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371화 (371/1,303)

371화 이건 또 누구야 (2)

리콴유 일가가 갖는 의미는 적어도 싱가포르 내에서만큼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오죽하면 싱가포르의 별명 중 하나가 잘 사는 북한이겠는가.

3대 세습이 가능할 거라 보는 시민들이 꽤 많았다.

심지어 그렇게까지 거부감이 있지도 않았다.

리콴유가 총리로 있던 시절 싱가포르는 명실상부한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중 하나를 담당하게 되었고, 그 아들 리셴룽은 다시 쇠락해 가던 싱가포르를 카지노와 금융 산업을 통해 또 한 번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만들었다.

“읽어 보니까, 이렇네? 아무래도 3대 세습……. 가능할 거 같은데. 특별히 사고 치고 다닐 인상도 아니었잖아.”

신현태는 방금 인터넷에서 읽은 내용과 동시에 아까 보았던 리홍이를 떠올렸다.

인터넷에서도 리홍이에 대해서는 별말이 없었다.

초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성실하게 미국 아이티 기업을 다니다 투자 회사를 다닌 것을 끝으로 정치계에 입문한 상황이었다.

알려진 게 전혀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평가는 오로지 두 눈으로만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그래 보여요.”

수혁이나 바루다의 의견도 같았다.

차이가 있다면 이쪽은 바루다가 통계를 볼 줄 안다는 것 정도였다.

[저런 인상이 사고 칠 확률은 낮죠.]

‘관상가냐?’

[통계상 그랬다는 얘기죠.]

‘의미가 없을 거 같은데. 이론적으로 전혀 이어지는 게 없잖아?’

[그런가요?]

‘그렇지.’

물론 수혁은 이걸 맹신하진 않았다.

아마 아무거라도 기준이 될 만한 게 있었다면 그걸 믿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나와 있는 데이터는 오직 그것뿐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이건…… 이건 보고해야겠는데.”

신현태는 수혁이 받아 온 명함을 탁탁 두드리다가, 이내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상대는 당연하게도 김다현 사장이었다.

“네, 김다현 사장님 핸드폰입니다.”

미리 약속이 안 되어 있었기에 전화가 바로 연결되진 않았다.

하지만 신현태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건 큰 건이니까.

“네, 태화 의료원 신현태입니다. 혹시 지금 통화 가능할까요?”

“지금…….”

반면에 비서는 전혀 감이 없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회의 중이십니다.”

“이 시간에요?”

“요새 회의가 밤낮이 없어요.”

“그렇군요. 그럼 끝나고 바로 좀 연락 달라고 해 주실 수 있나요?”

“이게 마지막 회의가 아닌데…….”

비서의 말에 신현태는 저도 모르게 시계를 돌아보았다.

밤 10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한국이 싱가포르보다 한 시간 빠르니, 거기는 밤 11시일 터였다.

그런데 마지막 회의가 아니라고?

아무리 새로 승계받아 이런저런 개편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너무한 거 아닌가 싶었다.

세상에서 빡세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한 직종인 대학 병원 의사임에도 그렇게 느껴졌다.

“이건 정말 중요한 건입니다.”

“그럼 어떤 건인지 대략적으로라도 말씀을 해 주실 수 있어요?”

그건 그거고, 할 일은 할 일이었다.

신현태 혼자 관여된 일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이건 사랑스러운 조카 수혁도 엮인 일이었다.

아니, 수혁이 엮인 일이었다.

‘나는 할 일이 없지, 참.’

생각해 보니까 신현태가 한 일이라고는 그냥 식당에서 밥 먹다가, 삼촌이라는 말 듣고 울먹이고, 참다못해 화장실 갔다 전화 받고 병원 따라온 게 다였다.

‘편두통…… ILD, MCF?’

감염내과 의사인 신현태로서는 아까 수혁이 했던 말 중 절반도 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하여간 대단하다는 것만 알아먹었다.

“리콴유 일가와 연관된 일입니다. 더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리콴유…… 알겠습니다. 전달하겠습니다.”

김다현 사장의 비서쯤 되면 그냥 아무나가 아니었다.

그저 그런 기업의 비서가 아니라 대기업 사장의, 그것도 계열사 몇몇을 거느리는 사장의 비서이지 않은가.

수혁보다는 훨씬 정세에 밝았다.

신현태는 비서의 목소리가 딱 달라지는 것을 느꼈고, 동시에 이 얘기는 빠르게 전달될 거란 확신이 섰다.

“수혁아, 우리는 맥주나 한 캔 까 먹자.”

“내일 일정도 사실 별거 없으니……. 그럴까요?”

“응. 룸서비스도 시키자. 이렇게 일이 술술 풀리는 줄 알았으면 호텔도 좀 좋은 데 갈걸.”

“여기도 좋은데요? 야경도 좋고요.”

원래 같았으면 다음 날 준비하느라 바빴을 터였다.

어떻게든 ‘거들다’를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해야 했을 테니까.

홍보팀 직원들과 회의도 좀 하고, 최대한 임팩트 있는 시간을 골라 둘이 가서 떠들어 대기도 했을 거란 얘기.

하지만 시작도 전에 구글과 애플이 붙어 버린 상황이었다.

그 이상 대체 누구에게 어필을 해야 한단 말인가.

해서 수혁은 여유 넘치는 얼굴로 창밖에 보이는 클락키를 바라보았다.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꽤 많은 펍에 불이 들어와 있었고, 테이블에는 맥주 마시는 이들이 가득 차 있었다.

“어, 뭐. 좋지. 하하, 아무튼, 시킬게.”

“네네.”

“맥주 뭐 특별히 마셔 보고 싶은 거 있어?”

“저는 그냥 뭐……. 싱가포르 맥주요?”

“그래, 그러자. 아, 그리고 여기 뭐 유명한 칵테일이 있대. 싱가포르. 그것도 하나 시켜 볼게.”

“네, 삼촌.”

“허허.”

신현태는 껄껄 웃으며 프론트에 전화를 걸었다.

정말이지 조카와 단둘이 온 기분이었다.

똑똑.

곧 싱가포르식 치킨 튀김과 커리 그리고 슬링 두 잔, 맥주 두 병이 왔다.

비즈니스호텔이긴 하지만 그래도 꽤 그럴싸했다.

아무래도 워낙에 출장이 잦은 도시다 보니, 실제로 이용객이 많은 모양이었다.

원래 음식의 질은 많이 찾을수록 올라가기 마련 아니던가.

“오, 맛있는데요?”

“그러게. 맛있다. 아, 아까 거기가 진짜 좋은 가겐데……. 계약서 검토한다고 잘 먹지도 못했네.”

“아니에요. 진짜 맛있었어요. 이것도 괜찮네요.”

“그래? 다행이네.”

신현태는 뭐든 좋다는 듯 그저 웃었다.

생각보다 음식도 맛있는 데다가, 술도 수혁이 앞에 있다 보니 더 맛이 났기에 그랬다.

그렇게 대략 20분가량을 먹었을 무렵 전화가 울렸다.

한국 시각으로 12시쯤 되었을 무렵이었다.

“아, 사장님.”

“네, 신현태 과장님. 리콴유 일가와 연관이 되어 있다니, 대체 무슨 일이죠?”

무척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김다현 사장의 목소리는 상기되어 있었다.

리콴유.

싱가포르에서 사업을 하기 원한다면, 무조건 잘 보여야 하는 대상 아닌가.

밖에서야 독재자니 뭐니 말이 많지만, 싱가포르 내에서 리콴유는 국부였다.

“아……. 그게 우리 수혁이가 말입니다.”

“이수혁 선생이 연관되어 있습니까?”

“네. 수혁이가 식당에서 밥 먹다가 누굴 진단했는데요, 그 사람이 리홍이입니다.”

“리홍이? 리홍이…… 리홍이? 리셴룽 차남 말하는 겁니까?”

“네.”

“허…….”

김다현은 과연 사업하는 사람이라 그런가, 바로 알아먹었다.

싱가포르가 메디컬 허브로 자리 잡은 지 오래이기에 더더욱 그랬다.

세계 10대 다국적 제약사 중 무려 4개가 싱가포르에 자리 잡고 있지 않은가.

그만큼 싱가포르는 세금 혜택은 물론이거니와 그 외에 많은 혜택을 몰아주고 있었다.

“어, 어떤 병이었죠?”

“새어 나가서는 안 되는 정보입니다.”

“아, 개인정보인가. 저한테도 안 되나요?”

“자세한 얘기는 좀 그렇고……. 아무튼, 수혁이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은혜를 갚겠다고 하면서 명함도 줬어요.”

“그렇군요. 음…….”

김다현은 명함이라는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중화권에서 명함이 갖는 의미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그, 명함에…… 혹시 개인 번호가 있나요? 아니면 대표 번호가 있나요?”

“아……. 개인 번호 같은데요? 이메일도 있고요.”

“아.”

특히 개인 번호가 적혀 있다면 그것은 이제 너는 나와 아는 사람이다, 친구다, 이런 뜻이었다.

우리나라에서야 술 한번 먹으면 명함 주고받고, 바로 연락하는 것이 예의 아닌가.

중국에서 그걸 요구하는 건 무례한 일이었다.

심지어 A가 소개해 준 B에게 A의 허락 없이 또 B의 허락 없이 바로 연락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속성을 몰랐던 대한민국 기업들이 중국이 개방되었을 당시 얼마나 곤욕을 치렀던가.

이게 바로 꽌시였다.

“이건 정말 보통 일이 아니네요. 음. 아직 리홍이가 뭐 별로 힘이 있거나 하진 않겠지만…….”

“나중에라도 힘이 생기겠죠?”

“당연하죠. 이미 승계 작업에 들어갔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신현태야 정세에 어두운 편이니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지만.

김다현은 싱가포르를 주시하고 있었더랬다.

김다현이 알기로 이미 리셴륭은 이번에 은퇴하고, 심복을 총리로 내세웠다.

동시에 리홍이를 초선 의원으로 만들었는데, 자신이 걸어온 길과 정확히 같았다.

“이건…… 정말 귀한 끈이에요. 음, 회의 잠시 미뤄 둔 보람이 있네요.”

“제가 알기로 태화 바이오도 싱가포르로 진출 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걸 얘기해 볼 수도 있을까요?”

“아……. 아뇨, 아뇨. 너무 성급해요. 리홍이는 아직 정신이 없을 거예요. 아프기도 한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죠. 오히려…… 음. 그래, 선물을 보내도록 하죠.”

“선물이요?”

“병원으로요. 직접 간다고 하면 외면하지 못할 겁니다.”

“아……. 그럼 뭘 사죠?”

“과장님은 신경 쓰지 마세요. 저희가 직원 파견하겠습니다.”

로비는 사업에 있어 필수적인 사항이라고 보면 되었다.

특히 아는 사람들을 통해서만 알음알음 사업이 이루어지는 중국계 쪽과 일을 하려면 취향을 파악하는 것이 일종의 능력 증명이었다.

당연하게도 태화는 이쪽으로 출중한 이들을 지니고 있었다.

내일 가장 빠른 비행기로 도착할 직원은 불과 하루 이틀이면 리홍이의 취향을 파악해 선물을 전달할 수 있을 터였다.

“아, 네. 그럼 저희는…….”

“그냥 쉬다 오시면 됩니다. 정말 잘하셨어요. 이수혁 선생에게도 전달해 주세요. 우리가 부센터장을 정말 잘 뽑은 거 같습니다.”

“네네. 감사합니다.”

“오시면, 한번 식사하시죠. 이수혁 선생과 함께요.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바쁘실 텐데…….”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김다현 사장은 지금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상황이었다.

정·재계의 주요 인사들만 만나도 시간이 없다는 뜻.

근데 거기에 이 둘을 낑겨 넣겠다는 건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마냥 대학 병원에서만 있는 게 아니라, 이런 일을 하는 아내를 둔 신현태는 바로 알아먹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럼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과장님. 이수혁 선생께도 안부 전해 주세요.”

해서 진심을 담아 감사 인사를 전한 후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수혁을 돌아보았다.

아쉽지만 개인적인 요청은 불가한 듯한 뉘앙스 아닌가.

하지만 삼촌으로서, 또 과장으로서 이보다 더 잘한 결정은 없을 듯했다.

‘어찌 되었건 우리는 태화 사람이야. 다른 나라 정치인보다는 태화 사장 눈에 드는 게 더 좋은 일이지.’

그렇지 않은가?

해서 이런 말을 좀 해 주려고 하는데, 수혁이 무언가를 골똘히 보고 있었다.

“뭐 해?”

“아, 아뇨.”

별건 아니었는지, 손사래를 쳤다.

수혁의 얼굴을 보면 정말 그런 듯이 보였다.

하지만 바루다는 흥분해 있었다.

[예의를 아는 사람이군요?]

‘증상이 벌써 좋아졌다니, 그럴 만도 하지. 근데 나만 오라는데……. 어떻게 떼어 놓고 가지?’

[사기 잘 치잖아요. 머리 굴려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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