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5화 복수가 차는 원인? (3)
“음.”
수혁이 결론을 내리고 나서도, 하윤은 한참 동안 영상을 보며 끙끙거리고 있었다.
암만 봐도 잘 모르겠어서였다.
그냥 영상만 보고 있다면야 조금 마음이 나았을 텐데.
옆에 있던 수혁은 고개를 연신 끄덕이더니, 숫제 몸을 일으킨 채였다.
처음 보는 사이였다면 모르겠으나 하윤은 수혁의 팬클럽을 자처하고 있는 몸 아닌가.
대훈만큼 열성적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알건 다 안다는 얘기였다.
‘이쯤에서 그랬는데? 뭐가 보이는 거지?’
수혁이 눈치챘다는 것 정도는 알게 되었는데, 어디서 뭘 보고 그랬는지는 오리무중이었다.
그사이 수혁은 마지막으로 바루다와 진단명을 정돈 중이었다.
‘버드 키아리 신드롬의 원인은 그럼 뭘까?’
[지금 당장 그것까지 알아내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바루다의 요구에 따라 수혁은 다시 한번 화면을 바라보았다.
사실 딱히 그럴 필요가 없기는 했다.
바루다가 영상을 데이터화해 둔 덕이었다.
이런 식의 자료는 핵심 데이터만 남기고 폐기하기 마련이지만, 보고 난 직후에는 얘기가 달랐다.
자꾸 복기하다 보면 아까는 미처 찾지 못한 것이 보일 수도 있어서였다.
‘우선 중앙, 우측 간정맥이 막힌 건 맞아. 그 주변으로 뭐 보이는 거 있어?’
우리가 흔히 혈관이 막히는 현상에 대해 걱정할 때 떠올리는 것은 정맥보다는 동맥일 터였다.
워낙에 뇌경색이나 심근경색과 같은 병들이 동맥과 연관이 있어서일 터였다.
일반인들에게 정맥은 그리 중요한 혈관이 아닌 것처럼 인식된다는 얘기이기도 한데.
의학적으로는 그렇지가 않았다.
이렇게 정맥이 막혀 버리면, 혈액의 저류가 일어나게 되고 그것이 장기적으로 이어지다 보면 드물긴 하지만 해당 장기의 기능 부전을 일으킬 수 있었다.
[없습니다.]
‘확실히 봐 봐. 이게 그냥 잘 안 생긴다고.’
[없어요. 이전 영상을 리뷰 해 봐도 그렇습니다. 만약 뭐가 있었다면 놓쳤겠습니까? 아직 영상의학과 판독이 나오기 전이기는 하지만, 소화기내과 의사들이 간을 못 보진 않습니다.]
‘하긴. 그것도 그렇긴 해. 음…….’
[그리고 수혁 눈에도 보이는 거 없죠?]
‘없어.’
[그럼 그냥 넘어가세요. 자꾸 상상의 영역으로 넘어가려고 하지 마시고.]
이처럼 중요한 혈관이 아무 이유 없이 덜컥 막히는 일은 없다고 봐야 했다.
간 기능 부전이 원인 불명으로 생기는 일이 없는 것처럼, 혈관도 그랬다.
그 원인에 따라 1차, 2차로 나뉘었는데 지금 수혁이 묻는 건 2차 버드 키아리 신드롬에 대해서였다.
이차적인 버드 키아리 신드롬은 주변에 혈관을 압박하는 구조물이 있는 경우를 지칭했다.
암이나 낭종 또는 농양인데 어떻게 봐도 지금 이 환자에서는 그 비슷한 것도 없었다.
‘그럼…… 혈관염이나 혈전이군. 손가락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이쪽이 더 설득력 있지?’
[네. 그건 좀 더 워크업이 필요할 겁니다. 혈액내과로…… 조태진 교수에게 보내서 워크업을 해 보라고 하죠.]
‘우리는 우선 치료를 하고?’
[네. 지금 당장 와파린(Warfarin: 항응고제)을 처방하여야 합니다. 이미 간경화가 생기긴 했지만, 더 악화만 안 된다면, 아직은 그렇게까지 커다란 문제를 일으킬 정도는 아닙니다.]
‘그것도 그래. 오케이.’
수혁은 환자의 진단명을 버드 키아리 신드롬 중에서도 1형으로 정한 후,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검사실 문을 열고 환자에게로 향하면서였다.
“어, 선배 제가 할게요.”
수혁이 환자 옮기는 걸 도울 거라는 오해를 한 하윤이 즉시 나섰다.
그게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그럴 생각도 없던 수혁은, 그러나 고맙다는 말을 했다.
거짓말을 입 벌리는 대로 할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그래도 알아서 한 오해를 굳이 정정해 줄 필요도 없지 않겠는가.
“아, 그래. 고마워.”
“네.”
수혁은 방사선사와 하윤이 환자를 침대로 옮기는 동안, 그 뒤에 다가간 채 입을 열었다.
환자를 향해서였다.
아무래도 방금 검사를 마쳐서 그런가 환자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본래 조영제가 들락거리는 검사라는 게 그랬다.
심한 경우에는 화끈거림을 넘어 뜨거움을 느끼는 환자들도 있었다.
[이상이 있어 보이진 않네요. 모니터상 수치도 전부 정상입니다.]
조영제 부작용으로 사망하는 경우도 10만 명당 1명꼴로 발생할 수 있다는 보고도 있지 않은가.
수혁은 바루다의 도움을 통해 환자에게 부작용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참이었다.
때문에 환자와는 달리 수혁의 얼굴엔 여유가 넘쳐 흘렀다.
“환자분. 검사는 안 힘드셨어요?”
“아……. 네. 그냥 뭐…….”
덕분에 환자도 덩달아 조금은 안심한 얼굴이 되었다.
의사들이 괜히 무표정 또는 재수 없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미소를 연습하는 게 아니었다.
어찌 되었건 한 사람의 치료를 책임진 사람으로서 정중동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이것만으로도 환자의 멘탈 지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다행히 검사에서 뭐가 좀 보였습니다. 퇴원 전날 고생하신 보람이 있었어요.”
“아, 정말요?”
“네. 진단명도 나왔습니다.”
“아……. 뭔데요?”
이제 환자는 엘리베이터 내에 있었다.
하윤과 이송 요원이 열심히 끌어서였는데, 하윤은 딱 환자를 엘리베이터 안에 넣자마자 수혁에게 귀를 기울였다.
마침 진단명을 물은 참이라 더더욱 그랬다.
수혁 또한 그런 하윤을 확인한 채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진단명을 읊었다.
“버드 키아리 신드롬입니다. 혈전…… 그러니까 이게 피떡인데, 이런 게 간 혈관을 막는 질환입니다.”
“어……. 그럼…… 심근경색 같은 건가요?”
“완전히 같은 개념은 아닌데, 결국은 비슷합니다. 그렇게까지 급격하게 장기가 손상받지는 않지만, 천천히 손상받긴 하거든요.”
“치료는…… 치료는 가능할까요?”
환자들이 제일 궁금해하는 건 역시나 치료 가능 여부였다.
내가 무슨 병인지가 솔직히 뭐가 중요하겠는가.
다시 낫는 게 중하지.
그에 반해 하윤은 버드 키아리라는 진단명을 되뇌고 있었다.
진지한 얼굴로 몇 번인가 같은 이름을 반복해서 입에 담는 하윤의 모습은 마치 여물 먹는 소의 되새김질 같기도 했다.
‘버드 키아리라면 아까 거기서 혈전이 보였어야 하는데, 뭐지?’
수혁과 아예 모든 과정을 함께했음에도 하윤은 실마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하윤 입장에서는 황망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수혁에게는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애초에 손가락 하얗게 변하는 증상만으로 뭔가 혈류에 이상이 있을 수 있겠단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작은 단서를 하나하나 조합해서 커다란 답에 도달하는 과정에 익숙해지다 못해 이제는 즐기게 되기까지 한 수혁이었다.
“네, 가능합니다. 버드 키아리 신드롬은 2차 적인 원인이 없는 경우, 그렇게 치료가 어렵지는 않거든요. 지금…… 아, 이제 내리겠네요. 병동 도착하면 바로 처방 내리겠습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대신 바로 퇴원은 어렵겠어요. 원인이 밝혀진 이상 영상의학과와 상의해서 필요하다면 생검을 해 봐야 될 수도 있고 또 일단 약이 듣는지도 봐야 하거든요.”
“아, 네네. 아이고……. 그거야 뭐…….”
찜찜한 상태로 퇴원하는 것보다는 모든 게 확실해진 다음에 퇴원하는 게 훨씬 낫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몸이 안 좋아 퇴원해도 직장에 복귀하기보다는 집에서 쉴 요량이었던 환자는 한국 사람 특유의 추임새인 아이고를 연발하고는 병실로 돌아갔다.
수혁은 환자가 몸을 돌리자마자 처방에 와파린을 넣었다.
“저, 선배.”
거기까지 확인한 하윤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함이었다.
“어, 맞아. 안 그래도 영상 보여 주려고 했어. 너 노티 하려면 어디가 어떻게 됐는지는 알아야지?”
“아, 네네. 감사합니다.”
수혁도 한참 전부터 눈치채고 있던 참이라 즉시 영상을 띄웠다.
그리곤 dynamic CT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과 함께 portalvenous phase 창으로 넘어갔다.
“자, 그럼 여기서는 간으로 들어간 피가 이제 정맥을 통해 나가야 하는 시점이지? 이전까지 보였던 간 정맥은 사실 의미가 없어. 잘 보이지도 않았고.”
“아……. 그럼 여기서 조영 증강되는 건 간정맥이겠네요?”
“그렇지. Arterial phase가 아니니까. 이 뒤에 무식하게 큰 건 간문맥(Portal vein)이지.”
“오…….”
언제나 그러하듯 눈높이에 맞추면서도 간결하기 그지없는 설명이었다.
내과 의사의 수준을 아득히 넘어선 영상 의학적 지식을 갖추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나 싶을 수도 있겠는데, 사실 현대 의학에 있어서 제대로 된 진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영상학적 정보를 바르게 해석하는 것이 기본이지 않겠는가.
아마 모르긴 해도 앞으로는 더더욱 그렇게 될 터였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환자의 몸을 찌르거나 하는 침습적인 검사 대신 영상학적 검사를 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테니.
[이게 다 제 덕인 건 알고 계시죠.]
‘어 인정.’
[이상하게 기분이 별로네.]
‘아냐, 인정해.’
[음.]
바루다 덕이라 할 수 있었다.
이놈이 아니었다면 짧은 시간 내에 그토록 많은 영상을 검토해 볼 수도 없었을뿐더러, 교과서도 읽을 수 없었을 테니까.
“그럼…… 이거…… 아, 원래 여기가 조영 증강이 되어야 하는데 없군요? 정확히…….”
“중앙, 우측 간정맥이야. 나머지는 돼. 그래서 그나마 버틴 거 같기도 하고.”
“아……. 그렇구나.”
“여기 증강이 안 되는 건 혈전이 생겨서지. 와파린 쓰면 풀릴 거야.”
“와…….”
그런 내막을 모르는 하윤으로서는 그저 수혁이 대단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아니, 내막을 알았다고 해도 대단한 것은 대단한 것이었다.
지금 수혁의 수준은 어지간한 영상의학과 교수급은 되니까.
“그럼 노티 할 수 있겠지?”
“네.”
그런 수혁에게 정보를 싹 전수받은 참 아닌가.
어디 무섭기로 유명한 김승규도 아니고 김승욱과 같은 펠로우에게 하는 노티가 무서울 수가 없었다.
조금 늦은 시간이라는 게 걸리긴 하지만, 아침에 출근해서 사실은 퇴원하면 안 된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는 밤에 듣는 게 낫지 않겠는가.
‘어차피 펠로우 샘이라 지금 병원일 수도 있어.’
11시 반이 훌쩍 넘은 시간이지만, 하윤은 그런 가능성마저 있다고 생각했다.
무리는 아니었다.
펠로우를 병원에서는 펠노예라고도 불렀으니까.
어떻게 보면 레지던트보다도 더 고생스러운 과정일 수도 있었다.
“어, 우 선생.”
아니나 다를까 김승욱은 거의 전화벨이 울리자마자 전화를 받았다.
목소리도 이보다 정상일 수가 없었다.
“네, 선생님. 환자분 때문에요.”
“낼 퇴원 아닌가? 상태 안 좋아?”
“아, 아뇨. 실은…….”
하윤은 재빨리 해야 할 말을 속사포처럼 쏘아 댔다.
밍기적대면 다른 검사 했다고 하자마자 지랄할 것이 뻔해서였다.
“어? 뭐…… 버드 키아리라고?”
“네.”
“병동이야?”
“네.”
“내가 갈게. 근데 너 혼자 생각한 거야?”
“아, 아뇨. 이수혁 선생님이랑…….”
이 말을 하면 화낼까 싶은 마음에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퍽 의외였다.
“아, 이수혁 선생님이 봐주셨어?”
“네.”
일단 극존칭이었다.
“그럼 맞겠는데……. 그래도 내가 설명하는 게 맞지. 근데 이 선생님도 계신가?”
“네.”
“어디 안 가신대? 안 쉬셔?”
“어…… 한동안 여기…….”
“알았어. 커피 좋아하시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