆으로 비켜섰다.
“처치 내용은 들었습니다. 의사시라고요?”
환자는 이제 이런저런 라인을 주렁주렁 단 채였다.
그중 하나를 살피고 있던 의사가 신현태를 돌아보았다.
둘 다 의사긴 하겠지만 뭔가 했다면 신현태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 네. 처치는 주로 이 친구가 했습니다.”
“그렇군요. 잘했던데……. 일단 뇌 병변이 의심이 됩니다. 바로 CT, MRI를 찍을 거예요. 원래는…… 음, 아무튼, 지인이라고 하시니 같이 계시죠.”
“네.”
VIP는 VIP인 모양이었다.
밖에 환자들이 정말 많던데, 촬영이 거의 지체없이 진행되었다.
잘 설계된 병원이 그러하듯 이곳도 응급실 1층에 응급 환자를 위한 촬영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CT는…….”
“괜찮네요.”
“네.”
CT는 수혁의 말대로 별거 보이지 않았다.
그 말은 곧 출혈은 아니거나, 출혈이라 해도 아주 소량의 출혈일 거라는 얘기가 되었다.
‘네가 봐도 안 보이는 거지?’
[네. 우안의 내전근 이상을 일으킬 수 있는 병변을 봐도 뭐가 없어요.]
바루다의 확인도 있었기에 수혁은 어느 정도 확신을 한 채 MRI실로 향했다.
다행히 그사이 환자의 증상은 조금씩 호전되고 있었다.
구역과 메스꺼움 그리고 두통은 거의 사라졌다고 했다.
다만 눈은 여전히 돌아가 있었다.
제일 중요한 증상이 남아 있는 터라 모두들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당당당당.
곧 시끄러운 굉음과 함께 MRI 촬영이 시작되었다.
응급실 의사와 수혁 그리고 신현태는 촬영실에서 넘어오는 영상을 지켜보았다.
제일 먼저 이상을 발견한 것은 당연하게도 수혁이었다.
“여기. T2 이미지에서 중뇌의 우측 수도관주위(periaqueductal region of the midbrain) 부분에 조영증강이 있군요.”
“아, 그렇네. 음……. 그 외에는…….”
“T2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FLIAR 이미지에서도 같은 소견입니다. 아주 국소적인 허혈 소견입니다. 이건…….”
“일반적인 뇌경색이 아닌데. 뇌혈관 조영은 어떻지?”
VIP다 보니 검사란 검사는 다 때려 넣은 상황이었다.
응급실 의사 또한 둘의 대화를 알아먹었기에 즉시 뇌혈관 조영술 영상을 띄우길 요청했다.
방사선사는 환자에 대해 자초지종을 듣지는 못했지만, 어찌 되었건 VIP란 감은 딱 잡은 상황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응급실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 와서 이렇게까지 허둥지둥할 일이 없을 터였다.
“네, 여기.”
“음.”
“별거 없네.”
뇌혈관 조영술은 정상이었다.
그 말은 곧 지금 당장 수술을 포함한 커다란 처치는 불필요하다는 얘기가 되었다.
좋은 소식이었으나 모두 얼굴을 펴지는 못했다.
젊은 나이이지 않은가.
원인을 밝혀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신경과 아까 연락했지? 지금 내려오라고 해. 영상 찍었으니까.”
“네.”
해서 응급실 의사는 신경과를 불렀다.
그렇다고 딱히 뾰족한 수가 나지는 않았다.
신경과 또한 아까 수혁이 말한 병변을 읊었을 뿐, 별다른 의견을 내지 못했다.
‘흐음.’
[왜요?]
‘좀 엉뚱한 생각이긴 한데……. 환자가 30대 중반의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고 보면 이런 병변이 불가능한 건 아니잖아?’
[네? 아…….]
그사이 수혁은 바루다가 쌓아 둔 데이터를 이용해 감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