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388화 (388/1,303)

388화 추계 학회 그리고 (3)

보통 춘계 학회는 장소를 정해서 매년 같은 곳에서 이루어지지만, 추계는 지방을 돌면서 열렸다.

나름 학회에서 지방 병원들을 배려하는 것인데, 이번엔 인천이었다.

병원에서 아주 가깝다고는 할 수 없어도 그리 먼 거리는 아니라 다들 다행이라 여기고 있었다.

“어, 수혁아. 자리 잡아 놨어.”

태화 의료원은 기업 병원이니만큼 판공비로 나오는 돈이 과마다 꽤 있어서 의국비로 버스를 대절할 수 있었다.

그냥 관광버스도 아니고 리무진이었다.

환자 회진 돌고 당직에게 인계하고 오느라 조금 늦은 수혁이었는데, 안에 있던 조태진이 의자 하나를 점유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뭔가 거꾸로 된 기분이군요?]

‘그러니까…… 우리 형 왜 저러시냐.’

아닌 게 아니라, 버스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다 보고 있었다.

레지던트들이야 이미 수혁을 경쟁 상대로 여기지도 않고 있었기에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어차피 남자들은 죄 3년 넘게 군의관을 다녀와야 하지 않던가.

위로 3년 선배까지는 죄 수혁에게 제껴질 거란 얘긴데 동기는 오죽할까.

여자들은 내년 당장 전문의로 경쟁해야 하기는 했으나, 부센터장을 보고 라이벌 의식을 불태울 만큼 정신없는 사람은 없었다.

“조태진 교수님……. 혈종 펠로우 1년 차들은 딴 버스 탔는데…….”

“진짜야? 아, 이번에 버스 모자라서 관광버스도 왔다고 했지?”

“응. 옛날 같았으면 레지던트들 무조건 밀었을 텐데……. 요새 그런 게 어딨냐. 선착순이지. 이수혁도 자리 안 잡아 놨으면…….”

“야, 그런 소리 말아. 부센터장인데……. 당장 내년만 돼도 우리 굽신거려야 된다.”

“아……. 백 없는 놈은 서러워서 살겠냐?”

“백만으로 됐다고 하기는 좀…….”

펠로우들은 얘기가 좀 달랐다.

군의관 3년까지 하면 적어도 수혁보다 4, 5년은 더 위라는 얘기 아니던가.

근데 이렇게까지 차별 대우를 받고 있으니, 마음이 좋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긴 했다.

“아, 네. 교수님.”

“그래, 여기 사석 아니니까. 하하.”

물론 수혁은 그런 반응을 신경 쓰진 않았다.

말마따나 어차피 아랫사람들이지 않은가.

더군다나 이번 학회를 마지막으로 전문의 시험 보러 뒷방에 틀어박힐 몸이었다.

지금 떠드는 이들 중 절반가량은 아마 내년엔 없을 터였다.

대학 병원 펠로우만큼 고용 안정성이 떨어지는 직업도 드물었다.

“이번에 간암이지? 발표?”

“아, 네. 간암이요.”

“나랑 크게 관계있는 건 아니긴 한데……. 그래도 흥미로울 거 같더라. 논문 게재 허가 떨어진 거지?”

“아, 네. 다음 달에 이펍으로 란셋에 실려요. 종이로 발행되는 건 내년이래요. 일이 되게 느리네요.”

“어……. 란셋. 맞아. 넌 참 대단하다.”

조태진은 얼마 전에 캔서지에 논문 냈다가 수정 권고도 아니고 반려받았던 일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동생은 이렇게 잘나가는데 난 뭐 하는 걸까.

창밖 풍경이 갑자기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란셋이 뭐가 대단해. NEJM을 내야지.”

그 순간 앞에 있던 이현종이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도 그게 불만인 모양이었다.

“돼지 두 마리만 더 잡았으면……. 어? 그거 됐을걸?”

“그…….”

수혁은 암 걸린 돼지 두 마리가 대체 얼만 줄 아시냐고 하려다 말았다.

어차피 무슨 말을 해 봐야 통하진 않을 게 뻔했다.

이 양반은 하여간 본인 편한 대로만 생각하는 단점이 있었다.

“형……. 란셋도 대단한 거야.”

그 말에 신현태가 나섰다.

이현종을 말리는 포지션이니만큼 어깨를 두드리면서였다.

“대단은 개뿔이. 너한테나 그렇지. 아, 맞네. 너 란셋도…….”

“아니거든요? 이제 NEJM 냈거든요?”

“그거 인마 수혁이가 낸 거지. 너는 꼽사리잖아.”

“와……. 내가 교신 저자거든?”

“수혁이가 착해서 그렇지. 너 인마 이거 언론에 제보하면 난리 나. 교수가 제자들 착취한다고.”

“무슨 그런…….”

역시나 별 소용은 없었다.

그저 버스가 좀 더 시끄러워졌을 뿐이었다.

한 가지 장점이 있었다면, 원장과 과장이 떠들어 대는 통에 나머지 펠로우들이 입을 다물게 되었다는 것 정도였다.

아무리 간 큰 인간이라 해도 병원에서 제일 높은 인간 둘이 떠드는 와중에 끼어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우, 흔들린다.”

“제대로 앉아요. 나이도 많은 양반이 그러다 죽어.”

“죽기는…….”

“죽지는 않아도 이석증 생긴다고. 몰라요? 저번 주에 그…… 어? 소아과 이기자 교수님 빙빙 돈다고 응급실 갔잖아.”

“응? 기자? 아니, 이 교수님이?”

이기자라는 말에 눈빛이 지나치게 흔들리는 이현종을 확인한 신현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역시……. 이 형도 순애보네.’

아니, 어떻게 사람이 수십 년 동안 한 사람만 짝사랑할 수 있을까?

신현태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응. 입원도 했었는데. 이비인후과에.”

“그래? 병문안…… 병문안은…….”

“아니, 무슨 큰 병이라고 병문안까지 해. 이석증인데. 몇 바퀴 돌리고 좋아지긴 했대. 근데 이제 앞으로가 좀 문제지. 한번 생기면 재발률이 높잖아.”

“그, 그렇지. 음…….”

하여간에 이 얘기가 효험은 있었다.

이기자라는 이름을 꺼내자마자 이현종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조용해지더니 지금은 아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창밖으로 먼눈을 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확실히 우울해 보였다.

‘조금 미안하기는 한데…….’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과장으로서 모든 의국원이 학회장까지 편하게 갈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원장 하나가 조금 침울해지는 것 정도는 어쩔 수 없었다.

“자, 이제 도착합니다.”

학회가 열리는 곳은 영종도 근처 호텔이었다.

최근에 지어진 호텔이라 시설은 좋은데 서울의 호텔들처럼 가격이 미친 듯이 비싸진 않았다.

가성비가 좋다, 이 말이었다.

“다른 과는 코엑스에서 하던데 우리는 왜 맨날 추계마다 지방으로 돌아, 이거.”

이현종은 이유를 다 알면서 괜히 투덜거렸다.

신현태도 괜한 투정이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대꾸는 해 줘야 할 거 같아서 입을 열었다.

“정 그러면 우리도 학회 참가비 20만 원씩 받으면 되지.”

“야, 누가 내과 학회에 20만 원을 주고 오냐.”

“그러니까…….”

“피부과나 성형 쪽은 참 좋겄어……. 돈을 50만 원을 불러도 막 내잖아.”

“그거 내는 사람들 태반이 내과 의사인 건 알지? 개원하면 어렵대…….”

“거 뭐……. 사업인데. 되고 안 되고는 개인 역량 아냐?”

“원장이라는 사람이 말을 그렇게 하면 되나. 우리 제자고 동료들인데. 사람이 어떻게 이러지.”

“뭐 인마.”

둘은 그 후로도 계속 투닥거리면서 학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저 둘이 거의 국내 내과 학회를 이끌어 가고 있는 기둥들이라는 걸 떠올려 보면 가슴이 먹먹해지는 장면이었다.

아마 이 장면만 본 사람이라면 내과의 미래는 없구나 하고 단정 지을 수도 있었다.

반면 수혁은 조금 바빴다.

“어, 이수혁 선생. 앞에 차 탔구나.”

조금 늦는 바람에 교수임에도 불구하고 관광버스 타고 온 장강명이 달려왔다.

소화기내과다 보니 수혁 발표에 나름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검진센터고 할로우 장기, 즉 속이 빈 소화기관을 보는 사람이라 간과 딱 같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소화기에서 간을 빼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너무도 관대한 음주 문화와 B형 간염 때문에 여전히 간암은 대한민국 사망률 상위를 지키고 있었다.

“아, 네.”

“오늘 발표지?”

“네. 12시 발표입니다. 그랜드 컨벤션에서요.”

“일찍 도착하긴 했는데……. 그래도 발표 자료 점검하고 하려면 바쁘겠다. 자, 이리로 와. 나는 여기 다른 일로 한번 와 봤는데……. 안에가 좀 복잡해.”

“오. 네 감사합니다.”

“그래, 그래.”

또 장강명으로서는 수혁에게 잘해 줄 수밖에 없었다.

젊은 나이에 센터장이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조직 사회 내에서 눈치가 비상하다는 얘기 아니던가.

‘김다현이 백이야. 김다현……. 지금 평판 좋지…….’

태화 바이오 사장이 수혁의 백이란 것쯤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김다현이 수혁을 통해 그리고 있는 그림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는 것은 아직 널리 퍼지지 못한 얘기였는데, 그걸 장강명은 알고 있었다.

검진센터장이라는 자리만 해도 원내에서 열 손가락 안에 너끈히 드는 자리긴 하지만.

원래 한번 권력의 맛을 보고 나면 더 높은 곳을 바라게 되기 마련이었다.

안타깝게도 장강명에게는 이현종이나 신현태 등과 같은 학술적인 성취는 없었기에 이런 식으로라도 잘 해야 가능성이 있었다.

“음. 여기야. 이게 애매하게 반층 개념이 있더라고?”

“아……. 그렇네요. 여기에 자료 넣는 곳을 만들어 놨네.”

“그래. 그…… 여기 우리 이수혁 선생님 자리 좀 주세요. 레지던트라고 막 홀대하지 말고. 자리 좀 줘요. 빨리빨리.”

해서 장강명은 학회 관계자들에게 강짜를 부리면서까지 수혁에게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덕분에 수혁은 편하게 자료 점검을 하고, 학회 설비로도 발표 자료가 잘 돌아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레지던트들이 교수들 및 펠로우, 임상 강사에게 찐바 되어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것에 비하면 특혜 중의 특혜였다.

“자자, 그럼 그랜드볼룸으로 가자. 내가 우리 펠로우 선생한테 부탁해서 자리 맡아 놓으라고 했거든? 거기 가서 앉으면 돼.”

“아, 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같은 배 탄 사람들끼리, 하하. 우리 다 같은 라인이잖아.”

“아…….”

라인이라.

그랬나?

의문에 찬 수혁의 얼굴을 본 장강명이 껄껄 웃었다.

“원래 같은 때 센터장, 부센터장 하면 운명 공동체야. 조만간에 전문의 국시 보기 전에……. 한번 술자리 만들 건데 그때 부센터장 자격으로 오라고.”

“아, 네네.”

듣고 보니 또 그럴싸하기는 했다.

돌이켜 보면 원장 날아갈 때, 그때 한 가닥 했던 사람들 모두가 물갈이되지 않았던가.

병원이라는 곳이 밖에서 보면 조그만 곳이고 안에서 복닥대는 것이 우스워 보일지 몰라도, 안에서는 나름대로 치열한 암투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다음은…… 태화 의료원의 내과 레지던트 3년 차 이수혁 선생의 간의 악성 신생물에 대한 고주파 열 치료 시행 시 의사의 부주의로 인해 발생 가능한 국소 전이에 대한 고찰에 관한 발표가 있겠습니다. 참고로 해당 발표의 토대가 되는 논문이 란셋에 게재될 예정이오니 조금 더 집중해 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레지던트 3년 차가 란셋이라.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이미 큰 병원에서는 수혁이 유명인사가 된 지 오래고, 스카우트 제의까지 나도는 마당이었지만 작은 병원 또는 지방에 있는 병원에서는 그렇지가 않아서였다.

게다가 그런 병원일수록 란셋과 같은 대형 학술지에 논문을 낼 일이 드물었기에 더더욱 소란이 있었다.

“뭐야?”

“뭔데?”

“당연히 교수가 써 줬지. 모르냐? 큰 병원은 다 그래.”

“아, 하긴. 좋겠네.”

대부분 질시 어린 말들이었다.

그 와중에 수혁의 핸드폰이 울렸는데, 지상이었다.

수혁은 발표 때문에 폰을 두고 나간 상황이라, 그것을 본 것은 장강명이었다.

‘미쳤나, 논문도 못 쓰는 놈이. 발표 앞둔 동기한테 전화를 왜 해?’

유지상이 당직이라는 것도 모르고, 생각보다는 실력이 부족하다는 것도 모르는 장강명은 매몰차게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리곤 수혁의 발표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딱히 정치적인 계산이 없어도, 수혁의 발표는 늘 그랬듯이 들을 만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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