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화 추계 학회 그리고 (1)
김승욱은 정말로 디카페인 커피를 사 들고 와서 병동에 있던 수혁에게 선물로 주고는 환자에게로 달려갔다.
그래도 명색이 펠로우라 수혁이 따라가려고 하자 손사래를 쳤다.
“아뇨, 아뇨. 선생님. 그냥 제가 말씀드릴게요.”
어찌나 조심스럽고 또 공손한지 수혁은 저 사람이 펠로우 1년 차가 아니라 그냥 1년 차인가 싶을 지경이었다.
당황한 것은 하윤 또한 마찬가지였다.
“뭐죠?”
“그러니까.”
“근데…… 저는 이해가 가기도 해요. 저야 아랫사람이니까 선배가 아무리 잘해도 그냥 대단하다 하지만 윗사람이면……. 부담스러울 것도 같거든요.”
“뭐……. 그럴 수도 있지.”
하윤의 말에 굳이 부정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수혁이 생각하기에도 자기 같은 놈이 아래 있으면 마냥 좋지만은 않았을 테니까.
차이가 꽤 많이 난다면 또 모르겠지만, 비슷한 그레이드라면 비교만 당할 테니 좋을 게 아예 없을 거 같기도 했다.
[자화자찬 죽이는군요.]
‘사실이잖아.’
[틀린 말은 아니니, 인정합니다.]
‘그렇다니까. 음. 그럼 환자 정리도 됐고…… 다시 자러 갈까?’
[내일 예상되는 기상 시간은 7시. 지금 자면 6시간 반은 잘 수 있겠군요. 그러시길 권유합니다.]
‘오케이.’
수혁은 하윤과의 대화를 마무리하고는 당직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곤 침대에 딱 누우려는데, 책상 위에 놓아 둔 브로슈어가 눈에 띄었다.
다름 아닌 내과 추계 학회에 대한 브로슈어였다.
내과 전체가 모이는 학회이면서 동시에 일 년에 춘계, 추계 딱 두 번만 열리는 거대한 학회였다.
‘초록만 내놓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네.’
[김진실 교수와 함께 연구한 그거죠?]
‘그거지. 그거 말고 실험 논문 쓴 게 뭐가 있어.’
[하긴. 여전히 부족합니다, 수혁은.]
‘인마 그게 내가 부족해서 그러냐? 돈이 너무 많이 들잖아.’
[거들다인지 나발인지로 돈 좀 만지지 않나요?]
‘월에 꼴랑 1, 2천 들어오는 걸로 연구가 되냐?’
임상 연구라면 1, 2천 아니라 1, 2백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연구가 많았다.
아니, 아예 돈을 들이지 않고도 할 수 있었다.
여기가 태화 의료원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실험 논문은 얘기가 많이 달랐다.
특히 김진실 교수와 연구했던 이 논문은 돈이 엄청나게 들어갔다.
‘암 걸린 돼지가…… 얼마나 비싼지 봤잖아.’
[아, 엄청 비쌌죠.]
암이라는게 위험 요인이 다 나와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생기게 하는 건 정말이지 어려운 일 아니겠는가.
게다가 딱 암만 걸리고 나머지는 멀쩡한 상태로 만드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연구 쪽으로는 거의 돈이 쏠리지 않는 국내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때문에 죄 해외에서 수입을 해 와야 하는데, 그러다 보니 값이 더더욱 뛸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쥐로 하면 조금 낫기는 했다.
쥐는 크기도 작고 워낙에 번식력이 좋아서 개체 수 자체가 달라서 그랬다.
하지만 돼지는……. 특히 암이나 기타 종양이 간에 있는 돼지는 귀하디귀했다.
‘그래도 덕분에 논문은 진짜 의미 있는 게 나왔지.’
[네, 아마 고주파열치료 시의 지침이 조금 구체화될 겁니다. 이게…… 그래, 란셋에 실리는군요.]
‘응. NEJM 정도는 아니어도 충분히 훌륭한 논문이지.’
[솔직히 반 이상 김진실 교수가 했는데, 너무 날로 먹는 느낌입니다.]
‘날로 먹을 때도 있어야지……. 그리고 김 교수님이 교신 저자잖아. 이거에 다른 거 하나만 있으면 바로 부교수 요건 된다고 했어.’
[뭐……. 일단 자십쇼. 지금 한다고 될 것도 아니고, 어차피 발표하려면 꽤 남았습니다.]
바루다는 달력을 눈앞에 띄워 주었다.
추계 학회는 대개 추석 즈음에 하는데, 올해는 추석 바로 다음 주에 있었다.
이 추계 학회를 기준으로 대부분의 과에서 치프들이 전문의 시험공부를 하기 위해 근무에서 빠지는데, 내과도 마찬가지였다.
4년제가 3년제가 되면서 과도 기간일 때는 그게 여의치가 않았었는데, 지금은 근무 공백을 펠로우가 채워 주면서 다시 가능케 되었다.
사실 내과 시험이라는 게 그리 만만한 게 아니기에 참 잘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오케이.’
수혁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기에 시험보다는 학회를 더욱 많이 떠올리며 잠에 들었다.
바루다가 수면에 도움이 되는 기억 또는 냄새 등을 출력해 주었기에 불면증은 거리가 멀게 된 지 오래였다.
거의 천연 수면제라고 해도 좋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다음, 버드 키라이 신드롬 환자는 복수가 완전히 제거된 채로 퇴원했다.
그 덕에 수혁은 김승욱 선생이 사 준 커피를 마시며 김진실 교수의 판독실에 찾아갈 수 있었다.
‘뭘 이런 걸 자꾸 사 주시나.’
[고마워서 그렇겠죠. 아니면 불편해서거나. 아무튼, 김진실 교수방입니다. 준비한 걸 보여 주시죠.]
‘그래.’
수혁은 일단 다 마신 커피잔부터 버렸다.
김진실 교수가 수혁을 이뻐하기는 하지만, 뭐가 되었건 무서운 사람 아닌가.
김판호(김진실 판독실 호랑이)라는 별명은 정말이지 아무한테나 붙이는 것이 아니었다.
대훈도 하윤도 심지어 펠로우들도 김진실 앞에 갈 때는 조금이나마 긴장을 했다.
“계십니까?”
“누구지?”
“저 이수혁입니다.”
“아, 이 선생. 그래, 안으로 와.”
해서 수혁도 긴장까지는 아니지만 조금은 조심하면서 안으로 향했다.
방 안엔 김진실만 있는 게 아니라 레지던트 둘 그리고 펠로우도 하나 있었다.
마침 티칭 중이었던 모양이었다.
다들 각자의 판독 컴퓨터 앞에 있는 게 아니라 김진실 교수 앞에 모여 있었다.
“이것만 끝내고 보자.”
“아, 네.”
“거기 앉아 있어.”
“네, 감사합니다.”
김 교수는 수혁에게 의자를 권한 후, 영상을 가리켰다.
수혁 또한 먼발치에서나마 그곳을 바라보았다.
췌장 쪽이었는데, 머리 쪽에 거대한 덩어리가 있었다.
[췌장암이군요. 나이가…… 38살 여자. 이런.]
‘너무 진행했는데, 저건…….’
누군가의 절망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것이 영상 속에 있었다.
저만한 췌장암이라니.
어떤 방법을 써도 살기는 어려울 터였다.
이럴 때 의료진이 할 수 있는 건, 삶의 마지막을 그나마 인간답게 보낼 수 있게 돕는 것뿐이었다.
“호스피스 병동으로 의뢰할 건데……. 마지막으로 외과 측에서 수술 가능 여부를 물어 왔어. 어떻게 답변 보낼래? 먼저 너부터.”
김진실 교수는 해당 영상을 띄워 놓고 레지던트 중 하나를 가리켰다.
아마도 아래 연차인 모양이었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는 게 없는 거 같은데요?]
‘응, 동의.’
눈동자가 무척 흔들리는가 싶더니만, 입을 열기는 열었다.
하여간 김진실 교수의 티칭 시간에는 뭐라도 털기는 해야 한다는 인계를 여러 선배들에게 들어서였다.
“그…… 췌장 머리 쪽에 암이…….”
“암이?”
“어……. 큽니다.”
“너 그게 의사가 할 말이냐? 길이로 말해.”
“어……. 네. 음. 5.2cm입니다.”
“그럼 그게 임상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지?”
“어…….”
“넌 패스.”
김진실 교수는 실망했다는 기색을 감추지 않은 채 다음으로 넘어갔다.
누가 저기 있나 했더니만 이혜영이었다.
벌써 말리그 중의 말리그라는 소문이 영상의학과 내에서도 파다하게 난 터라 여러 분과에서 버림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김진실 교수만큼은 젊은 교수의 열정으로 여전히 붙잡고 있었다.
“그…… 일단 로컬 T 스테이지가 3입니다.”
“왜?”
“4cm를 넘어갑니다.”
“임상적인 의미는?”
“크기보다는…… 다른 곳으로의 전이나 침윤이 중요합니다.”
“그래, 그럼 이 환자는 어떻지?”
“그…….”
어떻지.
이혜영은 아까 레지던트 1년 차보단 조금 나았지만, 역시나 흔들리는 눈동자로 영상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별로 의미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초점이 흐릿했다.
“아. 그…….”
“그 뭐.”
“간에 전이가…… 전이가 있습니다.”
“좋아. 좀 낫네. 그럼 임상적인 의미는?”
“수술이 어렵습니다.”
“정말? 이것만으로 수술이 불가하다고 단정 지을 수 있어? 환자 나이가 38살이야. 기저질환은 없어.”
교수가 내뱉는 ‘정말?’처럼 반갑지 않은 말도 있을까?
이게 틀렸다는 건지 아니면 맞는데 떠보는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어…….”
어버버 하고 있으려니 김진실 교수가 펠로우 쪽으로 고개를 털었다.
“예전보다는 나은데, 그래도 3년 차라고 하기엔 많이 부족한 거 알지? 너 이대로면 전문의 못 따. 따게 둘 수가 없어.”
“흡. 죄송합니다.”
언제 누가 들어도 섬뜩할 만한 말을 남겨 두면서였다.
물론 그렇게까지 심한 말은 또 아니었다.
현대 의학에 있어 영상의학과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면 그랬다.
점점 더 많은 임상과에서 진단에 있어 영상의학과에 대한 의존도가 올라가고 있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멍청한 영상의학과 전문의가 태화 이름을 달고 나가는 건 일종의 재앙이었다.
의국의 자존심 때문에, 또 수많은 환자들과 의사들을 위해서라도 그런 일은 막아야 했다.
“자, 펠로우 선생. 어떻지? 알려 주는 셈 치고 말해 봐.”
“음. 네.”
펠로우는 전문의였다.
어디서 수련을 받았건 간에 혹독한 과정을 겪었다는 얘기.
당연히 이 정도는 알아야 정상인데, 하필 방금 무서운 소리를 들어서 그런가 긴장이 좀 됐다.
“모르는 건 아닐 거 아냐. 왜 이렇게 뜸을 들여. 지난 6개월 넘게 우리 교실에서 더 배웠잖아.”
“아, 네 물론입니다. 일단…… 췌장 두부에 원발 병변으로 생각되는 종양이 5.2cm로 있으며 이는 십이지장 일부를 침윤한 상태입니다. 쓸개관이 나가는 입구도 막아서, 꼬리 부위를 보면 부종이 동반되어 있습니다.”
“좋아. 역시. 그리고 또?”
“그리고…… 아까 이혜영 선생이 말했던 것처럼 간에도 전이가 있는 게 한 군데가 아니라 두 군데입니다.”
“좋아. 또?”
“어…….”
나 이 정도면 충분히 잘하는 거 아닌가.
여기서 뭘 더 말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쯤 김진실 교수가 말했다.
“내가 분명히 그랬지? 호스피스 병동으로 전원 예정이라고. 지금 너희가 말한 소견은 근치적 수술이 안 될 이유는 될지 몰라도, 아예 수술을 못 할 정도는 아냐. 그리고 췌장암에 있어 종양 매스를 줄이는 게 생존율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는 여러 논문에서 증명된 바 있어. 그런데도…… 이하언 교수님이 수술 불가 판정을 줬잖아? 알지? 이하언 교수님, 환자 젊으면 좀 더 관대하게 의견 제시하는 거. 그런데도 안 했어. 왜 그런 거 같아?”
“어…….”
확실히 이하언이 뻘짓 했을 리는 없었다.
그 양반은 복부 영상의 전설이니까.
게다가 김진실 교수도 확인한 모양이었다.
교수급의 더블 체크는 그냥 진리 그 자체라고 보면 되었다.
실수란 있을 수가 없었다.
해서 눈에 불을 켜고 살폈지만 보이지 않았다.
“스크롤도 좀 하고 하면서 봐 봐. 한 장면만 보면 보이니?”
“아, 네.”
김진실은 그게 안타까운지 닦달을 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어렵긴 하지……. 음. 응?’
해서 알려 줄까 하고 있으려니, 수혁이 보였다.
그냥 먼발치에서 보고 있는데 어쩐지 느낌이 왔다.
저 녀석은 알고 있을 거라는 느낌이.
‘에이……. 설마……. 아닌가? 쟤는 다르긴 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