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7화 추계 학회 그리고 (2)
“음……. 이수혁 선생?”
해서 수혁을 불렀다.
애초에 멍하니 앉아 있던 게 아니었던지라 즉시 답할 수 있었다.
“네, 교수님.”
“이수혁 선생 지금 어디 돌고 있지?”
“저…… 소화기내과입니다.”
“그럼 그 김에 이 환자 한번 어떤지 봐 볼래?”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참 옹색한 이유였다.
세상에 레지던트인 거 뻔히 알면서 소화기내과 운운하다니.
그나마 내과가 4년제였을 때면 또 몰라도 지금은 3년제 아니던가.
그저 전반적인 내과학에 대해서만이라도 다 배우게 된다면, 그게 다행일 지경이었다.
‘그래도 얘는 다를걸.’
물론 수혁은 아예 다를 터였다.
이놈은 괴물이니까.
내과뿐 아니라 영상의학과 쪽으로도 특출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 네. 음.”
수혁은 김진실 교수의 말에 사양 않고 나섰다.
[어필할 수 있을 때 무조건 어필하시죠.]
‘오케이. 그래야지.’
예전 같았으면 이미지 관리니 뭐니 한답시고 좀 빼기도 했을 터였다.
하지만 이미 부센터장이 내정되지 않았는가.
그것도 독자적으로 자생할 수 있는 센터가 아니라 다른 과에서 환자를 보내 줘야 존재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센터였다.
이걸 잘 이끌어 나가려면 수혁이 진짜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게끔 만들어 줄 필요가 있었다.
“일단…… 펠로우 선생님이 말하신 것처럼, 췌장 두부에 5.2cm가량의 원발 종양이 있습니다. 주변으로 부종이 좀 있는데 아마도 입구가 막혀서 그런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꼬리 쪽까지 해당 현상이 관찰되고……. 십이지장 쪽으로는 직접 침윤 그리고 간으로는 원격 전이가 두 군데 있습니다.”
“그래. 그건 아까 말한 거지.”
그저 다시 한번 반복한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김진실 교수는 수혁의 눈동자가 정확히 자신이 말하고 있는 병변을 따라 돌아다니고 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다른 과 레지던트들은 태반이 판독문만 보고 아, 그렇구나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것만으로도 퍽 대단한 일이었다.
“거기에 더해 이쪽…… 임파선 전이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융합이 돼서 위 동맥을 침윤한 것으로 보입니다.”
“음. 그리고?”
“이렇게 되면 위로의 전이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습니다. 영상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내시경으로 보면 또 다를 수 있습니다. 아마 이미 시행했을 거 같은데, 맞나요?”
수혁의 말에 김진실 교수는 차마 바로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설마하니 영상을 보고 여기까지 바로 추론해 올지는 몰라서였다.
그간, 같이 논문 작업하면서 참 똑똑한 놈이란 것 정도는 뼈저리게 알고 있었지만.
또 이 정도로 발전했을 줄은 몰랐더랬다.
‘괄목상대라더니……. 얘는 진짜 사흘만 안 보면 실력이 느네. 대체 공부를 얼마나 하는 거야?’
공부만 한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의대 졸업하면서 벌써 현장에 있는 의사들 뺨 후려칠 만큼 진료를 잘하는 이들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각 과의 특성에 맞는 수련 과정을 거쳐야만 진짜 그 과의 의사가 될 수 있는 법이었다.
예외는 없을 거라 여겼는데, 여기 예외가 있었다.
이수혁만큼은 내과 수련을 받고 있지만, 독학으로 영상의학과 의사로서의 소양도 갖추고 있었다.
그것도 어지간한 수준이 아니라, 교수급이었다.
“응, 있어.”
“거기서 혹시 점막 병변은 없었나요?”
“있었어.”
“그렇다면 그것만으로도 사실…… 수술은 좀 어렵겠네요. 물론 휘플(Whipple operation)을 하면서 간 부분 절제술을 더하고 하는 방식으로 갈 수도 있겠지만……. 난도가 너무 올라갑니다. 수술 이후 환자가 얼마나 회복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요.”
“그렇지. 하지만 여전히 근치적 수술에 목적을 두지 않고, 암 부하를 줄이는 목적이라면 가능할 거도 같은데?”
“네. 아주 적극적인 치료를 계획한다면 그건 그렇습니다.”
사실 이미 김진실 교수의 말은 억지에 가까웠다.
췌장암이 괜히 췌장암이겠는가.
10년 얘기긴 하지만, 교수들 사이에서는 췌장암이 진단됐는데 3년 후에도 살아 있다면 애초에 진단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을 가장 먼저 의심해 봐야 한다는 얘기가 돌 지경이었다.
지금이야 그나마 이런저런 시도들이 더해져서 그때보다는 상황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췌장암은 의사에게나 환자에게나 절망의 또 다른 이름으로서 다가오기 마련이었다.
[이것까지 말해 줘야겠군요.]
‘이러면 좀 의심받을 수도 있을 거 같아서 넘어가려고 했는데.’
[누가 뭘 의심합니까? 저와 수혁의 연결 고리를 생각할 수 있다면 아마 사람이 아닐 겁니다. 그렇게까지 창의적인 사람은 있을 수가 없어요. 특히 병원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건 그래. 동의.’
의사들이 너무 창의적이면 어떻게 될까?
만약 누군가 제자에게 너 진짜 창의적이다, 이런 말을 한다면 적어도 병원에서는 쌍욕이나 다를 바 없을 터였다.
사람 몸을 다루는 학문이니만큼 의사들은 지극히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거 이렇게 하면 어떨까? 저렇게 하면 어떨까? 하다가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원래도 시키는 거 잘하는 사람들이 주로 의대에 입학하기도 했거니와, 졸업하고 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밟고 나면 더더욱 있던 창의성마저 말살되곤 했다.
“그리고…….”
해서 수혁은 다소 안심한 채 스크롤을 굴렸다.
췌장과 조금 떨어진 곳이 나왔다.
위치로 따지자면 거의 배꼽 근처라고 해야 할까?
수혁은 거기서 딱 멈춘 후, 복강 근처에 마우스를 가져갔다.
그리곤 마치 영상의학과 의사라도 된 듯 해당 부위를 확대했다.
그러자 긴가민가했던 병변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 복막 전이가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암에서…… 이게 있으면 수술이 불가하죠.”
난소암 정도를 제외하면 그랬다.
복막 전이는 말기암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보면 되었다.
“그래. 음. 맞아. 정확해.”
김진실 교수는 도장 깨기를 당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괜히 수혁을 불러다가 시켰다 싶다고 해야 할까?
이혜영이나 1년 차는 뭐 아무리 까여도 상관이 없기는 했다.
1년 차는 원래 그러면서 크는 것이고, 또 1년 차 때는 몰라도 된다는 특권이 있었으니까.
물론 지금은 겨울이 다가오고 있으니 너무 무식하면 좀 그렇긴 하겠지만, 복부는 전체 영상에서 가장 어려운 난이도를 자랑하고 있으니 이해할 구석이 있었다.
이혜영이야 멍청하기로 소문났으니 그럴 수 있었고.
‘어떡하니…….’
하지만 펠로우는 어쩐단 말인가.
전문의인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세부 분과까지 복부로 정해서 죽어라고 공부하고 있는데 여기서 내과 레지던트한테 털리다니.
“음…….”
아니나 다를까 신음을 흘리는 표정에서 많은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1년 동안 공부했던 것은 다 뭘까 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임상적으로 수술을 못 한다고 하셔서, 아마 복막 전이가 있겠구나 싶어서 찾아봤더니 보였을 따름입니다.”
다행히 수혁이 위로랍시고 말을 더하긴 했다.
그래 봐야 별 위로가 되지는 않을 터였다.
그저 수혁이 머리도 좋고 똑똑하구나 싶을 뿐이었다.
하여간 김진실 교수는 그 말을 받아다 이어 나갔다.
“아, 역시 그렇구나? 하긴 이게 좀 어렵긴 해. 하하. 아무튼, 나는 이수혁 선생하고 논문 때문에 할 얘기가 있으니까……. 일단 해산. 이 환자는 내가 코멘트 남겨 둘 테니까, 그냥 두고. 나머지는…… 아까 내가 말한 거 기억하지. 참고해서 의견 남겨 둬.”
“네.”
모여들었던 인원이 우르르 각자 컴퓨터 앞으로 해산했다.
그래 봐야 한 판독실 안이긴 했지만.
영상의학과 판독실은 그 특성상 좀 어두웠기 때문에 조금만 떨어져도 잘 보이지 않았다.
해서 수혁은 마치 김진실 교수와 단둘이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김진실 교수 또한 그랬다.
“어, 수혁아. 너 그거 내과 학회 발표 때문에 그러는 거지?”
“네. 일단 이렇게 짜 봤는데…… 어떨까요?”
“음. 한번 보자. 파일 보내 봐. 내 걸로 보게.”
“네.”
김진실 교수의 또 다른 별명이 있다면 얼리어답터였다.
딱히 전자 기기를 잘 아는 건 아닌데 그렇게 사 모았다.
지금도 그랬는데, 이건 심지어 칠성 전자 물건이었다.
[배신자…….]
‘아니, 저거 쓴다고 배신자는 아니지. 탭은 태화보다 칠성이 훨씬 나을걸.’
[그런 말을 하다니……. 제 창조주께서 웁니다.]
‘창조주라니……. 그냥 사람이야.’
[저한테는 아니거든요?]
중얼거리고 있는 동안 김진실 교수 또한 수혁이 보낸 파일을 슥 확인했다.
“음. 좋은데? 스토리텔링이 딱 논문 같아. 일단 왜 이걸 했는지가 확 설득력이 있네. 근데 이 자료는 우리 논문에 있던 거랑 조금 다른데?”
“아, 네. 추가했습니다. 병원 통계가 업데이트돼서요.”
“오……. 그렇구나. 확실히 더 좋네. 그래, 이거 그냥 무턱대고 하는 게 그렇게 안전하진 않을 거야.”
“네. 아무래도…… 그래도 술기 수정만 하면 극복 가능한 문제라 다행입니다.”
“그래서 좋은 논문에 실린 거지. 뭐 이수혁 선생이야 늘 NEJM에 내니까 감회가 없을 수도 있는데. 란셋도 좋은 곳인 건 알고 있지?”
“네? 아유, 당연하죠. 란셋……. 영광이죠.”
“그래, 그럼 원장님 만나면 그렇게 좀 말해 줘. 볼 때마다 나 때문에 NEJM 못 넣고 란셋 넣었다고 하시는데……. 아니, 그럴 거면 돈을 더 주시든가. 돼지 한 마리에 얼만 줄 아신다니?”
“그……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더니.
내과에서만 주접떨면 참 좋을 텐데 왜 다른 과에서도 이렇게 난리를 치실까.
하여간 이현종은 기인이었다.
“아무튼, 좋은데? 이 밑에 있는 게 대본이지? 네가 설마 대본 써 놓고 절진 않을 거고…….”
“아, 네. 다 외웠습니다.”
“그래. 아마 이거 꽤 인상적인 발표가 될 거야. 특히 소화기……. 간 파트에서는 사실 우리 고주파 시술을 무슨 요술 방망이처럼 생각하잖아. 보다 신중하게 접근하게 되겠지.”
“네. 임상적으로 의의가 있죠.”
그렇지 않으면 란셋에서 표지에 실어 줄 리가 없지 않겠는가.
이현종의 말도 아주 일리가 없는 건 아닌 게, 란셋 표지에 실릴 정도면 케이스 좀만 더 추가해서 NEJM에 넣어도 충분하긴 했을 터였다.
그 케이스 추가에 막대한 돈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무시하면 그랬다.
“그래, 이렇게 해. 언제 가니?”
“아……. 다음 주입니다.”
“벌써 그렇게 됐나? 다음 주? 그럼 그때 내과 없겠네?”
“네. 당직만 남기고 갑니다.”
“그때는 아프면 안 되겠다, 야.”
“그렇죠. 하하.”
춘계와 추계 학회는 내과 의사들에게 있어 일종의 축제 같은 것이었다.
학기 동안 얼마나 많은 성과를 냈는지 또는 어떤 잘못을 했는지 서로 자랑하거나 반성하면서 배울 수 있는 자리이지 않은가.
그 며칠간 배울 수 있는 양이 일상의 수십 배는 될 터였다.
해서 모든 병원은 필수 인력만 제외하고는 모조리 학회로 보냈는데, 태화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수혁은 발표가 있으니 당직이 없죠?]
‘없지. 지상이가 내내 놀더니 발표 없어서 당직이야.’
[약국장이랍시고 도시락만 까 먹더니…….]
‘그렇게 말하진 말고. 그래도 나 대신해서 애들 많이 혼내고 그랬어.’
[잘하겠지, 설마.]
‘걔도 3년 차인데 당연히 잘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