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3화 이제 전문의 (3)
8명.
내과 레지던트 다 합쳐 봐야 꼴랑 80명 남짓한 상황에서 교수 둘 있는 센터에서 8명을 데려간다고 할 줄이야.
회의실은 당연하다는 듯 술렁거렸다.
그때 이현종이 입을 열었다.
“여러 교수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레지던트들을 단순한 일꾼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반말이었다.
사석에서야 줄곧 반말을 지껄이는 이현종이긴 하지만 공석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다는 걸 생각하면 의외의 사건이었다.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현종을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이현종은 계속 말을 이었다.
아주 단호한 표정을 지은 채였다.
“우리가 왜 교수라고 불리지? 공부를 많이 해서? 훌륭한 의사라서? 아니야, 아냐. 우리가 교수라고 불리는 건 우리가 교육자라서야. 레지던트들을 가르치기 때문에 교수라고 불리는 거라고.”
진지한 상태의 이현종에게 딴지를 걸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심지어 외과 김승규나 소아과 이기자를 더한다 해도 그랬다.
요새 좀 유한 모습을 보여 줘서 그렇지, 이현종 일생일대의 업적을 발표할 때만 해도 싸움꾼이었다.
그의 업적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 흉부외과의 수술을 뺏어 오는 것이었기에 그랬다.
당시 가는 곳마다 싸움이 일었다.
흉부외과 측에서는 이현종을 사기꾼이라 부르기까지 했는데, 이게 비단 우리나라뿐만의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티칭 마인드를 탑재하고 있어야 해. 어떻게든 우리 제자들이 적어도 우리만큼은 뛰어난 의사가 될 수 있게 만들어야 될 거 아냐. 학회나 보건복지부도 그러리란 믿음에 우리 병원에 연차 당 28명의 레지던트를 배정해 준 거고.”
해외에서도 고소가 빗발쳤다.
저 사기꾼이 수술해야 할 케이스를 가로채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이현종은 비행기 타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날아가 조목조목 반박했다.
논문과 케이스 리포트 그리고 살아남은 환자의 증언까지 활용하면서였다.
그렇게 수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이현종의 기행이 실은 세계 의료계에 엄청난 업적이었음이 명명백백히 밝혀졌다.
“그런데 지금 여기 모여서 한다는 말이……. 우리가 일이 얼마나 많은데 레지던트가 이것밖에 없다, 뭐 이런 얘기뿐이야? 레지던트가 일이 너무 많으면 공부는 언제 해?”
그런 이현종이 눈을 부라리며 말을 이어 나가는 통에 다들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불만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사실 이현종도 그렇게까지 훌륭한 선생은 아니기에 그랬다.
타고나기를 천재로 태어난 이현종은 누굴 가르치는 것보다는 무언가 보여 주는 것을 훨씬 잘했다.
그 덕에 태화 의료원 심장 내과 의사들의 실력이 다른 곳보다 월등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남들보다 티칭 마인드가 좋다고 느껴 본 적은 없었다.
“우리가 더 신경 써야 할 것은 레지던트의 교육이야.”
그런데 뻔뻔스레 저런 얘기를 늘어놓고 있다니.
정말이지 이현종만 아니었으면 뒤집어 놓았을 터였다.
하지만 상대는 어떻게 봐도 이현종이었기에 다들 숨 죽인 채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썰을 푸나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우리 중에 교육을 제일 잘하는 사람이 누구지?”
여기서 이현종이지? 나지? 뭐 이딴 소리를 하면 한소리를 하려고 여러 교수들이 장전하기 시작했다.
에이 그건 아니죠.
솔직히 이현종 교수님 강의 어렵다는 평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냥 보여 주기나 해요, 가르치는 건 우리가 할 테니까.
뭐 이런 말을 하려고 준비 중이다, 이런 얘기였다.
하지만 이현종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우리 수혁이라고.”
“네?”
해서 장전하고 있던 교수들마저 오발탄을 쏴 대고 말았다.
이현종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배경음 삼아 말을 이었다.
“잘 생각해 봐. 이번 국시…… 우리 3년 차들은 100% 붙었지? 장수생들은 뭐…… 사실 이미 우리 손을 떠난 애들이잖아. 벌써 개원한 애들인데 공부를 하면 얼마나 하겠어.”
“그건…… 그건 그렇죠.”
장수생들이 들으면 섭섭하겠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벌써 사회 나간 지 오래인 애들까지 어떻게 케어가 된단 말인가.
따로 도움을 요청한다면야 당연히 응하긴 하겠지만, 일단 신경 써야 되는 존재는 레지던트였다.
“근데 이번 국시 합격률이 60%야. 보복부고 국방부고 다 뒤집어졌다고. 이 와중에 100%. 이거 누구 덕일까?”
“그…… 원래 태화의 학풍이 그…….”
“지랄 말고. 우리가 올해 말고 100% 붙은 적이 또 몇이나 된다고 학풍이야. 중풍 왔어?”
“아니, 그 교수님 아무리 그래도 지랄은 좀…….”
“뭐 인마. 너랑 나랑 학번 차이가 몇 갠데.”
“교수 회의에 학번이 왜…….”
“허……. 내가 틀린 소리 하는 데 대드는 건 괜찮아. 근데 트집 잡을 땐 학번 들이밀 거야. 이의 있는 놈 또 있어? 있으면 나랑 따로 얘기해.”
이현종은 방금 아주 살짝 대드는 시늉만 내 본 이를 노려보았다.
흉부외과와 싸울 때 보여 준 그 표정을 지어 가면서였다.
악귀가 따로 없었다.
괜히 흉부외과에서 이현종 욕은 이현종이 없을 때만 하라는 인계가 있는 게 아니었다.
감히 눈을 마주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김승규의 얼굴에 비하면야 당연히 임팩트가 없다시피 할 정도였지만.
모든 것은 상대적이지 않은가.
외과처럼 거친 사람들이 안 내과 학자들에게는 이현종도 충분히 두려웠다.
“아니, 아닙니다. 자네는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해. 실제로 이번에 시험 잘 봤잖아.”
“그게……,”
“어허, 또또. 원장님 진짜 화내시는 거 볼 거야?”
“이제 원장은…….”
“혼자 술을 마셨나. 끝까지 이러네. 교수님, 이 친구는 제가 밖에서 잘 타이르겠습니다.”
해서 누군가 총대를 메고 대들던 교수를 끌고 나갔다.
그사이 이현종은 계속 말을 이었다.
수혁을 바라보면서였다.
“내가 전문의 시험만 놓고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냐. 이수혁 교수가 레지던트 하면서 내내 아래 연차 모아 놓고 주말에 강의 가졌던 거 모르는 사람 있어?”
수혁에게 괜히 이런 걸 해 보라고 시켰겠는가.
다 쓸 일이 있으니 시킨 것이었다.
후배들의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것 외에도 이렇게 힘이 되지 않는가.
“없습니다.”
수혁이 주말마다 강의해 준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퍼진 사실이었다.
안대훈과 우하윤의 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수혁의 팬클럽 1, 2호이자 회장, 부회장을 자처하는 그들은 보는 이마다 수혁의 치적을 칭송했다.
그중에는 당연히 강의도 끼어들어 가 있었다.
강의가 후지기는커녕 너무 좋아서 전공의 시험을 앞둘 땐 인턴들까지 기웃거릴 지경이었으니 말 다 한 셈이었다.
“그래, 그렇다고. 얘는 타고나기를 교수로 타고났어. 내 아들이라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닌 건 다들 알고 있겠지?”
“네.”
“너무 또 그렇게 말하면 상처받는데.”
“아, 아닙니다.”
“아냐, 맞지. 하하. 아무튼, 그런 연고로……. 우리 통합진료센터에서 레지던트 8명 가져가는 건 정당하다 이 말이야. 어차피 내년부터는 펠로우, 임상 강사 다 충원될 거니까 그때 되면 조금씩 줄여 줄게.”
이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펠로우나 임상강사가 들어오면 레지던트를 줄여 준다는 것은 결국, 일꾼으로 부리겠다는 걸 은연중에 나타낸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토 다는 이는 없었다.
확실히 설득력이 있지 않은가.
이거 반만큼만 돼도 힘으로 밀어붙일 만한 위인이 이현종인 만큼 다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좋습니다. 그럼 레지던트 배정은 이것으로 마치죠. 다음 안건은…… 초임 교수들 연수 건인데……. 일단 전문의 자격증 취득 후 7년 이상이 지난 분들이 대상입니다.”
다음 안건부터는 긴장감이 팍 죽었다.
특히 이현종, 이수혁으로서는 더더욱 그랬다.
해당 사항이 없지 않은가.
이뿐만이 아니라 예산 또한 그러했다.
신생 센터인 만큼, 이미 다 집행이 된 마당이었다.
해서 이현종은 나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무리 빨리 회의가 끝나 가고 있다고 해 봐야 이미 8시를 훌쩍 넘어가고 있지 않은가.
수혁만 아니었으면 아예 들어오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어이구.”
“응?”
“어이구구.”
“왜…… 왜 그러세요?”
이현종은 배를 붙잡고 신음을 흘렸다.
이게 다른 모임이었다면 저놈이 미쳤나 했을 터였다.
하지만 이곳은 병원 교수들이 모인 자리였다.
다들 이현종의 나이 및 성별 그리고 기저질환을 따지고 들었다.
“이수혁 교수. 아버지 검진받은 게 언제지?”
“아……. 작년 10월이요. 그때 뭐 없었는데.”
“뭐가 없었다는 게 기저질환이 없다는 거야? 아니면 변화가 없다는 거야?”
“아예 아무것도 없어요. 꾸준히 약 먹는 것도 없고. 진단된 질환이 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복통이라? 술도 많이 안 드시는데…….”
“명치 쪽에 손 가 있는 거 아닌가? 심장 아냐? 이런 젠장. 교수님!”
예상과는 달리 소화기 교수부터 몸을 일으키고 또 자신의 뒤를 이어 심장 내과 분과장이 된 놈도 달려오기 시작하자 이현종은 조금 아찔한 기분마저 들었다.
‘현태한테 전화 걸라고 할걸. 괜히…….’
하지만 그의 꾀병을 누구보다 빨리 캐치한 것은 역시나 수혁이었다.
[하여간 이상한 인간입니다.]
‘도망치고 싶었나 보지. 회의라고 하면 질색하는 사람이잖아.’
[개망신당하게 생겼는데 어쩌죠?]
‘잘 봐 봐.’
해서 수혁은 일단 이현종을 부축했다.
수술받기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를 부축해 무게를 부하 받는 건 꿈도 못 꿀 만한 일이었는데.
이제는 가능해진 참이었다.
다른 손으로야 지팡이를 짚어야 하긴 했지만.
김선웅 교수의 덕이 참으로 크다 할 수 있었다.
“아뇨, 아뇨. 일단 제가 볼게요. 제대로 검진하려면 눕혀야 될 거 같아서요.”
“여기서 눕히지, 왜.”
“에이, 그래도 양복 입고 계신데……. 방에서 눕히겠습니다. 제가 어지간한 진단은 빠르니까요. 혹 도움이 필요하면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어……. 그래. 아냐. 혼자 가지는 말고. 레지던트 붙여 줄게.”
“아, 네. 그럼 안대훈, 우하윤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오케이, 알았어.”
수혁이 나서자마자 장강명도 나섰다.
수혁의 요청에 따라 안대훈, 우하윤도 붙여 주었다.
전임 원장이 쓰러졌다는 말에 둘은 그야말로 나는 듯이 달려왔다.
딱히 이현종 때문이 아니라, 이현종이 수혁의 아버지여서였다.
“선생님!”
“선배, 괜찮아요?”
“어? 어어. 그냥 옮기는 것만 도와줘.”
“네?”
“별거 아닌 거 같아. 그…… 뭐라고 해야 할까…….”
수혁은 이현종을 돌아보았다.
아직 회의실 문이 열려 있었다.
다른 교수들은 집중하고 있었고.
옆에는 수혁의 편이라고는 하지만, 어찌 되었건 제자들도 있었다.
‘꾀병이라는 말만 하지 말아다오…….’
수혁은 잠시 애타는 이현종의 눈을 들여다보다가 이내 말을 이었다.
“아빠가 약간 폐소 공포증이 있어서…… 사람 많고 좁은 곳에 있기가 힘들어. 계속 회의 힘들어하시던 거 왜 그러시나 했는데, 최근에 알겠더라고.”
“아…….”
“아…….”
교수치고 이현종이 회의 싫어하는 걸 모르는 사람도 없고 그걸 좋아하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 이런 비밀이 있었을 줄이야.
다들 우리는 그런 줄도 모르고라는 표정을 짓게 된 사이 수혁은 세상에서 제일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이현종을 끌고 사라졌다.
이현종이 수혁과 함께 술자리에 복귀한 것은 불과 5분 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