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381화 (381/1,303)

381화 가을 (1)

조태진은 확실히 암센터 설립 당시 많은 일을 담당했던 모양이었다.

딱 그가 참여하자마자 많은 도움이 되었는데, 심지어 굵직한 기구들은 대강의 가격까지 얼추 알고 있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인테리어 업자들의 평균 시세까지 꿰고 있어서 정말이지 크나큰 도움이 되었다.

[눈탱이 맞는 건 아닐까요? 의사들……. 사기 많이 당한다고 하던데.]

그렇다고 걱정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다.

수혁이 아무리 사회생활을 대강대강 하고 있다고 해도 의사 사회는 좁디좁았다.

특히 어디 나가 있는 게 아니라, 대학 병원에 남아 있는 상황에서는 어떻게든 선배들의 얘기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 따르면 일단 의사라 하면 업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든다는 것이었다.

학생 시절에도 의대생은 의대생끼리 갇혀 지내고, 사회생활이라 해 봐야 대학 병원에서의 생활에 군의관 3년이 전부이니 얼마나 후려치기 좋겠는가.

[응? 아, 의사는 사기당할 수 있지. 근데 우린 태화잖아. 우리 직원분들은 빠꼼이야. 절대 그럴 일이 없어. 아마 태화 물산 하청 업체에서 맡을걸? 그런데 사기를 쳤다간……. 난리 나지.]

물론 조태진은 그런 걱정마저도 기우로 만들어 주었다.

해서 수혁은 도움을 받기 시작한 지 불과 2주도 채 되지 않아 서류를 낸 참이었다.

그 후론 별다른 일이랄 게 없었다.

비록 수혁이 치프라 이런저런 책임이 있는 자리이기는 했지만.

애초에 의사들이라는 게, 그중에서도 내과 의사들은 더더욱 사고 치는 편이 아니었다.

그저 시킨 일 열심히 하고, 공부하다가 지치면 자는 것이 레지던트 생활의 95%를 점하고 있었다.

“어, 우리 수혁이.”

수혁은 평탄했던 지난 몇 개월을 반추하다가, 반가운 얼굴로 자신을 부르고 있는 장강명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수혁, 검진센터 센터장입니다. 든든한 우군인데 잘해야죠?]

‘알지, 인마.’

바루다의 푸시 때문이었다.

“네, 교수님.”

“어어. 이수혁 선생이 오니까 내가 할 일이 적네.”

장강명은 기분이 좋아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수혁의 실력은 이제 어엿한 교수급 그 이상이 된 지 오래지 않은가.

그런 실력자가 밑에 와서 굴러 주고 있으니 할 일이 적다 못해 아예 없어진 마당이었다.

과장하는 거 아닌가 싶겠지만, 진짜 그랬다.

“환자들이 다 안정적이어서요.”

“아니, 뭐……. 꼭 그렇지도 않았지.”

장강명은 먼눈을 한 채 딱 열흘 전을 떠올렸다.

정확히 유지상에서 수혁으로 3년 차 손바꿈하기 하루 전날이었다.

‘그땐 진짜 힘들었는데…….’

검진센터 일이라는 게 그거 하나만으로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소화기내과는 더더욱 그랬다.

센터장임에도 불구하고 일주일에 내시경 세션만 5개에 외래가 3개였다.

연구 시간이 다른 내과 교수들 절반 정도밖에 안 된다는 뜻.

그런데 입원 환자들까지 골골대는 통에 정말이지 힘들었더랬다.

아무리 교수라 해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뭘 어쩌겠는가.

낮에는 주치의들이 뭘 좀 해 줘야했다.

‘이 녀석은 뭘 좀 해 주는 정도가 아니라…….’

그러던 것이 수혁이 오자마자 싹 바뀌었다.

일단 루틴 환자들에 대해서는 바로 다음 날부터 신경 쓸 일이 하나도 없었다.

노티가 너무도 완벽하게 오는데, 환자 파악을 따로 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어려운 환자들이라 해서 크게 다른 것은 아니었다.

어찌나 판단을 빨리빨리 내리는지, 이건 나도 좀 배워야겠다 싶을 지경이었다.

그게 열흘이 반복되다 보니 이제는 할 일이 아예 없지 않나 싶을 정도가 되었다.

“아무튼, 환자들은 다 괜찮지?”

“네. 괜찮습니다.”

“그래. 그럼 나는…….”

장강명은 휘리릭 회진을 돈 후 엘리베이터로 향하다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 외래에서 전해 들었던 말이 떠오른 탓이었다.

“아, 맞아. 펠로우 선생 외래에서 한 명 입원시켰다고 하던데, 전달받은 사항 있나?”

해서 물으니, 수혁이 아니라 1년 차 우하윤이 손을 들었다.

“아, 네. 제가 주치의 맡아서 보기로 했습니다.”

“응, 그래. 뭐 대강 들으니까 그렇게 심각한 환자는 아닌 거 같으니까 잘 보라고. 아무리 1년 차라고 해도 가을이잖아. 잘 볼 수 있지?”

“네, 교수님.”

“그래. 이번 달은 다들 똘똘해서 좋네.”

우하윤이라면 장강명도 익히 하는 얼굴이었다.

‘아선병원 기조실장 댁 따님이시지?’

태화 의대 못 들어간 게 천추의 한이라더니, 본인이 교수로 있는 병원이 아니라 태화에 딸을 보낼 줄이야.

요새는 학벌이 그리 중요치 않다고 하지만 아직도 그리 사무치는 모양이었다.

‘그래 놓고 그렇게 공격적으로 나오는 건 또 뭐야?’

아선 병원의 요즘 행보는 그야말로 폭군 그 자체였다.

태화의 오랜 라이벌이었던 칠성은 이미 저 멀리 던져둔 지 오래였다.

원래도 칠성 기업 이미지 자체가 좀 얌체 같은 면이 있어 더 그렇게 보이긴 하지만, 아선은 그야말로 직진 또 직진이었다.

‘토요 진료도 늘린다고 하고……. 밑에서 불만 터져 나오던데…… 그걸 우리가 또 따라가니까 어쩔 수 없는 흐름이 되고 있지.’

이른바 치킨 게임인데.

먼저 시작한 놈이 아선 그룹이라고 하는 든든한 동아줄을 쥐고 있어서 그런가 쉽지가 않았다.

장강명이 그런 생각과 함께 사라져 가는 사이, 수혁과 우하윤은 일단 병동 스테이션으로 돌아왔다.

원래 같으면 뭔가 따로 더 전해 줄 말이 있어야 할 텐데.

지금은 환자가 너무 좋아서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음, 그 환자는 어떤 환자래?”

해서 수혁은 지팡이를 책상에 기대 둔 채, 의자에 앉으면서 펠로우가 입원시켰다는 환자에 대해 물었다.

어려울 거 없는 환자라 생각해서 1년 차에게만 말하고 수혁에게 얘기했을 테지만, 또 모를 일이었다.

[지금 말하는 펠로우가 아마 김승욱이겠죠?]

‘응, 속 좁은 위인이지.’

[그렇다고 하기도 좀…….]

첫 만남이 별로였다는 말이 더 옳을 터였다.

당연히 장강명 환자인 줄 알고 슥슥 처방도 고치고 해 놨는데, 알고 보니 김승욱 환자였던 것.

그냥 그뿐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필이면 김승욱이 내린 처방은 틀렸고, 수혁의 처방이 맞았더랬다.

그거 때문에 장강명에게도 한소리를 들었는데, 그 후로 상당히 의도적으로 수혁을 피해 다녔다.

“아……. 젊은 여자 환자입니다. 34세고, 7일 전부터 갑자기 발생한 복부 팽만감을 주소로 외래 내원하였습니다.”

“복부 팽만?”

“네.”

“음.”

복부 팽만이란 증상은 정말이지 모호하기 그지없는 말이라 할 수 있었다.

배가 빵빵하게 불러올 수 있는 상황을 열거하자면 수도 없이 가능하지 않은가.

일단 배가 불러서도 가능했다.

아니면 어딘가에 배가 부딪쳐도 가능한 일이었고.

단서가 더 필요했다.

김승욱이나 우하윤이 제대로 된 의사라면 고작 이 증상만으로 입원시켰을 리는 없었다.

해서 수혁이 지긋이 바라보고 있으려니, 우하윤이 말을 이었다.

“복부 청진에서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으나, 타진 시 복수가 의심되었습니다.”

“오, 그래? 복수?”

“네.”

“음.”

타진으로 복수를 의심한다라.

초음파와 같은 기기가 보편화된 지금에 이르러서는 상당히 구닥다리 방식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무척 효과적이면서도 가장 빨리 시행해 볼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김승욱이 영 실력 없는 사람은 아니네요.]

‘뭐……. 태화 의대 출신에 레지던트도 여기서 수련 받았으니 그건 당연하지.’

과연 제대로 공부한 전문의답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우하윤이 컴퓨터를 두드려 영상을 띄웠다.

아무래도 외래에서 바로 뭔가 찍은 모양이었다.

“CT 찍었구나? 금식이 됐었나 보네?”

“네. 금식하고 왔다고 합니다. 어차피 복부 팽만감 때문에 뭘 먹지도 못한다고 합니다.”

“음, 그래?”

장강명은 별거 아닌 환자로만 알고 있었는데.

노티가 그렇게 들어간 거지, 실제론 꽤 중한 환자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뭘 못 먹는다는 건 굉장히 심각한 증상이었다.

사람은 어지간해서는 못 먹거나 못 싸게끔 만들어져 있지 않아서였다.

“네, 여기 영상입니다. 제가 보기엔 일단 여기 이렇게 복수가 있고요.”

“응. 더 말해 봐.”

“아…….”

수혁은 딱히 바루다의 도움이 없어도 CT 정도는 술술 읽어 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지 오래였다.

애초에 바루다가 쌓은 데이터를 수혁도 이용할 수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에 반해 우하윤은 일반인이었고, 또 1년 차였다.

‘역시 대훈 선배 말이 맞네. 뜬금없이 분위기 시험된다더니…….’

해서 바로 고민에 빠졌다.

“음.”

“모르진 않을 거 같은데.”

수혁의 응원인지 푸시인지 모를 말이 있고 나서는 더했다.

“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어찌 되었건 이수혁 팬클럽 부회장으로서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태화 역사상 아니, 팬클럽 피셜에 따르면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천재인 수혁의 팬을 자처하면서 어찌 공부를 하지 않는단 말인가.

하윤은 언젠가 안대훈이 핏대를 세우며 열변을 토했던 일을 떠올렸다.

“여기 보면…… 간하고 비장이 커져 있는 거 같습니다. 확실히 일반적인 크기보다는 더 커요.”

“그래. 그리고 또 중요한 소견 하나만 더 꼽자면……?”

“음……. 그건…….”

“음성 소견이야.”

“음.”

음성 소견이라는 말은 정상이라는 말과 다름없었다.

곧 지금 상황에서 이상하게 보여야 할 것이 정상으로 보인다는 뜻인데, 이건 좀 어려웠다.

해서 한숨만 쉬고 있으려니, 그제야 수혁이 나섰다.

“간에 딱히 간경화 병변이 보이질 않아. 어찌 되었건 복수가 있다면……. 간 기능 부전을 생각해야 하는데 오래된 병변이 아닐 가능성도 생각해 봐야 된다는 뜻이지.”

“아……. 그렇군요. 아, 이건 중요한 소견이겠는데요.”

“그렇지. 중요하지.”

떠올려야 할 진단명을 하나도 놓치지 않는 것은 나중에 그 진단명을 하나하나 지워 나가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었다.

지금 하윤은 수혁 덕에 급성 질환일 가능성도 염두에 두게 되었다.

‘역시 선배는…… 달라.’

팬심이 더더욱 깊어지는 순간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성으로서의 호감은 여전히 0였다.

[알죠?]

‘알아, 나도 이제.’

수혁도 더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이성으로 수혁을 보지 않게 된 지 오래되었다.

상관없었다.

아니, 상관없다고 믿기로 했다.

바루다를 얻는 대신 연애를 잃었다고 생각하면 딱히 억울할 것도 없지 않은가.

[울어요?]

‘아니, 울기는 누가 울어.’

[부교감 신경 움직임은 거의 우는데 지금.]

‘아냐, 꺼져.’

투닥거리고 있으려니, 환자 엘리베이터에서 누군가 내렸다.

휠체어를 타고 있었는데,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거 외에는 그리 아파 보이진 않았다.

“저분인 거 같아요.”

“그래, 그런 거 같네.”

빠르게 스캔을 해 보니 황달은 보이지 않았다.

복부 팽만도 CT에서 확인한 것처럼 그리 심하진 않았다.

[이건 우하윤에게 맡기죠?]

‘응, 그래. 간만에 운동이나 할까?’

[좋죠. 오래 살아야 합니다.]

해서 수혁은 몇 가지 주의 사항만 일러 주고는 지하에 있는 헬스장으로 향했다.

동시에 하윤은 수혁이 알려 준 것을 떠올리며 환자에게로 향했다.

‘그래, 잘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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