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8화 호흡곤란 (5)
‘뭐야 대체, 저 새끼는.’
담당 교수는 거의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왔다.
거기 더 있다가는 탈탈 털릴 거 같지 않은가.
아니, 이미 털린 참이었다.
‘타카야수…… 맞나? 설마? 음…….’
처음 그 소리를 꺼낼 때만 해도 기분만 나쁠 듯 단 하나도 공감이 안 되었더랬다.
하지만 듣고 보니 그럴싸했다.
너무 그럴싸해서 무서울 지경이었다.
게다가 CT까지 근거로 대지 않았는가.
‘이런 망할……. 정말…… 좁아져 있었지. 그건 특발성 기질화 폐렴에서 생길 수는 없어…….’
뻗대고 있기에는 너무 확실해 보였다.
게다가 할리마 의원도 홀랑 넘어간 듯 보이지 않던가.
지금 이 주장을 따르지 않는다면 문제가 생길 거 같았다.
만약 병원장에게 콤플레인을 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상상도 하기 싫었다.
“어……. 난데. 일단 혈관…… 혈관 조영 CT 가능한가?”
“지금요? CT는 가능합니다.”
“그럼 이 환자 좀 내릴게. 협진도 좀 내줘.”
“아, 네. 교수님.”
해서 레지던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레지던트로서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언제는 VVIP니까 자기가 다 알아서 보겠다고 하더니, 갑자기 협진을 내?
그것도 흉부외과와 심장 내과에?
‘뭐야.’
하지만 따르지 않을 수도 없지 않은가.
상대는 하늘 같은 교수였고 또 환자는 그보다 더 높은 국회의원이었다.
벌써 수십 년간 여당으로 자리 잡고 있는, 사실상의 싱가포르의 지배당의 의원이었다.
“지금 내려가시겠습니다.”
당연하게도 CT실에서는 즉시 환자를 불렀다.
수혁은 방에 찾아온 이송 요원을 돌아보고는 다시 할리마를 바라보았다.
“다녀오시죠. 이 검사를 하면…… 보다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겁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아뇨, 의사가 환자 보는 건 당연한 일이죠.”
“하지만…… 음, 아닙니다. 네. 다녀오죠.”
할리마는 뻔한 소리만 늘어놓고 있는 수혁을 뻔한 눈으로 바라보지 못했다.
누구나 머릿속에 담고 있는 이상적인 의사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지 않은가.
[연기 잘하신다. 톤도 그렇고 표정도 그렇고. 정말 좋은 의사 같아요.]
‘후후. 내가 이런 건 진짜 잘하지.’
[네, 천재입니다.]
이게 연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갑자기 불려온 외국인 의사가 왜 이런 연기를 한단 말인가.
게다가 처음 자신을 봤을 때, 이 사람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더랬다.
‘이 은혜는 또 어떻게 갚나.’
중국 문화권에서 은원은 생각보다 커다란 의미를 가졌다.
군자의 복수는 10년도 늦지 않다는 말도 중국에서 기원한 말이 아닌가.
비단 원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은혜도 비슷했다.
할리마가 그런 생각과 함께 병실을 떠나가자, 리홍이가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역시…… 이수혁 선생님을 부르길 잘했군요. 바로 진단이 바뀔 줄이야…….”
“전형적이지 않은 질병 경과라 여기서도 어려움을 겪기는 했을 겁니다.”
“그렇군요. 그래도…… 확실히 실력 차가 있군요. 나이가 젊으신데…….”
리홍이는 감탄한 얼굴 그대로 신현태를 바라보았다.
담당 의사보다야 실력이 훨씬 나은 사람이기는 했다.
신현태는 그래도 원래 내려져 있던 진단명을 의심해 볼 생각은 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이 병을 떠올린 건 아니었는데, 리홍이는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
‘암만 봐도 이쪽이 이수혁 선생의 스승인데……. 태화 의료원이라는 곳은 다 이런가?’
생각해 보면 아주 가능성이 없는 얘기는 아니었다.
싱가포르가 굉장히 잘 사는 곳이기는 해도, 대한민국만큼은 아니지 않은가.
20년 전이라면 뭐 어떻게 좀 비벼 보겠는데 지금은 터무니없는 일이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그곳에서 자리 잡은 의사가 굳이 싱가포르로 올까 싶었다.
특히 태화 의료원 같이 거대한 병원의 교수라면 더더욱 그럴 터였다.
‘이쪽으로…… 의료 관광을 보내면서 동시에 국제 진료소를 유치한다면……. 그 노하우를 배울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수혁만큼 실력 있는 의사들을 대량으로 키워 낼 수 있다면, 그건 엄청난 일이 될 터였다.
아무리 태화 의료원의 시스템을 가져다 쓴다고 해도 아니, 태화 의료원 아니라 그 할아버지를 데려온다고 해 봐야 수혁 같은 의사를 하나 더 키우는 것은 망상에 가까운 일이겠지만.
그건 누가 말해 주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는 일 아니던가.
리홍이는 꿈을 꿀 수밖에 없었고, 바루다는 분석을 통해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대강 파악했다.
[아주 긍정적으로 생각할 거 같군요. 최소한 이쪽 환자들을 우리가 유치하는 건 어렵지 않겠어요.]
‘연속으로 홈런 날렸으니 그럴 만도 하지.’
[자기 입으로 홈런이라고 하는 게……. 조금 그렇긴 하지만 인정합니다. 아주 잘했어요.]
바루다의 말에 수혁은 껄껄 웃었다.
그사이 리홍이는 신현태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과장님이라고 하셨죠?”
“아, 네. 제가 내과 과장을 맡고 있습니다.”
“그럼 내과 전반을 책임지고 계신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교육도요?”
“물론입니다. 레지던트 및 임상 강사, 펠로우 등의 교육은 다 제가 맡고 있죠.”
“그렇군요.”
예상한 대로 리홍이는 교육에 대해 아주 커다란 관심을 보였다.
신현태로서는 조금 부담되는 일이었다.
‘솔직히 나한테 수혁이를 가르쳤냐고 하면…… 그렇다고 하기가 좀 그런데.’
천재라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수혁은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인재였다.
가르치지 않은 것을 혼자 배우고 있으니 그렇게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아니라고 하는 건……. 그것도 좀 이상하지?’
하지만 뭐가 되었든 간에 대외적으로는 수혁이 자기 제자 맞지 않는가.
게다가 이번 여행을 통해 그냥 교수가 아니라 삼촌까지 된 마당이었다.
이만하면 당당해져도 될 거 같았다.
“만약에 말입니다. 만약입니다. 만약.”
리홍이는 그런 신현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곳에 태화 의료원의 분원……. 또는 국제 진료소를 세우게 된다면, 태화 의료원 노하우를 저희가 좀 배울 수 있습니까?”
“아……. 물론입니다. 두바이에도 비슷한 조건으로 계약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군요. 확답하실 수 있는 부분입니까?”
“음…….”
신현태는 김다현 사장이 이끄는 태화 바이오를 떠올렸다.
제약은 몰라도 다른 분야에 있어 한국은 작은 무대였다.
심지어 이런저런 제약이 마치 철창처럼 둘러쳐져 있기도 했다.
그에 비해 싱가포르는 어떠한가.
도시 국가라는 단점을 메우기 위해 일찌감치 규제를 풀고 외국 자본과 회사를 유치하기 위해 애를 써 온 나라였다.
지금은 그렇게 나서는 나라가 하도 많아서 빛이 바래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매력적인 땅이었다.
‘동남아…… 시장은 태화에서 아주 열심히 공략하려고 하고 있지? 전자랑 따로 떨어져 나왔다고 해도, 아예 동떨어져 있진 않을 거야.’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오면서 인구는 곧 구매력이 되어 가고 있었다.
전 세계가 점차 잘살게 되어 가면서 벌어지는 일인데, 이곳 동남아시아는 인구가 많을뿐더러 여전히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이고 있는 곳이었다.
세계 각국에서 군침을 흘리고 있는 새로운 시장이란 얘기였다.
“확답까지는 어렵습니다만, 제가 저희 계열사 사장님과 대화가 가능하거든요. 얘기해 볼 수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아마 긍정적으로 생각할 겁니다. 안 그래도 이쪽으로 진출하고 싶어 하거든요.”
“그건 다행이군요. 사실 저도 아직은 만약입니다. 얘기를 꺼내고 싶어도……. 아직 제 영향력이 대단치 않아서요.”
“이해합니다. 하하. 이런 얘기가 나온 것만으로도 기쁘군요. 태화 의료원이 인정받은 거 같다고나 할까요?”
한번 마음을 먹은 신현태는 원내 생활로 단련된 사회생활 기술을 가감 없이 뽐내었다.
이현종이라는 짐덩어리를 안고도 과를 문제없이 이끌어 가고 있는 사람 아닌가.
다른 건 몰라도 부드러운 매력 하나만큼은 가히 최고라 할 수 있었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한 채로 지속되었다.
심지어 다른 대화 주제로 넘어가고 나서도 그랬다.
대화가 끊긴 것은 할리마 의원이 돌아온 후였다.
어색해져서가 아니고, 영상을 보기 위함이었다.
“병동으로 가서 볼까요? 환자분도…… 일어나실 수 있죠?”
“아, 네. 근데 그래도 되나요?”
“환자분 허가가 있으면 누구라도 볼 수 있죠. 개인 정보일 뿐이니까요. 병원 거가 아니라 환자분 거예요.”
“아……. 그럼 뭐. 갈까요.”
아닌 게 아니라 아까 처방이 바뀌자마자 좀 나은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약 효과가 돌려면 아직 멀었지만, 기분이 그렇다 이 말이었다.
해서 할리마는 무려 앞장서서 병동으로 행차했다.
“아, 환자분?”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애초에 병동이 VIP 병동이었다.
과도할 만큼이나 친절하다는 뜻인데, 그중에서도 할리마는 특별 대우를 받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교수가 신신당부해 댔는데 어찌 무시할 수 있겠는가.
“아……. 방금 찍고 온 영상을 좀 보고 싶은데요.”
“주치의 선생님 불러 드릴까요? 설명이 필요하실 텐데.”
간호사의 말에 할리마는 수혁을 돌아보았다.
설명에 그가 정말 필요하냐는 뜻이었다.
[주치의면 레지던트 아닙니까? 레지던트가 알면 뭘 알겠어요.]
‘나도 레지던트거든.’
[수혁은 저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것도 그렇긴 해.’
수혁은 그런 할리마와 눈을 마주한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습니다. 그냥 제가 보죠.”
“어……. 이게 그냥 보기는 좀 어려우실 텐데요.”
“괜찮아요. 볼게요.”
“음, 알겠습니다. 혹시라도 모르겠으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 그리고 그 영상으로 너무 섣불리 판단하시면 안 됩니다. 생각하시는 거랑 아예 다를 수가 있어요.”
“네.”
할리마는 간호사의 말을 건성으로 들은 후, 모니터에 뜬 자신의 영상을 바라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심장에서 뻗어 나오는 혈관들을 가로축으로 자른 CT 영상이었다.
당연하게도 할리마는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수혁은 달랐다.
“네, 이걸로 보니까 확실해지네요. 왼쪽 폐동맥이 좁아져 있어요. 여기 이렇게…… 살짝 거뭇거뭇하게 보이는 거 있죠?”
“네.”
“그게 육아조직인데, 염증의 결과로 나타나는 겁니다. 이미 염증이 좀 진행했어요.”
“그럼…… 그럼 수술이 필요합니까?”
“제가 볼 때는 아직 그 정도는 아닙니다. 더 시간을 허비했다면 모르겠지만, 아직은 아니에요.”
“아.”
할리마는 다행이란 말을 반복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수술은 차원이 다른 문제지 않은가.
심지어 가슴 수술이었다.
앞으로의 행보에 치명적일 수 있었다.
“제가 처방 드린 대로 하면…… 괜찮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혹 궁금한 게 있으면 이리로 연락 주세요. 전화는 몰라도 이메일은 매일 확인하니까 한국에 돌아가서도 연락이 안 되진 않을 겁니다.”
“아, 네.”
수혁은 그런 할리마를 다독이면서 자연스럽게 명함을 건네주었다.
[오, 명함을 이렇게 멋지게 주시네.]
‘다 연출이지.’
[미쳤네.]
‘통합진료센터 가는 데 썰렁하면 안 되잖아. 국제 환자들도 싹 봐야지.’
[보통은 국내부터 보지 않나?]
‘그거야 뭐……. 차차 기회가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