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0화 추계 학회 그리고 (5)
수혁은 잠시 절망에 찬 이들을 내려다보다가, 흠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원래도 주목시키는 것에 재능이 있을뿐더러 바루다가 도움을 주기도 했기에 효과는 상당했다.
“음.”
“으음.”
다들 웅성거림을 멈추고 수혁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도 바로 입을 열지는 않았다.
때론 조금 기다리는 것이 오히려 더 다른 이들이 이목을 끌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배운 바 있었다.
“이 실험을 통해 고주파 열 치료 시 의도치 않은 전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본 연구진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과연 이 전이 가능성을 낮출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오.”
수혁이 희망을 제시한 다음에야 비로소 모여든 이들의 얼굴이 조금이나마 밝아졌다.
여기서 그런 방법은 알고 보니 없더라라는 결론이 튀어나올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의사들은 언제나 그러했듯 답을 찾아내지 않겠는가.
방금은 좀 갑작스러운 얘기라 당황했을 뿐이었다.
“우선 프로토콜별로 재발률이 달랐다는 것에 주목했습니다. 확실히 태화 측 데이터는 0.8% 정도로 낮은 것에 반해 음. 이름은 밝히지 않겠습니다만, 하여간 다른 센터에서는 10%까지 달하는 곳이 있었습니다. 이 둘을 비교해 보니 고주파 열 치료의 마무리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태화는 지지면서 빠져나왔고, 해당 센터는 지지고 나서 그냥 빠져나왔습니다. 얼핏 보면 아주 간단한 것 같지만, 이것이 어마어마한 차이를 빚었습니다.”
지지면서 나온다는 말은 곧 혹 바늘에 암세포가 있었다고 해도 나오면서 타 죽을 거란 얘기였다.
물론 그렇게 하면 간의 괜찮은 부위에도 손상이 갈 수는 있었다.
하지만 간은 우리 장기 중 가장 회복을 잘하는 장기였다.
그 정도의 손상은 말 그대로 간에 기별도 가지 않을 터였다.
“즉 경로에 있을 수 있는 재발을 막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아까 방사선 동위 원소의 움직임을 보면 경로 외로도 튀어 나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검증이 필요했습니다.”
어느새 학회장 내에 들어와 있던 이들은 전부 수혁에게 빠져들었다.
원래도 수혁의 실력을 알고 또 인정하고 있던 이들뿐만이 아니라, 아예 이수혁이라는 사람 자체를 몰랐던 이들도 그랬다.
“다르긴 다르네…….”
“뭐가.”
“서울 큰 병원은 다른가 봐.”
“아냐……. 다 저럴 수가 있냐? 우리 학교 1등도 지금 칠성 내과 있는데, 그 새끼는 나랑 비슷하던데? 그냥 저…… 쟤가 특이한 거야.”
“그런가? 그렇겠지? 나 약간 자괴감이 들어 가지고.”
“나도 들긴 해. 뭐 했냐, 우리는. 3년 동안.”
특히 같은 연차들은 아주 깊은 감명을 받았더랬다.
너무 어마어마한 발표 아니던가.
란셋에 실렸다더니 정말 그럴 만한 발표였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심지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외과 간이식 팀에 의뢰해 실험에 쓰인 돼지를 모두 부검했습니다. 그리고 방사선 동위 원소가 검출된 부위를 모두 병리과에 의뢰해 조직 검사를 해 보았습니다. 이게 그 결과입니다.”
2만 명에 달하는 환자 영상을 리뷰 한 것만으로도 일생일대의 논문이 되었을 텐데.
돼지 간을 이용해 실험을 하는 것도 모자라 부검까지 한 마당이었다.
딴지 걸 생각 따위는 간 곳 없었고, 그저 미쳤다 이 생각만 들었다.
“그랬더니, 이쪽으로 튄 조직은 모두 사멸해 있었습니다. 즉 고주파 열 치료 시 경로 외에 튄 조직들이 재발을 일으킬 확률은 극히 드물다는 얘기입니다.”
병리과 슬라이드 보고를 보니 과연 그랬다.
이미 타 죽은 놈이 거기로 우연히 튀었을 뿐, 임상적인 의미는 없다는 얘기였다.
이보다 더 다행인 일도 없을 거 같았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비록 폐암이 맹추격해 오고 있고, 때에 따라서는 역전도 하는 마당이긴 하지만 여전히 간암은 적어도 이곳 대한민국에서는 아주 중대한 질환이었다.
그 질환을 치료하는 데 있어 에러 사항이 발견된다는 것은 결국, 의사들의 시련을 의미했다.
“비록 실험에 쓰인 돼지가 2마리뿐이라 정확한 통계를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본 연구에 따르면 통계에 잡히지 않는 수준입니다. 그 말은 곧 태화 의료원 데이터에서 확인되었던 0.8% 정도로 전체 재발률을 모든 센터에서 맞추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뜻이 됩니다. 해서 본 연구진은 앞으로 고주파 열 치료를 시행할 시, 바늘을 뺄 때 무조건 열을 주입하면서 시행할 것을 제안합니다. 감사합니다.”
수혁은 안도의 한숨을 배경음 삼아 발표를 끝냈다.
머리를 숙이고 나서도 잠시 한숨 소리만 들려왔다.
탁.
하지만 수혁이 지팡이를 짚고 걸음을 옮기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레지던트치고 발표를 잘해서가 아니었다.
이건 여느 교수가 했더라도 박수를 받을 만한 발표였다.
심지어 좌장까지 일어나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럴 만했다.
이 발표의 토대가 된 논문은 곧 간암의 의료 지침을 바꾸게 되지 않겠는가.
아주 역사적인 현장을 직관한 셈이란 얘기였다.
영광으로 여겨도 좋았다.
“이야……. 역시 이수혁 선생. 명강연이었어. 원래 이 시간 되면…… 밥 같이 먹으려고 이리저리 다들 튀는데 거의 뭐 정신 나간 놈들 말고는 다 자리에 붙어 있잖아.”
돌아오자 장강명이 껄껄 웃으며 수혁을 반겨 주었다.
어떻게 봐도 연기는 아닌 듯했다.
진심으로 감명을 받은 상황이었다.
“아닙니다. 덕분에 발표 잘할 수 있었습니다.”
“말도 이쁘게 잘하네.”
장강명은 여전히 미소를 띤 채로 말을 이었다.
“그럼 점심은 어떻게 할 거야? 여기서 도시락? 아니면…….”
보통 레지던트들을 아니, 교수들이라 해도 학회에 왔으면 점심은 학회에서 나눠 주는 도시락을 먹는 게 보통이었다.
일단 이미 낸 학회비에 포함이 되어 있을뿐더러 맛도 썩 괜찮았기에 그랬다.
뭐가 되었건 간에 호텔에서 준비해 주는 도시락이지 않은가.
여느 호텔 음식처럼 가격을 생각하지 않고 먹으면 좋았다.
“아……. 저는 아버지랑 먹기로 되어 있어서요.”
하지만 수혁은 예외였다.
팔불출 이현종 때문이었다.
그는 여기 오면서 벌써 레스토랑부터 알아본 참이었다.
무슨 학회 내 주요 인사들, 그러니까 학회장이나 이사진들이랑 먹으려는 목적도 아니었다.
그저 아들내미 맛난 거 먹게 해 주는 거, 그게 이현종의 지상 과제였다.
“그렇구만. 역시. 뭐……. 그래. 어디서 보기로 했어?”
“음. 식당으로 바로 오라셨습니다. 여기 15층인가? 거기에 있다고 했어요.”
“아……. 그렇구나. 하하. 바다 보이고 좋겠네.”
장강명은 따라갈까 말까를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가 봐야 좋은 소리 못 듣겠지?’
신현태나 조태진은 다행히 이제 장강명을 동지로 인정해 주고 있지만.
이현종은 아니었다.
‘그 인간은…….’
뭐라고 해야 할까?
이수혁과 자신과의 관계에 방해가 되면 다 적이었다.
신현태랑 조태진이 용케 그 레이더망을 벗어난 것일 뿐, 나머지는 다 그렇다고 보면 되었다.
“그래, 잘 다녀와.”
“네.”
해서 수혁은 장강명과 헤어진 채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식당 앞에 도달할 때까지도 핸드폰을 보진 않았다.
‘다시 한번 출력해 봐.’
[꼭 그러셔야겠어요?]
‘어.’
[에휴, 알겠습니다.]
바루다를 시켜 아까 박수받던 장면을 돌아보느라 그랬다.
돌이켜 보는 것만으로 무언가 벅차오르는 느낌이 있었다.
이런 걸 보면 왜 사람들이 유명해지고 싶어 하고 사랑받고 싶어 하는지 알겠단 생각마저 들었다.
아마 그 어떤 약도 이만큼의 엔도르핀을 주기는 어려울 터였다.
우웅.
그렇게 몇 번이나 반복하다 보니 전화가 왔다.
시간도 그렇고 당연히 이현종이겠거니 하고 봤더니 유지상이었다.
이것만 해도 예상을 빗나갔는데, 심지어 부재중 통화가 열 개도 넘었다.
‘얘……. 이번에 초록 까먹었다는 핑계로 안 냈지?’
[네, 오늘 병동 당직입니다.]
‘음……. 급한가 본데?’
[빨리 받아 보시죠. 3년 차라고 해 봐야 레지던트입니다. 뭔 짓을 했을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오케이.’
조금 너무한 말이 아닌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그냥 쌩 신환을 보는 게 레지던트가 어설프게 건드린 환자 보는 것보다 나을 때도 많았다.
괜히 이상하게 약 쓰고 해서 증상 가리거나 새로운 증상을 만드는 때도 있어서였다.
“어, 지상아. 웬일?”
“어어어어어어어.”
전화를 받자마자 유지상이 거의 울 듯한 소리를 냈다.
이 소리에 의미가 있나 싶을 지경이었다.
아니, 유지상도 아닌 듯했다.
“바, 받았습니다! 받았어요!”
역시 유지상이 아니라 1년 차나 2년 차인 듯했다.
목소리는 알 수 없었다.
수혁은 안대훈, 우하윤 정도만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바루다도 굳이 레지던트에 데이터를 할애하는 건 낭비라고 여겼기에 오리무중이었다.
“어어어어! 야, 수혁아! 어! 야!”
“왜, 무슨 일인데?”
“그, 우리 병동 환자 중에……. 그. 그.”
“그 뭐. 차분히 얘기해 봐.”
“차, 차분할 때가 아냐! 어어 에피! 에피! 환자 넘어간다! 어!”
“음.”
보아하니, 처치실인 듯했다.
환자는 아마도 심장이 멎었거나 멎어 가고 있겠지.
그렇다는 건 심폐소생술 중이란 얘긴데, 그건 내과 3년 차 정도라면 잘 해내야만 했다.
노상 하는 게 심폐소생술이지 않은가.
‘뭔가 다른 게 있나?’
[모르죠.]
유지상이 영상의학과 이혜영처럼 개차반이라면 또 모를까, 그 정도는 아니지 않은가.
막판에 좀 뺀질거렸을 뿐, 수련은 정상적으로 받은 상황이었다.
해서 뭐가 더 있나 하고 기다리고 있으려니 헐떡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와, 시발. 또 멈췄었어. 아……. 뒤지겠다. 수혁아. 이상해.”
“뭐가 자꾸 이상하다는 거야. 심장이 멈춰?”
“어어어.”
“의심되는 원인 질환은 뭔데?”
수혁의 말에 지상이 한숨을 쉬었다.
언어는 아니었지만/ 안에 내포된 의미를 모를 수는 없었다.
대강 번역하자면 그걸 알면 내가 너한테 전화를 했겠냐, 가오 떨어지게. 뭐 이런 뜻이겠지.
하지만 들어 보기는 해야 했다.
수혁은 현장에 있는 게 아니니까.
적어도 현장에 있는 의사가 뭘 의심하고 있는지, 근거는 뭐인지 알아야 해답을 보다 빨리 찾아갈 수 있을 터였다.
“이, 일단 환자는 원인 불명의 고혈압으로 입원해서 워크 업 중이던 환자야. 나이는 22세고…… 지금 랩만 나가고 영상이 안 되어 있어. 원래 지금 찍으려고 했는데 이래서야 이거 아, 시발 진짜.”
“랩은 어떤데?”
“그냥 루틴만 나갔어. 거기선 이상이…… 이상이 없어.”
“이상이 없다? 음.”
“알겠어?”
미쳤나 싶었다.
고혈압이 있고 랩은 정상이고 심장이 멈추는 것만 알았는데 뭔지 알겠냐고?
눈앞에 있었다면 지팡이로 후려쳤겠다 싶었다.
“일단 끊자.”
“어어. 안 돼!”
“영상 통화로 해. 나 마침 원장님하고 식사거든. 심장 문제면……. 이현종 교수님만 한 분이 없지 않냐?”
“어……. 이걸…… 다 알게 하자고?”
“그럼 어떡해. 환자 죽여?”
“아, 알았어. 알았어! 영상으로 다시 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