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382화 (382/1,303)

382화 가을 (2)

“어, 수혁이 왔니?”

태화 의료원 지하 7층에 마련된 헬스장은 생각보다도 더 시설이 좋았다.

러닝머신만 해도 20개가 넘었고, 각종 웨이트 트레이닝 기구들도 어지간하면 두 개씩은 있었다.

심지어 파워렉은 세 개나 되었다.

프레 웨이트 존도 따로 있었고.

그럼에도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네, 교수님.”

“그래. 수혁이는 할 일 다 하고 왔겠지. 아무렴.”

오지랖 부리는 교수들 때문이었다.

자기도 할 일 하는 중간에 틈틈이 와서 운동하는 거면서 레지던트만 눈에 띄면 이놈이 정말 일 다 하고 내려온 건가 아닌가를 유별나게 궁금해하는 인간들이 있었다.

환자들한테는 정말 매일같이, 아니 거의 모든 환자에게 운동하라고 하면서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 운동하는 꼴은 못 보는 이상한 인간들이 있다는 얘기였다.

“네. 하하.”

“그래, 너무 무리하지 말고. 내가 저기 트레이너한테 얘기나 좀 해 둘까? 보통 교수들 운동할 때는 와서 봐주는데, 레지던트한테는 안 그러더라고.”

물론 수혁에게는 다 상관없는 얘기였다.

솔직히 말해 얼굴도 잘 모르겠는 교수조차 지금 수혁에게는 굽신거리고 있지 않은가.

[확실히 박상헌 밟아 둔 게 도움이 되네요.]

‘응? 갑자기 웬 박상헌?’

[이 인간 박상헌 친구입니다.]

‘아…….’

수혁이야 기억을 못 해도 바루다는 아니지 않은가.

수혁은 바루다의 말을 듣고 나서야 다시 한번 교수 얼굴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어딘가 민망해하는 구석이 있었다.

해서 수혁은 빨리 갈 길 가라는 식으로 손사래를 쳤다.

“아, 아뇨.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정말 필요가 없기도 했다.

이미 이현종과 함께 온 적이 있어서였다.

트레이너 선생님 불러다가 어찌나 닦달을 해 대는지.

거의 두 시간 동안 기구 사용법만 배웠더랬다.

솔직히 그렇게 배워서 어따 써먹나 싶었다.

[제가 있으니 정말 필요가 없죠?]

‘응, 그건……. 그래. 그래도 살살 하자. 살살.’

한데 막상 배워 놓으니 바루다가 싹 다 데이터화해 두고 있었다.

게다가 이놈은 수혁의 자세를 트레이너보다도 더 상세히 알 수 있는 능력까지 있지 않은가.

[항문에 힘줘요.]

“흡.”

[허리 꼬부라진다, 허리.]

“흐읍!”

[그렇지 않아도 좌측 하지 위약으로 골반이 틀어졌어요. 이거라도 제대로 해야 합니다.]

“흐어업.”

[호흡, 호흡. 운동 신경이 없어도 정도가 있지……. 어떻게 들이쉬고 내쉬고를 반대로 합니까? 남들처럼 제대로 스쿼트 했다간 깔려 죽겠네.]

거기에 독설도 갖추고 있는 놈이었다.

말하자면 운동시키기에 있어 절대 강자란 얘기였다.

보람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종아리 밑으로는 힘이 들어가지 않아 걸을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대둔근을 비롯한 엉덩이 운동은 가능하단 것을 파악한 이래 왼쪽 엉덩이 근육이 많이 강화되었다.

[이렇게 하고 나서 요새 허리 아픈 거 좀 어때요.]

‘아, 안 아프지.’

[해야겠어요, 안 해야겠어요.]

‘해, 해야지.’

[그럼 하세요. 항문 조이고.]

“흐업.”

그뿐만 아니라 상체도 많이 단단해진 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지팡이 짚고 다니느라 좌측 상체에 무게가 많이 실리는 편이라 골반뿐 아니라 허리도 휘고 있었기에 더더욱 등 운동에 열심을 가했는데, 보람이 있었다.

기분은 나쁘지만 거의 바루다 덕이라 할 수 있었다.

한 번을 당겨도 제대로 된 자세로, 제대로 된 자극을 주면서 당기게 되지 않은가.

“후……. 뒤지겠네.”

덕분에 매일 거의 PT 받는 식으로 근육을 조질 수 있었다.

“와, 선배 몸이 진짜 좋아졌네요?”

한창 밀고 당기고 나와서 몸을 씻고 있으려니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 대훈아.”

이 자식은 대체 어떻게 아는 건지는 몰라도 운동하러 오면 절반은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그만큼 운동이라도 하면 또 모르겠는데, 몸 상태를 보면 결코 그럴 수가 없었다.

누가 보면 운동 기기 점검이라도 하러 오는 건가 할 지경이었다.

“이번엔 하윤이랑 페어시죠?”

“어? 어.”

“어때요? 그래도 1년 차 중에서는 완전 에이스라고 소문났는데.”

“음…….”

에이스라.

수혁과 비교하는 건 반칙일 터였다.

수혁은 이미 1년 차 때 펠로우 수준을 넘어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바루다의 도움을 받았으니까.

“확실히 괜찮아. 일단 애가 꼼꼼하고……. 태도가 좋아.”

“역시 우리 팬클럽 부회장답군요.”

“근데 너는 어디 돌길래 시간이 났어?”

“아……. 저요? 전 감염내과요.”

“감염? 신현태 교수님 티칭 마인드 좋으셔서 편하진 않을 텐데?”

“아, 네. 그럼요. 그래도 거들다 도입된 이후로 일단 패혈증 환자가 좀 줄었어요. 확실히 버든이 줄었다고 해야 되나. 그것도 역시 선생님 덕이죠.”

수혁은 매일같이 천연덕스럽게 말을 걸어오는 대훈을 바라보았다.

세월이 갈수록 점점 더 빠지는 머리 때문에, 이제 대훈의 액면가는 수혁보다 적어도 15년은 위였다.

하지만 하는 짓은 귀여웠다.

얼마나 수혁을 존경하면 이렇게 열심이겠는가.

‘나랑 얘기하고 싶어서 내려오는 건데……. 오늘은 시간도 있고 하니까 밥이나 먹을까?’

[기절하는 거 아닙니까?]

‘그럴 정도는 아닐걸.’

해서 수혁은 수술복을 대강 걸친 대훈의 어깨를 툭 하고 쳤다.

“야, 저녁 안 먹었으면 밥이나 먹자. 내가 사 줄게.”

“어…… 억. 정말요?”

“그래. 뭐가 억이야.”

“뭐, 뭐 시킬까요?”

“시켜? 아냐. 나가서 먹자. 나 차 있잖아.”

“아…… 아! 그거! 그거 나오셨어요? 왕자님이……?”

“어. 아직 오피스텔은 짓고 있는데 차는 나왔어. 가자.”

“오……. 네네.”

예상대로 대훈은 기절할 듯이 기뻐했다.

수혁은 그런 대훈을 데리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보통 레지던트들은 병원 옆에 있는 장례식장이나 길 건너편에 있는 공영 주차장을, 그것도 연차별로 2명 내지 3명 정도만 사용할 수 있었지만, 수혁은 예외였다.

차를 안 가지고 다니는 이현종이 자기 자리를 양보해 준 까닭이었다.

다시 말하면 원장 자리에 차가 떡하니 대어져 있었다.

“와……. 차가 입구 바로 앞에…… 역시 성공하신 분.”

“문 열렸으니까 타.”

“옆자리 타도 됩니까?”

“그럼 뒤에 타냐? 둘이 타는데?”

“오.”

온갖 호들갑을 다 떨어대고 있는 대훈을 태우고 나니, 그제야 하윤 생각이 났다.

‘당직은 아니었던 거 같은데. 지금 우리 파트 할 일도 없지 않나?’

[아, 그럼 불러서 사 주죠. 지금 레지던트 이하 인턴, 학생들 사이에서 수혁에 대해 도는 소문 태반이 이 둘이 만든 겁니다.]

‘응, 그런 거 같더라.’

거의 수혁어천가라고 해도 좋을 허무맹랑한 소문까지 돌고 있을 지경이었다.

나쁜 얘기는 하나도 없어 그냥 두고 있기는 한데, 하여간 그거 만든 사람들에게는 뭐라도 보답을 해 주긴 해야 했다.

“어, 하윤아. 밥 먹었어?”

“아, 아뇨. 이제 환자 보고 처방 넣고 확인 중입니다.”

“그래? 나가서 밥 먹고 올래? 내가 사 줄게. 대훈이랑 같…….”

“네! 지금 내려갈게요!”

하윤 또한 부르자마자 아래로 튀어나왔다.

당직실에 있는 옷 아무거나 대강 입고 나온 모양인데, 그럼에도 태가 났다.

분명 수혁이나 대훈과 비슷한 상황일 텐데 뭔가 신경 쓴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할까?

[유전자의 차이죠. 우창윤 교수가 머리는 좀 없어도 이목구비는 썩 괜찮은 편 아닙니까?]

‘아……. 얘는 여자라 빠질 염려도 없네. 그 교수님은 심었다던데.’

[그런 것치고는 자연스럽던데요?]

‘사모님이 디자이너시잖아. 매일 머리 만져 준다는 소문이 있어.’

[아하.]

수혁은 애써 부러움을 감춘 채 이현동, 신현태 등과 자주 갔던 식당을 찾았다.

레지던트 레벨에서 가기엔 가격이 부담되는 식당이었다.

일단 외관에서부터 풍겨 오는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아…….”

“여기, 여기서 사 주신다고요?”

아니, 위치부터 그랬다.

청담에 있는 식당이라니.

이름마저 무슨 당이라 그럴싸해 보였는데, 외관이 이러니 선뜻 용기가 안 날 지경이었다.

“응? 아, 사 줄게. 나 돈 많어.”

하지만 수혁은 이미 성큼성큼 걸어 들어간 지 오래였다.

옷차림이 허름해서 그런가 뭔가 좀 안 어울리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워낙 당당했기에 누구도 막지는 못했다.

“어, 네네.”

“돈이…… 돈이 뭐가 많아요. 레지던트 월급 빤한데.”

오히려 말린 것은 팬클럽 멤버들이었다.

태화 의료원 월급이 일반적인 레지던트 월급에 비해 많은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래 봐야 레지던트는 레지던트였다.

4년 계약직인데 많아 봐야 뭐 얼마나 많겠는가.

절대 이런 데 올 정도는 아니었다.

“야, 나 거들다 로열티 먹잖아.”

“아?”

“지금 북미는 슬금슬금 원격 의료 늘고 있거든. 거의 뭐…… 전체 병원 70%가 시스템은 갖추고 있대. 전체 인구 25% 정도가 원격 의료 경험했고.”

“오…….”

해서 수혁은 약간의 거들먹거림과 함께 설명에 들어갔다.

물론 그래 봐야 딱 감이 오진 않았다.

그저 팬클럽 회장, 부회장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리액션에 힘주고 있을 뿐이었다.

“매달 정산돼서 들어오는데 그게 적지가 않아요.”

“얼만데요?”

“니들만 알고 있어야 된다?”

“네네. 당연하죠.”

“한 2500 정도 들어왔어.”

“이번 달에요?”

“어.”

“와……. 미쳤…….”

하지만 돈 얘기가 직접적으로 나오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곤 확연히 편안한 얼굴이 되어 메뉴판을 들여다보았다.

“뭐든 시켜.”

“네, 알겠습니다.”

부담 없이 먹일 수 있었단 얘기였다.

배부르게 먹인 다음엔 병원으로 직접 데려다주기까지 했으니 둘의 반응이 어떻겠는가.

“감사합니다!”

“평생 오늘 잊지 않겠습니다!”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셀카까지 몇 장 찍어 줬더니, 안대훈은 거의 기절 직전이었다.

[충성심 올라가는 소리 들린다.]

‘너도 들려? 야 나두.’

그래서 그런가, 하윤도 더 열심히 환자를 보았다.

처방 낸 것도 두 번 세 번 확인하고, 결과는 그것보다 더 여러 번 확인하고.

그렇게 정성을 다하면 대개는 보람이 있기 마련이었고, 실제 환자 상태는 보다 빨리 좋아지고 있었다.

단 한 명, 김승욱이 입원시킨 환자를 제외하면 그랬다.

“이상해요.”

입원한 지 3일째가 되던 날, 우하윤이 수혁에게 상담을 요청했다.

수차례 김승욱과 환자에 대해 토의를 했음에도 답이 안 나와서였다.

수혁도 건너 들어서 상황을 대강 알고 있었기에 거절하지 않았다.

“왜?”

“일단…… 이게 검사한 소견인데요.”

하윤이 띄운 것은 초음파였다.

간에 있어서는 CT와 초음파 모두 장단이 있었는데, 적어도 간경화 상태를 파악함에 있어서는 간혹 초음파가 더 유리할 때도 있었다.

지금이 그랬다.

“간경화가…… 약간 있네. 심하진 않은데.”

“네. 그런데 바이럴 마커는 다 음성이에요.”

“B, C 둘 다?”

“네.”

“환자 BMI가 어떻지?”

“19요.”

“흠……. 그럼 윌슨인가? 비알코올성 지방간염(Non alcoholic steatohepatitis, NASH)라기엔 말랐는데?”

“근데 윌슨도…… 항체 검사에서 음성이었어요?”

“그래?”

역시나 쉬운 환자는 아니었다.

하긴 그랬다면 지금까지 진단이 안 되었을 리가 없었다.

[수혁 지금 웃고 있는 거 아십니까?]

‘응? 내가?’

수혁은 저도 모르게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있었다.

이미 병실을 향해 몸을 돌린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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