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384화 (384/1,303)

384화 복수가 차는 원인? (2)

윌슨도 꽝, 레이노도 꽝.

죄다 꽝만 나오는 상황이었다.

‘정말 그냥 불명의 간경화인가?’

[이현종 원장의 말이 떠오르는군요.]

‘아빠가 뭐랬지? 하도 무슨 말을 많이 하시니까 헷갈리네?’

이현종의 어록은 거의 매일 갱신되는 편이었다.

애초에 편한 사이에서는 말이 좀 많은 편이기도 한데, 원체 똑똑한 데다가 명성까지 있으니 사람들이 자꾸만 의미를 부여해서였다.

바루다 또한 그랬다.

이 녀석은 인공지능인 주제에 의외로 굉장히 사람 같은 면이 있었다.

권위에 곧잘 굴복한다고 해야 할까?

[불명열이 아니라 우리가 이유를 못 찾은 거라는 말 잊었습니까? 인상적인 말인데요?]

‘아……. 그건 정말 맞는 말 같기는 해.’

원인 불명의 열이란 말이 사실 어디 있겠는가.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라는 속담은 사람 몸에도 무리 없이 적용이 가능할 터였다.

이현종의 말처럼 이유 없는 증상은 없다고 생각해야만 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수혁은 그래야 했다.

수혁은 이현종의 아들일뿐더러 앞으로 통합진료센터를 이끌어 나갈 인재였으니까.

‘오케이. 그럼 원인 불명의 간경화는 치워 둬. 뭐 때문에 왔을까?’

[지금 들고 있는 정보를 토대로 뭐라도 생각해 봐야죠. 근데 죄다 음성이라 지금으로서는 어렵긴 합니다. 차라리 김승욱 선생에게 가서 간생검을 건의하는 게…….]

‘근거가 없잖아. 원인 없는 간경화 생각하고 있는데 간생검을 뭐 하러 해. 그게 정말 맞으면 그거야말로 의미 없는 짓이지.’

[그것도 그렇군요.]

이미 영상을 통해서도 간경화인 건 알고 있지 않은가.

생검해서 간경화인 걸 보다 확실하게 아는 게 대체 뭔 의미가 있을까?

수혁의 말이 백번 천번 맞았기에 바루다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지금 쌓아 둔 데이터를 굴려 댔다.

이리저리.

별로 의미 없는 짓거리처럼 보였다.

어차피 음성인데 굴린다 한들 뭐가 되겠는가.

[음?]

‘왜? 아?’

하지만 굴리는 주체가 수혁과 바루다라면 얘기가 조금 달라질 수도 있었다.

지금도 그랬다.

‘류마토이드 팩터고 뭐고 다 음성인데……. 환자는 레이노 현상을 보이잖아?’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원인이…… 류마토이드성 질환이 아니란 얘기죠.]

‘그래, 그다음으로 흔한 건…… 혈행장애야. 말단 부위의 혈행장애를 일으킬 수 있는 건 뭔가 혈액 응고에 문제가 생긴 경우를 떠올릴 수 있지.’

[맞습니다. 음. 그리고 혈행장애는 당연히 간기능 부전을 일으킬 수 있겠군요?]

‘그중에서도 복수가 주된 증상으로 나타나는 질환은…….’

[버드 키아리 증후군(Budd-Chiari syndrome)?]

둘은 의미 없어 보이는 소견을 굴리다가 뜬금없이 의미가 엄청 있어 보이는 진단명을 꺼내 들 수 있었다.

배경 지식이 어마무지하게 쌓여 있어야만 가능한 일인데.

바루다의 성화 때문에 수혁은 정말로 공부를 열심히 해 온 몸이지 않은가.

단순히 알고 있는 것만 따져 보면 이현종보다도 많을 수 있었다.

“몇 시지?”

[소리 내서 말하시네. 그거 하지 말라니까요. 사람들이 또 이상하게 봐.]

“당직방인데 뭐 어때. 열 시네. 열 시……. 음. 너무 늦기는 했는데……. 일단 병동으로 가 보자.”

[네. 그러죠. 제발 가면서는 속으로 말씀하시고요.]

수혁은 바루다의 잔소리를 들어 가며 크룩스를 신었다.

어디 외래 가는 것도 아닌 데다가 늦은 시간 아닌가.

수술복 차림에 더해 맨발에 크룩스를 신는다고 해도 아무도 뭐라 할 수는 없을 터였다.

오히려 마음에 걸리는 것은 따로 있었다.

‘근데 퇴원 처방이 나 있네.’

[모두 음성이 나오지 않았습니까. 원인 불명의 간경화라고 확신하게 되었겠죠.]

‘뭐……. 무리는 아니지.’

비난할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희대의 인공지능이라 할 수 있는 바루다를 들고서도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던가.

그나마 바루다가 이리저리 데이터를 굴려 본 덕에 아예 거꾸로 생각해 볼 기회가 생겼으니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아마 수혁도 이 퇴원 처방에 백 퍼센트 공감하고 있었을 터였다.

“응? 선생님?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병동에 가 보니 하윤이 앉아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오늘 갈아입은 수술복에 질끈 묶은 생머리를 하고서였다.

옛날엔 저 모습을 볼 때마다 조금은 설렜는데, 아예 포기하고 나서는 그냥 열심히 한다 정도의 감정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힘내십쇼.]

‘새꺄, 닥쳐.’

바루다는 조금은 비참하게까지 보이는 수혁의 감정 흐름에 아주 약간의 죄책감이라도 느꼈는지 응원을 보내왔다.

물론 수혁에게는 비꼬는 것으로만 들릴 뿐이었다.

실제로도 그런 뜻이 아주 없지는 않았기에 바루다는 진짜로 닥쳤다.

“어, 하윤아. 넌 웬일이냐?”

“아……. 연말에 전공의 시험 있잖아요. 그거 준비도 할 겸, 환자도 볼 겸 요새 그냥 이 시간엔 나와 있어요. 당직방에 있다 보면…… 아무래도 좀 분위기에 휩쓸려서요.”

“아.”

하윤은 수혁과는 여러모로 다른 인간이었다.

인싸라고 해야 하나?

이쁜 데다가 성격도 좋고, 겸손하기까지 하니 사람들이 옆에 붙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다른 건 차치하고서라도 1년 차 초기부터 머리 다치는 바람에 따로 떨어져 있었고, 또 미친놈이란 소문까지 돌았던 수혁과는 사정이 많이 달랐다.

“맞네, 너 당직방 같이 쓰지?”

“네. 보통은 그렇죠, 하하.”

그러다 보니 당직방도 같은 연차 여자들과 쓰고 있었다.

보통의 레지던트들은 자유 시간이 나 봐야 1, 2시간이고, 일이 끝났다기보다는 중단한 느낌이기에 대부분의 유희는 당직방에서 이루어지기 마련이었다.

뭔가 시켜 먹거나 하는 게 다라는 건데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는 적어도 남들보다 앞서 나가긴 어려웠다.

태화 의료원의 수련 시스템이라는 게 워낙에 빡세긴 하지만 이 안에서 두각을 나타내려면 역시나 남들 노는 시간에 공부를 해야만 했다.

“그래, 그것도 스트레스지. 아무튼…… 그 환자 있잖아? 김승욱 선생님 환자.”

“아, 네. 다 음성 나와서 원인 불명의 간경화라고 판단했습니다. 이뇨제 퇴원 약으로 지참해서 내일 퇴원할 예정입니다.”

“그게 말야.”

“네.”

별 사이 아니었다면 이쯤에서 하윤은 짜증이 났을 터였다.

공부하려고 당직방에서까지 도망 나온 마당에 위 연차의 수다를 들어 주고 싶겠는가.

하지만 상대는 이수혁이었다.

존경해마지 않는 상대였다.

“그 환자 류마토이드 팩터 포함해서 다 음성이잖아?”

“네? 아, 네.”

“근데 레이노 현상은 있고.”

“네.”

“그럼 레이노 현상은 왜 생겼다고 생각해. 이것도 불명으로 둔 거야?”

“어…….”

그거에 대한 논의는 사실 거의 없었다고 봐도 좋았다.

어차피 간이 중요하지 다른 게 중요하냐 뭐 이런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수혁의 말을 듣고 보니 뭔가 좀 쌔했다.

간경화도 불명인데, 이것도 불명?

너무 대강대강 환자를 보는 느낌이 들지 않은가.

“보통 혈행장애가 있으면 생기지, 레이노 현상이?”

“아……. 네. 자가면역질환이 아니라면…… 그게 흔한 원인입니다.”

“이 환자는 자가면역질환은 아니라고 나왔잖아?”

“네.”

“그럼 혈행장애는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어……. 그게…… 어…… 그게 그렇게 되네요?”

이미 하윤은 수혁의 말에 빠져든 지 오래였다.

논리도 단단한 데다가 말투에 묘한 매력이 있기도 해서였다.

“혈행장애가 있을 때 간경화가 발생할 수도 있지? 진단명이 있는데, 혹시 알아?”

“아……. 버드 키아리…….”

“그래.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겠어.”

“어, 어쩌죠? 퇴원 처방 이미 나가서 환자분께 안내가 됐는데. 그거 진단하려면 간생검 필요하지 않을까요?”

“응. 그렇지. 일단 김승욱 선생님한테 말씀을 드려야 할 텐데……. 이게 참.”

“아, 선생님이랑 좀 껄끄럽죠.”

껄끄럽다기보다는 김승욱이 의도적으로 피하는 사이라 할 수 있었다.

후배에게 실력으로 뒤처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네가 이대로 노티 하면 들으실까?”

“아, 아뇨. 자존심이 진짜 강하세요. 아마 더 강한 근거를 요구하실 거 같아요.”

“근거를 대면, 받아들이시긴 하겠지?”

“아, 당연하죠. 그건.”

“그럼 Liver dynamic CT를 찍자. 저번에 보니까 그냥 찍었더라고.”

“아, 혈관을 봐야 하니까요?”

“응. 간은 혈관이 사실 중요하잖아?”

간을 두고 괜히 핏덩이, 핏덩이 하는 게 아니었다.

다른 장기에 비해 굉장히 복잡한 혈관 분포를 보이는 장기였다.

우선 동맥과 정맥은 다들 그런 것처럼 있었다.

그 외에 하나가 더 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바로 간문맥(Portal vein).

거의 대동맥만큼이나 굵은 이 혈관을 통해 엄청난 양의 혈액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 모든 혈관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보려면 liver dynamic CT라고 하는 상당히 특이한 세팅의 CT 촬영을 해 봐야만 했다.

“네, 제가 그럼 처방을 내겠습니다.”

“응, 내가 전화해 볼게. 세팅이 복잡하기는 할 텐데……. 김진실 교수님 세팅대로 해 달라고 해야지.”

“네.”

해서 하윤은 처방을 내고 수혁은 CT실에 전화를 걸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런 종류의 검사는 정규 시간에나 하는 검사지, 밤에 하는 검사는 아니었다.

“아……. 꼭 필요하신 거예요?”

“네.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이거 진짜 이수혁 선생님 부탁이니까 하는 겁니다.”

“네, 감사해요. 제가 김진실 교수님께 따로 말씀드릴게요.”

“네네. 그럼…… 음. 지금 검사 하나 하고 있으니까 10분 후에 내려 주세요.”

“네.”

물론 수혁은 이런저런 이유로 해서 약발이 좀 드는 편이었다.

수혁을 둘러싼 소문만 해도 한두 개가 아니지 않은가.

미친놈, 원장 아들, 차기 부센터장, 김진실 교수의 논문 메이트 등등.

덕분에 어렵지 않게 환자를 내릴 수 있게 되었다.

“환자분, 검사 하나만 더 해 볼게요. 혹 아까 말씀드린 병이 아닐 수도 있어서요.”

아무래도 처방이 더 빨리 끝났기에 때문에, 하윤은 수혁이 전화하는 동안 환자에게로 달려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아…….”

내일 퇴원이 예정되어 있는 마당에 검사라니.

좀 뚱딴지같은 소리처럼 느껴질 수 있었다.

하지만 하윤의 열심은 환자를 감화시킨 지 오래였다.

“알겠어요. CT예요?”

“네. 죄송합니다. 근데 다른 가능성이 생겨서요.”

“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송 요원이 올라왔고, 환자는 묵묵히 그를 따라 지하 CT실로 내려갔다.

하윤과 수혁 또한 마찬가지였다.

딱히 달려가야 할 만큼 급한 건 아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괜찮으세요?”

“응? 아, 응. 괜찮아. 그냥 좀 오래 걸으면 뻐근할 뿐이야. 그래도 운동하면서 더 나아졌어.”

“다행이에요. 확실히…… 선배 몸이 좀 좋아졌다고들 하더라고요.”

“응? 누가?”

“인턴들이요. 선배는 항상 화제의 중심에 있죠.”

“그래? 음.”

여자 인턴들일까?

그럼 내가 인기가 있다는 뜻인가?

별거 아닌 말이 망상을 일으키고 그 망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일단 환자부터.]

‘아, 오키.’

보다 못한 바루다가 나서지 않았다면 아마 이름 모를 후배랑 손주까지 봤을 터였다.

위이잉.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기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몸이 불편한 수혁이 환자 포지션 하는 데 도움이 되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일찌감치 빠져 있었더랬다.

“영상 넘어옵니다.”

“어디 보자.”

“음…….”

“더 기다려 보자. 다이내믹 CT는 판단하는 데 좀 걸려.”

“네.”

아무래도 하윤 레벨에서 보기는 좀 어려운 검사였다.

물론 수혁에게는 아니었다.

바루다에게도 그랬다.

[delayed phase까지도 중앙 및 우측 간정맥이 확인되지 않는군요.]

‘막혔구나.’

[버드 키아리가 맞습니다.]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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