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4화 국시 준비 (2)
합의된 후부터는 강의 시작은 금방이었다.
다들 4년 차다 보니 어찌 되었건 아는 게 개뿔도 없지는 않아서 더 쉬웠다.
[수혁도 이참에 레지던트 수준의 지식을 한번 훑는단 느낌으로 가시죠.]
‘응, 뭐……. 아주 기본적인 내용들은 아니니까 나도 좋지.’
1년 차 대상으로 하는 강의는 오히려 더 어려운 면이 있었다.
도대체 어디까지 아는지 어디까지 모르는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더군다나 연차가 낮을수록 편차가 더 심하다 보니, 가르치는 입장에서는 더없이 난해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놈은 이미 알고 있는데, 어떤 놈은 아예 감조차 못 잡고 있으니 그렇지 않겠는가.
[그땐 그냥 낙오자는 버렸지만 이젠 안 됩니다.]
‘나도 알아. 전원 합격이 목표지?’
[네, 그렇습니다.]
‘음. 할 수 있겠지? 우리는 태화니까?’
[격년으로 한두 명은 떨어지는 사람이 나왔었다는 걸 상기하십쇼. 지나친 자부심 탓이라 사료 됩니다.]
‘하긴 그것도 그렇긴 하네.’
이게 비단 전문의 시험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었다.
의사 면허 국가시험은 더 심각했다.
태화는 거의 10년간 합격률 100%를 달성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의사 면허 시험이 그렇게 어려운 건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당연히 절대적인 난이도야 6년간 그것만 배운 사람들이 보는 시험이니만큼 상당했지만, 전체 합격률은 대체로 92% 이상을 웃돈다고 보면 되었다.
[수혁 동기 중에 아직도 낭인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있지……. 그 형…… 군대 갔어. 의무병으로.’
심지어 상대적으로 신생 의대인 칠성과 아선은 단 한 번도 달성하지 못한 적이 없을 지경이었다.
거기야 의사 국시도 따로 독서실 잡아서 죽어라 공부를 시키니 그럴 수밖에 없다지만.
태화는 자존심 때문인지 뭔지 우리는 국시 공부 따위는 따로 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고수하고 있어 거의 매해 탈락자가 나오고 있었다.
“오늘은…….”
수혁은 잠시 의대를 졸업하고도 의사가 되지 못하고 떠돌고 있는 동기 형을 떠올리다가 입을 열었다.
신현태가 따로 시험 전날까지, 그러니까 근 두 달간 빌려준 회의실에 서 있었는데 동기 전원이 들어와 앉아 있었다.
다들 백 퍼센트 수혁에게 강의 들을 마음이 있는 건 아니긴 했지만.
신현태 라인에 선 교수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준 덕이라 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오늘 잘해야, 다음에도 계속하게 된다는 뜻이었다.
“오늘은 내분비내과 쪽을 하려고 해요. 존대로 할게요, 형님 누님들도 계시고, 강의는 공식적인 거니까.”
“네. 그렇게 하시죠. 교수님.”
“하하.”
앞자리에 앉은 지상이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와 함께 수혁을 거들었다.
수혁은 가볍게 웃어 준 후, 피피티를 띄웠다.
만드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더랬다.
어차피 머릿속에 있는 내용을 구글에서 찾은 이미지와 매칭 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았기에 그랬다.
하지만 다 아는 내용이라 도움이 안 되었다고 하면 그건 또 거짓말이었다.
[실수하면 안 됩니다. 개망신이에요.]
‘오케이.’
디테일 하나하나 체크하고, 또 새로 나온 논문을 다시 한번 검토하는 과정이 어떻게 도움이 안 되겠는가.
원래 공부의 끝은 누군가를 가르쳐 보는 데 있다고 하지 않던가.
수혁은 보다 단단해진 지식 보따리를 천천히 풀어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분비내과에서 호르몬 계통이 어렵죠. 워낙에 많기도 하고 유기적이고 또…… 서로 연결이 되어 있으니까요.”
“음.”
주제는 이미 정해 놓은 마당이었다.
사람들이 뭐 크게 다르지는 않지 않은가.
특히 의대에 들어온 사람들 중에서도 내과에 들어온 사람들의 성향은 다들 비슷했다.
그렇다 보니 어려워하는 분야도 비슷했는데, 내분비 내과의 호르몬, 신장 내과의 신장 생리, 혈액질환 등등이 그러했다.
물론 심장 질환의 심전도 읽는 법이나 소화기에서 내시경 사진 판독 같은 건 정말 어려운 일이긴 했지만.
그건 단순 전문의 수준에서는 아주 심도 있게 알 필요는 없다는 것이 학회 그리고 보건복지부의 판단이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강의가 진행될 겁니다. 케이스를 유기적으로 연결해 봤는데……. 궁금하거나 의문이 있으면 언제든 손 들고 질문해 주세요.”
수혁은 거기까지 말한 후, 지금까지 그가 바루다와 함께 보았던 내분비 내과의 호르몬 질환 관련된 케이스를 하나하나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잔뜩 꼬여 있거나 헷갈리는 케이스들이 아니라 아주 전형적인 케이스들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수혁이나 바루다 수준에서는 하품이 나올 정도로 단순했다.
하지만 동기들에게는 그렇지가 않았다.
도리어 너무 전형적이다 보니 지식이 정리되는 느낌이 있었다.
또한 자주 접하는 케이스인 덕에, 이건 어쩌면 시험에 나올 수도 있겠단 생각마저 들었다.
“자, 이번 케이스는…… 73세 남자 환자입니다. 내원 3일 전부터 기운이 없고, 밥맛도 없고, 죽을 거 같다는 증상을 주소로 내원하였습니다. 당시 몰폴로지(morphology: 모습)는 이렇습니다. 아주 특징적이진 않지만……. 약간 버팔로 험프가 있죠?”
“아……. 그렇네. 저 정도면…… 할아버지가 승모만 조졌을 리는 없을 테니까.”
수혁의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환자의 승모가 위로 솟아 있었다.
건장해 보이는 느낌이라기보다는 조금 둔해 보이는 인상이 더 강했다.
아마 얼굴에 붙은 살이나 초점이 흐린 눈빛 탓일 터였다.
“네, 버팔로 험프는 지방이 어깨 위로 축적되면서 생기는 증상이죠. 이는 스테로이드를 과용했을 때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환자 히스토리만 보면 딱히 그런 게 없죠. 그래서 더 물어봤습니다.”
스테로이드는 아주 저렴한 약이면서 동시에 효과가 드라마틱한 약이기도 했다.
그렇다 보니 여기저기서 많이 썼는데, 문제는 그러다 과용이 된다는 점이었다.
“허리의 통증으로 뼈 주사를 맞았다는 진술이 있죠? 근데 보니까 이 주사를 벌써 3년도 넘게 맞았습니다. 성분은 모른다고 하고요. 뼈 주사가 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만……. 이 경우 의심해 볼 수 있는 주사는 역시 덱사, 즉 스테로이드입니다.”
“그렇네. 아……. 그렇겠다.”
“하긴. 효과가 진짜 좋기는 하지.”
“네. 환자 진술에 따르면 이 주사를 맞지 않으면 생활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최근 바쁜 일이 있어 병원에 내원하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그 말은 곧 스테로이드를 맞지 못했단 얘기죠.”
“아……. 그럼 이 증상은…….”
스테로이드는 우리 몸의 부신에서 만드는 호르몬이지 않은가.
모든 호르몬이 그러하듯 이 녀석 또한 예민하기 그지없어서, 너무 많은 양의 스테로이드가 외부에서 들어오면 자체 생산하는 능력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그 상황에서 외부에서 들어오던 스테로이드가 갑자기 끊기면 어떻게 될까.
자체적으로 만들 수 있는 역량은 이미 줄어든 상황이었기에 그저 스테로이드가 부족해질 수밖에 없었다.
“네, 부신 기능 부족(Adrenal insufficiency) 상태가 된 겁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한다 해도 증상이 좀 지나친 감이 있죠? 기운이 없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죽을 거 같다는 표현을 썼으니까요. 월남전에도 참전한 경력이 있는 분이 이만큼 극단적인 표현을 썼다는 건 이상한 일입니다.”
“아, 그렇구나. 엄살이 아니겠어.”
“하긴 나이 든 분들이…… 진짜 참을성 엄청나던데.”
진료에 있어 기본은 어찌 되었건 환자였다.
젊은 내과 의사들일수록 검사 결과, 즉 숫자와 영상에 매몰되기에 십상이었다.
그러다 보면 환자의 진술을 뒷전으로 넘기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아주 중요한 실마리를 놓치는 수가 있었다.
“네, 그래서 자세히 물어보니…… 내원 5일 전 기침, 가래, 콧물이 있었다고 합니다. 부신 기능 부전 상태에서 감기에 걸리게 된다면 어떤 것을 의심할 수 있죠?”
“부신 발증(Adrenal crisis)!”
“네. 그렇다면 환자의 증상이 다 설명이 되죠. 치료는 당연히 뭐…… 일단 스테로이드를 주입해야죠. 어찌 되었건 환자가 자체적으로 만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요.”
“오……. 이게 질환 자체는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닌데, 케이스랑 결합해서 나오니까 헷갈리네.”
“네. 그럼 이걸 토대로 아예 부신 호르몬 자체에 대한 설명을 해 드릴게요.”
수혁은 그렇게 몇 개의 케이스로 질제 질환과 증상을 만들고는 호르몬에 대한 강의를 이어 나갔다.
이렇게 하니 더욱더 머릿속에 쏙쏙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지 않겠는가.
“어떘냐? 나는 좋았어.”
“어……. 나도. 똑똑하긴 해도 우리를 가르칠 수준이 되나 했는데. 되더라. 존나 잘하네.”
“그러니까. 확실히 천재는 달러. 솔직히 좀 헷갈렸거든 나도. 약속 처방 따라가고…… 펠로우 샘한테 그때그때 물어봐서 겨우 버텼는데 이제야 개념이 싹 잡히네.”
“그럼 담에도 올 거야?”
“당연하지. 혼자 하는 것보다 효율이 훨씬 좋겠더라. 오히려…… 수혁이가 지치는 거 아닌가 싶어.”
“아……. 오늘 보니까 자료가 장난 아니더만. 저거 그냥 그대로 학생 강의나 학회 강의에 써도 전혀 문제없을 정도던데.”
그렇다 보니 후기 또한 좋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시간 남는 1년 차, 2년 차는 물론이거니와 인턴들까지 기웃거리게 되었다.
아니, 펠로우 중에서도 녹음기를 건네주며 녹화 또는 녹음을 부탁하는 이들이 있을 지경이었다.
사태가 이렇다 보니 당연히 아선과 칠성에서도 알게 되었다.
특히 프락치 아닌 프락치를 심어 둔 아선이 빨랐다.
“그래? 이수혁 선생이…… 강의를 해?”
“그렇다니까요. 진짜 선배는 천재예요. 저도 하나 들어 봤는데 드디어 신장 생리를 꿰게 됐어요.”
“1년 차가…… 너무 까부는 거 아니니? 한번 설명해 봐.”
아선의 기조실장이자 양망의 화신이 된 우창윤은 두려움을 애써 감추고 여유를 부렸다.
하지만 자신의 딸이자 1년 차에 불과한 우하윤의 설명이 너무 그럴싸한 것을 넘어 완벽하자, 긴장을 숨기지 못했다.
“음……. 이거…….”
“어때요?”
“잘하네. 우리 딸이 똑똑해서 그런가?”
“아니에요. 1년 차 중에서는 저만 들어서 그렇긴 한데, 선배들은 뭐 이제 다 도사예요.”
“음.”
아선 병원 기조실장이자 차기 원장을 노리는 몸이라면 합격률 85%라는 극악의 난이도 국시에서 전원 합격 정도는 이루어야만 했다.
거기에 더해 수석, 차석까지 아선에서 나오면 금상첨화.
하지만 수석은 수혁 때문에 반쯤 포기하고 있었는데, 태화까지 이렇게 나오면 아무래도 합격률 100%가 빛이 바랠 수밖에 없었다.
하여간 모든 분야에서 태화라고 하면 발작하는 게 아선의 윗선들 아닌가.
해서 우창윤은 슥 하고 자리를 피한 후, 태화 쪽 후배에게 연락을 했다.
어떻게 하나 녹화본이라도 보기 위함이었다.
그래 봐야 거기 성적이 나빠지진 않겠지만, 정말 훌륭하다면 이쪽을 더 조질 수는 있지 않은가.
‘이수혁…… 뭔 놈의 레지던트가 교수 열 명보다 무섭냐…….’
이미 그룹 차원에서 약속한 교수직 따위로는 끌어올 수도 없을 만한 거물이 된 수혁이 아쉽기만 했다.
‘회의 때 한 번 더 어필해야지. 그 친구는 진짜…… 천금보다 귀한 인잰데……. 위에서는 죄다 무시하고 있으니……. 이러다 만년 2등으로 굳히게 돼야 정신을 차리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