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2화 이제 전문의 (2)
회의실 안은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그나마 인사도 건네고 했던 사이인 이들조차 지금만큼은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야, 인사 안 하냐?”
“아, 네. 원…… 아니, 교수님.”
물론 이현종 정도 되면 예외로 쳐주긴 했다.
제아무리 이제 곧 인력 쟁탈전에 나서야 하는 상황이라 해도 이현종은 이현종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양보해 줄 생각이야 없었지만.
웃어는 줘야만 했다.
돈도 안 드는 일이니만큼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자, 그럼.”
중앙에 앉아 있던 김문재가 입을 열었다.
뒤에 뜬 화면을 돌아보면서였는데, 화면엔 내년 인력 현황도가 떠 있었다.
레지던트 각 연차별 인원수와 매달 배정되는 인턴 수가 쓰여 있다, 뭐 이런 말이었다.
“어휴.”
그걸 본 이현종이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불과 수년 전까지만 해도 내과도 4년제 아니었던가.
그때는 사실 이런 회의도 딱히 필요가 없었더랬다.
적어도 이현종은 회의가 있는지조차 몰랐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인력이 풍부할 때는 서로 양보도 곧잘 했고, 덕분에 모든 분과가 풍족하게 돌아갈 수 있었다.
“우리는 매달 적어도 4명, 최대 6명이야. 알았지, 수혁아.”
“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연차 하나가 통으로 날아간 만큼, 가용 인력은 4분지 3토막이 나고 말았다.
학회에서는 이래야 내과 인기가 올라간다느니 이상한 소리를 해 댔지만.
그래서 정말 지원자 숫자가 늘었냐고 하면 글쎄올시다였다.
“일단…… 올해 지원자는 1.1 대 1로 마감했었고……. 합격자 중 다른 데 간다는 사람은 없어서 제대로 마감했습니다.”
김문재는 올해 성적부터 입에 올렸다.
경쟁률 1.1 대 1.
미달 나는 과도 있는데 경쟁이면 선방한 거 아니냔 말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이곳이 여느 병원이 아니라 태화 의료원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되었다.
심지어 흉부외과마저 1.3 대 1이 나오는 병원이지 않던가.
그 와중에 1.1 대 1이라는 건 참담한 현실이었다.
“음.”
“크흠.”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여기 앉아 있는 이들이 내과 올 때까지만 해도 내과 하면 딱 공부 잘하는 애들이 가는 과라는 인식이 있었더랬다.
의사라면 바이털, 뭐 이런 인식도 있었고.
또 10년 전까지만 해도 내과는 스테디셀러라는 인식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제 내과는 비인기과가 된 지 오래였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넘어가야만 했다.
“다만 작년 1년 차 중 한 명이 개인사정으로 관둬서 총 인원은 1년 차 28명, 2년 차 27명, 3년 차 28명입니다.”
“걔 안 돌아왔어요?”
“네. 지금 피부과 알아보고 있답니다.”
“아……. 아예 수련 포기?”
“아뇨. 군대 가야죠. 중위로.”
“아…….”
김문재는 멍청한 질문을 해 댄 교수를 응시하다가 이내 말을 이었다.
중요한 시간 아닌가.
허투루 허비할 수는 없었다.
‘뭐……. 이 중엔 회식 포기할 각오하고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겠지.’
멀리 갈 것도 없이 작년에도 그러지 않았던가.
어찌나 회의가 가열이 됐던지 분과 과장들은 전원 새벽녘까지 이 자리에 있었다.
김문재는 몸싸움 안 난 게 용하단 생각까지 했을 지경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레지던트는 총원 83명입니다. 현재 태화 의료원 내과 의국의 분과는 감염, 내분비, 류마티스, 소화기, 순환기, 신장, 알레르기, 혈액종양, 호흡기…… 총 9개가 있습니다.”
분과만 9개.
과연 내과는 거대한 과라는 생각이 드는 발언이었다.
물론 이뿐만이 아니었다.
“센터는 더 많은데……. 이 중에서 레지던트 배정이 필요한 센터만 언급하겠습니다. 우선 갑상선센터.”
갑상선암은 이제 대한민국에서 가장 흔한 암 중 하나가 되지 않았던가.
일각에서는 모르고 살아도 지장 없을 만큼 자라지 않는 암도 많은데 괜히 들쑤셔서 수술하고 치료한다는 말도 있긴 하지만.
어찌 되었건 간에 진단이 되면 치료는 해야 했다.
암이 있다는 걸 알면서 그냥 둘 만큼 강단이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비단 환자뿐 아니라 의사도 그랬다.
해서 늘 환자가 몰렸고, 레지던트는 반드시 필요했다.
“중증치료센터. 중환자 의학과가 신설되기 전까지는 이 센터에서 교육을 담당하려고 합니다. 당연히 레지던트 배정이 있어야겠죠. 인력이 문제가 아니라 교육 때문에라도요.”
중중치료센터는 또 다른 이유로 레지던트가 필요했다.
중환자실만큼 환자가 휙휙 변하는 곳도 드물지 않던가.
의사가 어떤 처치를 했는지, 또 어떤 판단을 내렸는지에 따라 환자는 살 수도 있고 또 죽을 수도 있었다.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지식과 경험이 필요한데, 일반적인 내과 수련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학회 측 의견이었다.
특히 3년제가 된 지금은 더더욱 그랬다.
때문에 큰 병원들을 중심으로 교육 편제가 개편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는 이번에 신설되는 센터죠. 통합진료센터가 있습니다.”
“음.”
“으음.”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대부분 이현종, 이수혁에게 호의적인 이들이었다.
애초에 이번 분과장들 자체가 개편이 될 때 입맛에 맞는 이들로 뽑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지던트 배정이 필요한가에 대해서만큼은 이견이 있었다.
몇몇이 불만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이현종으로서도 이해는 갔다.
신생 센터가 없을 때도 인력이 없었는데, 갑자기 상당한 인력을 요구하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선배 된 입장에서 아주 조금은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아니지. 아냐. 뭔 소리야. 수혁이가 중하지. 다른 놈들이야 뭐…… 뭐가 중해.’
하지만 수혁을 돌아보자마자 바로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투사 이현종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말이었다.
“우선 감염내과입니다. 장덕수 과장님이 신청하신 인원은…… 6명이네요?”
“네. 예년과 같습니다.”
김문재가 신현태 라인을 타게 되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김문재는 토를 달아야만 했다.
인력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신현태 원장님이 원장으로 영전하면서 진료가 줄었는데도 같습니까?”
“네? 그래도 입원 환자나 협진 환자 생각하면 그렇게 과한 인원은 아닙니다.”
“거들다…… 우리 이거 사용하면서 감염 내과 로딩이 줄었다는 보고가 있는데요.”
“아, 그건…….”
“신현태 교수님이 직접 내신 논문 아닙니까. 로딩이 거의 30%가량 절감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거짓말이라고 하시는 건 아니겠죠?”
“그…….”
장덕수의 얼굴에 낭패가 깃들었다.
여기서 30% 잘려 나가면 어떤 달은 4명, 어떤 달은 5명이라는 건데.
그랬다간 신현태가 무슨 표정을 지을까?
“그렇다고 30% 절감하는 건 좀 그렇고…… 5명으로 하시죠.”
김문재는 그런 장덕수의 표정을 읽은 채, 말을 이었다.
분명 하나 깎인 건데 고맙다는 얘기가 나왔다.
최악을 너무 쉽게 각오한 탓이었다.
이현종은 장덕수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어이구, 저 등신. 착해 빠져 가지고……. 하나 깎였는데 좋단다.’
덕분에 이쪽은 하나 더 확보할 근거를 갖게 된 셈이니 마냥 안쓰러울 필요는 없었다.
그런 식으로 분과마다 분배가 계속되었다.
아무래도 혈액종양내과 쪽은 건드리기가 좀 어려웠다.
사람이 제일 많이 죽어 나가는 과인 데다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급속도로 증가하는 질환군이었기에 그랬다.
“여기는 그대로 12명으로 가고……. 소화기도 12명을 신청했네요?”
“네, 그렇습니다.”
“근데 검진 요새 대부분 검진센터에서 하지 않나요?”
“그건 그렇지만…….”
“재진 환자나 암환자도 센터에서 맡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임상 강사 센터 쪽으로 배정해서 많이 뽑은 걸로 아는데.”
“그…….”
김문재는 생각보다 철저한 조사를 하고 들어온 모양이었다.
원래도 성미가 더러운 면이 있는 데다가,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성격이다 보니 이런 거에는 또 강점을 보였다.
아무래도 부드럽기만 한 신현태 때와는 달랐다.
‘솔직히 과장은 신현태보다 이놈이 잘하는데?’
이현종마저 이런 생각이 들었을 지경이었다.
“제가 알아보니 통계가 있더라고요? 우리 장강명 센터장님이 발표하신 논문에 쓰인 건데…….”
게다가 근거를 꼭 그 과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 쓴 논문으로 대고 있었다.
분과장이라고 해도 시니어에 댈 바는 아니지 않은가.
감히 뭐라 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병동 환자들도 체계가 갖추어진 센터에서 내시경을 할 경우 더 만족도도 크고 안전했다. 이런 논조의 논문이고요……. 여기 보시면 이미 병동 환자의 60%가 센터에서 하고 있습니다. 동의서도 이쪽에서 받고요. 그럼 업무 절반이 줄었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요?”
“아니, 절반은 좀…….”
“아, 그렇다고 6명으로 줄이는 건 아니고요. 8명으로 가죠. 인턴을 하나 더 배정하겠습니다. 동의서는 솔직히 인턴이 받아도 되지 않나요?”
“음.”
“불만 없죠? 다른 분과장님들 의견 있나요?”
자기네 과가 아니라 다른 과에서 자른다는 데 무슨 불만이 있을까.
다들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애먼 소화기 분과장만 씨근덕 거렸다.
속으로 삭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김문재가 솔선수범하는 식으로 류마티스 배정 인원을 하나 줄였기 때문이었다.
사실 원장단과 달리 과장은 딱히 진료를 줄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벌인 일인지라, 정말이지 희생이라는 말이 잘 어울렸다.
“자 그럼……. 분과 분배는 다 됐고요. 갑상선센터는 환자 추이가 변화가 없고, 임상 강사 및 펠로우 수급도 같아서 변동 없이 가겠습니다. 다음은 중증치료센터입니다.”
호명된 센터장이 움찔했다.
본래 호흡기내과 전문의 출신인데, 딱히 김문재나 다른 이들과 친분이 없던 탓이었다.
아마 중환자 의학에 대한 관심이 대두되지 않았다면 센터장은커녕 교수도 어려웠을 거라는 것이 지배적인 시선이었다.
게다가 지금 김문재 교수의 인력 조정은 속이 뻔히 보이는 수작이지 않은가.
‘백 프로…… 통합진료센터로 인력 몰아주긴데, 지금.’
이 자리에 모인 교수들이 다들 나름 한가락 하는 사람들인 건 맞지만.
제일 센 사람 하나만 뽑으라고 한다면 역시나 이현종 아니겠는가.
게다가 이수혁이라는 라이징 스타까지 있었다.
시험이 너무 어려워서 군의관, 공보의 수급에 차질이 있을 거란 뉴스 보도에서도 그 와중에 만점자가 있다는 식으로 수혁을 언급했다.
설마하니 기자가 따로 관심이 있어서 그랬겠는가.
다 태화 바이오 측의 농간이 있었다고 봐야했다.
“중증치료센터는 인력 문제가 아니라 교육의 관점에서 들여다봐야 합니다.”
“네?”
“요청하신 인력은 달에 두 명인데, 이렇게 되면 우리 레지던트들 중에 한 번도 안 돌아보는 사람이 있을 거란 거죠. 이래서 되겠습니까? 4명으로 늘리겠습니다. 중환자 의학은 앞으로 대세가 될 겁니다. 태화 의료원 내과가 다른 병원 우위에 서기 위해서 주력해야 할 센터란 겁니다.”
“오…….”
중증치료센터장이 감동에 젖은 얼굴로 입을 벌렸다.
그가 감탄을 채 마저 내뱉기 전에 김문재가 말을 이었다.
“다음 센터는 통합진료센터죠. 이쪽도 인력보다는 교육의 측면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태화 의료원 탄생 이래 가장 우수한 조합 밑에서 얼마나 많이 배우겠습니까? 달에 8명을 배정하겠습니다.”
결국, 모든 것은 다 통합진료센터를 위한 빌드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