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8화 흔한 질환이지만 (2)
“으…….”
환자, 그러니까 75세 할머니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야말로 고통에 가득 찬 그런 신음이었다.
히스토리만 들어도 그럴 수밖에 없겠다 싶었다.
이 나이에는 그저 못 먹는 것만으로도 사경을 헤매게 되는 법인데, 장 폐색이라니.
“음.”
“으음.”
이현종과 수혁은 서로 약속이라도 했다는 듯 거의 동시에 침음을 흘리곤 입을 열었다.
“환자분.”
“환자분.”
할머니는 둘 중 누구를 봐야 할지 갈팡질팡하다가, 이내 이현종을 바라보았다.
모름지기 의사라면 그래도 흰머리가 좀 있어야 믿음이 가지 않던가.
적어도 저 세대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네…….”
수혁에게는 별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이현종의 문진 스킬이 그에 비해 떨어지지는 않을 테니까.
그저 대답하는 것에서 정보를 빠짐없이 빼낼 수 있다면, 그걸로 되었다.
[목소리가 말라 있군요.]
‘성대가 메말랐겠지. 탈수 증상 중 하나야.’
[결절이나 마비가 있어 보이진 않습니다.]
‘응, 탁음이 있긴 하지만 진동의 미비로 인한 것이지, 아예 접하는 부위가 변한 건 아냐.’
수혁이 바루다의 도움을 받아 환자의 상태가 어떠한지 하나하나 분석해 나가는 사이, 이현종이 말을 이었다.
“언제부터 배가 아팠습니까?”
“아유……. 오래되었어요. 어머니 말이, 6.25 피난길에 먹을 걸 제대로 못 먹었대요. 그때부터 계속…… 속은 안 좋았어요.”
6.25라.
노인들에게 문진을 시도할 때 주의해야 할 것 중 하나가 있는데, 그게 바로 언제부터 이랬는지 물을 때 시점을 명확히 할 것이었다.
그렇지 않았다가는 이렇게 역사를 듣게 되는 수가 있었다.
재빨리 본론으로 돌아오려다 심기를 너무 거스르게 되면 의사 환자 관계가 어그러질 수도 있기에 주의에 주의를 거듭해야만 했다.
물론 이현종은 노호한 의사였기에 실수 따위는 없었다.
“그렇군요. 이거야 원……. 험악한 세월이었죠, 그렇죠?”
“그렇…… 죠.”
“이번에 더 심해지게 된 건 언제부터인가요? 그러니까…… 입원까지 할 정도로 나빠지게 된 거요.”
“아, 그거요. 그건…… 글쎄요, 그렇게 오래되지는…….”
“한 달이 넘었나요?”
“아유, 그 정도는 아닙니다.”
의사가 생각하는 ‘오래되었다’와 환자가 생각하는 ‘오래되었다’가 일치할 확률이 몇이나 될까.
아마도 0에 수렴할 터였다.
의사에게 오래되었다의 의미는 질환마다 다르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오해가 발생하기도 하는데, 다행히 이현종은 역시나 경험이 많은 사람이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러니까 환자가 노하지 않도록 신경 쓰면서도 정보를 쏙쏙 빼내었다.
“그럼 보름은 넘었나요?”
“아…… 아뇨. 한 열흘?”
“그때부터 지금까지 증상이 어떤가요? 더 심해졌나요?”
대부분의 염증 질환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심해지는 법이었다.
물론 가벼운 염증 질환이라면 그 반대의 경과를 밟겠지만 대체로 참을성이 강한 노인이 입원까지 한 경우라면 배제해도 좋았다.
“어……. 아프긴 더 아파졌죠.”
“변은 그때 이후로 본 적이 있나요?”
“열흘 전에…… 그때 한번 보고 난 후로는 한 번도요.”
“원래는 잘 보셨다고 했죠?”
“네.”
“그 전날에도 잘 보셨나요?”
“네? 아, 네. 윽……. 아이고…….”
장 폐색에서 통증은 상당히 특징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장의 운동이 있을 때 갑작스럽게 확 하고 찾아왔다가, 이내 수그러드는 양상을 보인다는 말.
혹 급하게 변의가 찾아왔는데 도무지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을 때를 생각해 보면 쉬웠다.
다만 그보다 더 아프고, 언제 끝날지 기미가 안 보인다는 것이 차이일 뿐이었다.
이현종은 눈에 띄게 고통스러워하는 환자를 내려다보며, 잠시 손을 잡아 주었다.
냉소적인 사람이라면 저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을 수도 있겠지만.
여러 연구에서 친밀한 접촉이 실제 임상 경과를 호전시킨다는 보고가 있었고, 특히 통증 경감에 눈에 띄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약은 들어가고 있지?”
당연히 이현종은 그런 논문에만 의지할 생각은 없었다.
그의 시선을 받은 이길영이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진통제는 들어가고 있습니다.”
“뭐 들어가지?”
“일단은 엔세이드 계통으로 쓰고 있습니다.”
“위출혈 위험은 고려했고?”
“네. 내시경 보셔서 아시겠지만…… 깨끗합니다.”
“그래.”
마약성 진통제를 쓰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얼마간 합격점을 줄 수 있었다.
마약성 진통제는 그 자체로 변비를 일으킬 수 있기에 그랬다.
이미 장폐색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 일차 진통제로 사용하기엔 여러모로 문제가 있었다.
물론 다른 진통제들이라 해서 부작용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하여간 뭘 써도 그것보단 나았다.
“수혁아.”
이현종은 붙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조금 빠져나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는 수혁을 돌아보았다.
내내 환자를 들여다보고 있던 수혁이 답했다.
“네.”
“일단 어떤 상황인 거 같냐?”
“환자 진술에 따르면 열흘 전 갑자기 장폐색이 발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전과 후의 증상 변화가 명확해요.”
“그래, 어떤 질환이 이게 가능할까?”
“음…….”
갑작스러운 장폐색을 노인에서, 그것도 어떤 전조 증상도 없이 일으킬 수 있는 게 과연 뭐가 있을까?
우선 종양은 배제해야만 했다.
CT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무언가가 서서히 자라나서 막는다는, 가장 흔한 원인은 적어도 이 자리에서만큼은 전혀 가능성이 없었다.
‘뭐지? 짚이는 거 없어?’
[전혀요. 문제는…….]
‘문제는?’
[저 양반은 감을 잡아 가는 거 같군요.]
‘뭐? 벌써?’
수혁은 바루다의 말에 화들짝 놀란 채 이현종을 바라보았다.
이현종은 미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원체 나이에 비하면 표정 변화가 많은 양반이라 일상적인 표정 아닌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같이 오랜 시간을 지내 온 수혁은 알 수 있었다.
저건 어떤 실마리를 잡았을 때 나오는 미소라는 것을.
“수혁아, 어떤 질환 같아? 갑작스레 장폐색을 하필이면 이 위치에서 일으킬 수 있는 질환이 뭐가 있을까?”
게다가 질문까지 던지기 시작하지 않았나.
이른바 이현종의 퀴즈 타임이었다.
원래 이현종은 질문과 답변을 통한 진단을 즐겨 했는데, 어느 때고 즐기진 않았다.
별 의미 없을 거 같은 질문은 오히려 싫어했기에 그랬다.
한데 원래 의미 있는 질문은 뭘 알아야 나오지 않던가.
그 말은 이현종은 이미 답을 알아냈거나, 어느 정도 근접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괴물인가.’
[제가 없는데도 저 정도라니. 게다가…… 이현종은 소화기도 아니지 않나요?]
‘그러니까.’
[하여간 놀랄 시간은 별로 없을 거 같습니다. 이현종, 시계를 두드리기 시작했어요.]
‘오케이.’
성질 급하기로 따지면 온 병원에서 둘째가라고 해도 서러울 지경 아닌가.
게다가 의학에 관련된 것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누구보다 수혁이 잘 알았다.
아들이랍시고 정말 여기저기 같이 많이도 다녔으니까.
‘일단 하필 이곳이라고 했어. 십이지장이라는 위치가 중요하다는 거야.’
[동의합니다. 십이지장 해부학적 특징을 3D로 표현합니다.]
해서 수혁은 최선을 다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바루다 또한 마찬가지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혁의 머릿속에는 환자의 십이지장이 떠올랐다.
바루다의 공언대로 3D로 표현이 되어 있었는데, 각 특징이 주르륵 나열되어 있었다.
어디서부터 어디로 연결되는 조직인지, 무엇이 이곳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기능은 무엇인지 등등.
그중에서 수혁의 눈길을 끈 것은 바로 무엇이 십이지장으로 연결되어 있는가였다.
‘위야 뭐 당연히 그렇고. 담관하고 췌장관도 연결이 되어 있지.’
[네, 그렇습니다. 그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담낭즙하고 췌장의 분비물이 십이지장으로 흘러들어 온다는 거지.’
[수혁, 액체는 물리적인 폐색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맞는 말이었다.
물은 폐색을 일으킬 수 없었다.
물론 담즙이 물보다야 조금 뻑뻑하기는 하겠지만, 그래 봐야 액체는 액체였다.
하지만 수혁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만 있지 않았다.
담낭에서 흘러나올 수 있는 건 단지 담즙뿐인 것은 아니었기에 그랬다.
‘담석이라면 어떨까.’
[담석이요? 음.]
담석은 담낭에서 형성되는 돌을 의미했다.
편도결석과는 달리 아주 단단했다.
구성 성분 자체가 달라서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까맸고, 또 영상에서는 투명하게 보일 수 있었다.
반사성 반투과성(radiolucent)을 지닌 돌들도 있기에 그랬다.
즉 CT에서는 그저 빈 공간으로 보일 수 있지만, 내시경으로 들어가 보면 까맣게 보일 수 있다는 얘기였다.
[타당한 의견으로 생각이 됩니다만……. 담석이 흘러나오려면 애초에 담낭관보다 작아야 되는데, 십이지장은 담낭관보다 굵습니다. 논리적으로…….]
‘아냐, 영상 띄워 봐.’
[알겠습니다. 음.]
바루다가 생각하기에도 그럴싸하긴 했는데 한 가지가 걸렸다.
십이지장을 막을 만큼 굵은 돌이었다면, 담낭관부터 틀어막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 아까 데이터화해 둔 영상을 들여다보자마자 생각이 바뀌었다.
돌이라 생각하고 보자, 십이지장의 테두리가 우둘투둘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서였다.
[이건…….]
‘돌이 하나가 아니라면 가능해. 우르르 쏟아지듯 나와서 엉키면 막히는 거지. 노인은 젊은 사람에 비해 연동 운동이 약하니까…… 충분히 가능해.’
[아직 케이스 리포트에서도 보지 못한 내용이지만 논리적으로 가장 타당합니다. 이걸로 가시죠?]
‘오케이.’
수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토론을 멈추었다.
시계를 보니 불과 1분도 채 안 지나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현종의 얼굴엔 실망이 스쳐 지나가는 중이었다.
하여간 성질 급한 사람이라는 말을 애써 집어삼킨 채, 수혁은 입을 열었다.
“담석…… 가능성이 있겠습니다.”
머릿속으로 떠올리고만 있을 땐 아주 그럴싸한 진단이었다.
하지만 막상 입 밖에 내고 보니 좀 황당했다.
이길영이 듣기에 특히 그랬다.
“네? 담석이요?”
담석은 흔한 질환이었다.
이 때문에 시행하는 담낭 절제술이 하루에도 몇 개씩 있을 정도였다.
다른 과도 아닌 일반 외과 펠로우인 이길영에게는 좀 당혹스러웠다.
어렵게 용기 내서 통합진료센터에 전화했는데 답변이 이렇다고?
“음. 계속해 봐.”
하지만 이현종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표정은 별반 차이가 없었지만, 수혁은 그가 애써 미소를 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입가의 주름이 푸들푸들 떨려 오고 있지 않은가.
“환자의 증상은 급작스럽게 발생했습니다. 이는 만성적인 질환이 원인이 될 확률이 적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CT에서 종괴가 없다는 것 또한 이를 뒷받침합니다.”
“좋아.”
“음.”
수혁의 프레젠테이션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훌륭했다.
이길영도 어느새 불만을 지우고 듣고 있었다.
듣다 보니까 또 그럴싸하긴 해서였다.
“하지만 CT에서 아무 이상이 없다는 건 아닙니다. 일단 영상을 띄워 볼까요?”
하지만 영상 얘기가 나오니까 또 기분이 이상해졌다.
‘아니……. 이하언, 김진실 교수 판독을 뒤집겠다 이건가?’
지가 뭔데 감히....
뭐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별난 일은 아닐 터였다.
여전히 이길영에게 수혁은 어리지만 똑똑한 의사일 뿐이었고, 이하언은 대가였으니까.
‘평가하는 얼굴이네.’
[차차 저런 얼굴 마주하는 일도 줄어들 겁니다.]
수혁은 그런 이길영을 바라보다가 이내 미소 지었다.
긴가민가했던 것이 다시 영상을 보는 순간 해소되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이제부터는 날아다닐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