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8화 성과 보고 (2)
“음.”
“그렇군요.”
“흐음.”
적자라 해도 반응이 그렇게 격정적이진 않았다.
이례적인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적은 돈이 들어간 것도 아닌데, 적자가 났으면 당연히 책임자 욕먹고 한바탕 난리가 났어야 하지 않은가.
‘길게 보고 간다고 하셨지?’
하지만 남지연 사장은 김다현 사장의 말을 되새기고 있을 뿐, 별로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회사 생활이라는 건 위에서 까라는 대로 까면 되는 일 아니겠는가.
다만 사장이니만큼 걱정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주주 설득이 되려나? 결국, 다 우리 돈 태운 건데.’
가뜩이나 태화 생명은 그리 사정이 좋지 못했다.
일단 실손 보험으로 인한 손해가 막심했다.
그나마 이건 모든 보험사 사정이 같은 데다가, 남지연이 사장이 되기 전에 일어난 일이나 별 상관은 없겠지만.
그렇게 상황이 안 좋은데 비영리 자회사에 몇백억을 박고 적자를 봤다는 보고가 나오면 주주들이 싫어할 것이 뻔했다.
‘멀리 보고 하는 일입니다’라는 말로는 절대 설득이 안 될 터였다.
뭔가 다른 가시적인 성과, 즉 가능성이라도 있어야만 했다.
“적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때 이현종이 입을 열었다.
퍽 예상외의 타이밍이었기에 오히려 이목이 집중되었다.
수혁 또한 그랬다.
[기대는 안 되는군요. 회의에서는 별로 도움이 된 적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응, 아무리 아빠라지만……. 다들 그렇다고 하더라.’
그렇다고 표정에 막 반전이 일지는 않았다.
이현종의 회의에서의 모습은 어지간히 저평가되어 있었기에 그랬다.
“돈 벌려고 연 센터가 아니지 않습니까? 애초에 그건 열기 전에 피차간에 설명이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제 착각입니까?”
“아, 아닙니다. 센터장님. 적자를 문책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자리 잡는 과정이기도 하고…… 센터장님 말씀대로 돈 벌려고 연 센터는 아니죠.”
“네. 이 센터는 우리 병원 전체의 생존율 그리고 평판을 올리기 위한 센터입니다. 맞습니까?”
“네. 그렇게 얘기하고 연 센터죠.”
신현태로서는 절대 이현종에게 이런 식으로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없기에, 지금은 마이크를 남지연이 잡고 있었다.
서로 사이가 썩 괜찮은 편인지라 표정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해서 이현종은 이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다들 내가 싸움꾼인 줄로만 알지. 하지만 나도 정치하려고 하면 잘한다고?’
자기애가 강한 사람이니만큼 한시도 쉬지 않고 자기 자신을 북돋아 주었다는 얘기였다.
“그러니 중요한 건 다른 쪽의 성과입니다. 우선…… 그저 협진만으로 해결되었던 케이스는 차치해 두겠습니다. 이건 해당 과나 또는 다른 과에 협진이 들어갔어도 조속히 해결되었거나 별 차이 없이 해결되었을 가능성이 큰 케이스들이 뒤섞여 있어서요.”
“네, 센터장님. 듣고 있습니다.”
남지연 외에 다른 이사들은 조금 반발이 있을 수도 있었다.
모두 김다현 이사의 사람들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적자인 상황을 모두가 두 손 놓고 바라보고 있고 싶지는 않아서였다.
게다가 적자를 본 주제에 당당하기 짝이 없는 이현종이 마음에 들지도 않았다.
얼마나 유명한 의사인 줄은 모르겠다만, 하여간 태화 생명에서 붓는 돈이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 아닌가.
“다들 조용히.”
하지만 웅성거림이 번지기도 전에 남지연이 제지시켰다.
사장으로서, 또 김다현의 심복으로서 태화 의료원을 유심히 살펴 온 그녀 아닌가.
그러다 보니 싫어도 눈앞의 이현종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단지 추구한 방향이 달라 거대 회사의 리더가 되지 못했을 뿐, 속한 집단에서 이룬 성과는 대기업 회장 못지않았다.
기껏해야 이사밖에 못 된 사람들에게 헐뜯음을 받을 이유는 없었다.
“각 과에서 해결이 안 되어 전과 받아 해결한 환자가 총 22건입니다. 이 중 12건이 내과, 7건이 응급실, 2건이 외과, 1건은 소아과입니다.”
“아……. 소아과 환자도 있었습니까?”
“네. 22건의 케이스 중 8건은 케이스 리포트 준비 중입니다. 그만큼 드문 병도 있지만 이렇게까지 빠르게 진단된 적이 없기에 경험을 공유하고자 하는 차원에서입니다.”
“저는 의사가 아니라 그렇게만 말씀하시면 잘 이해가 안 갑니다.”
말과는 달리 남지연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태화 생명의 미래는 결국, 태화 의료원에 있을 거라는 김다현 사장의 말을 뼛속 깊이 숙지하고 있었기에 그랬다.
숙지한다고 해서 동의한다는 건 아니긴 했다.
건강보험 체계가 흔들려야 한다는 뜻인데 이 굳건한 체계가 어찌 흔들릴까?
‘뭐, 난 의문을 가져야 하는 위치가 아직 아니지.’
하지만 남지연은 충신이었다.
해서 의료원에 대해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었고, 덕분에 이현종의 말을 죄 이해하고 있었다.
더 설명을 요구한 것은 이 자리에 있는 다른 이사진들을 위해서였다.
“네. 우선 태화 의료원에서 1년에 보고되는 케이스 리포트가 대략 200개에서 250개가량 됩니다. 전국 각지의 어려운 환자가 몰리는 병원이어서 이런 것이지, 보통의 대학 병원에서는 50개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센터에서 2부 만에 8개를 발표하게 된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희귀 질환을 놓치고 있었단 얘기가 되죠. 실제로 진단명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열이라거나 스트레스로 인한 증상 또는 불상의 염증 등이 붙은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그거 전부가 이런 건 아니겠지만…….”
“확실히 놓치는 부분이 있었겠군요. 그걸 지금 이 센터에서 잡아내고 있는 거고요?”
“네, 그렇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다른 병원에서도 전원 온 케이스가 있습니다.”
“오.”
전원이라는 말에 남지연뿐 아니라 다른 이사진들의 얼굴도 조금 밝아졌다.
케이스 리포트가 많아졌다는 것도 좋은 소식이긴 하지만, 그건 그래 봐야 학술적인 성과 아닌가.
여기 모인 사람들이 교수면 또 모르겠지만 숫자가 중요한 이사들에게는 별반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전원은 얘기가 완전히 달랐다.
뭐가 되었건 다른 병원의 환자를 뺏어 왔다는 얘기고 동시에 그 병원에서 자체적으로 태화 의료원이 상대적으로 우수하다는 것을 인정한 지표가 되기에 그랬다.
“부산대에서 한 케이스, 그리고 양산대에서 한 케이스가 있습니다. 두 케이스는 모두 희귀 질환으로 분류되고 케이스 레포트 감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죠?”
“유례없이 빠르게 진단하였고 성공적으로 치료했습니다. 해당 사항에 대해서는 각 병원에 피드백을 보낸 바 있습니다. 아직은 학회 차원에서 논의가 안 되었지만……. 논의가 시작되면 훨씬 더 활발해질 것이라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건…… 그건 좋은 일이군요. 언제쯤 그렇게 될까요?”
“4월부터 춘계 학회가 있습니다. 그 전에 더 케이스를 쌓아서 아예 학회에서 발표를 해 버릴 작정입니다.”
“오.”
남지연은 물론이거니와 신현태 그리고 이수혁 또한 놀랄 눈으로 이현종을 돌아보았다.
보통 학회에서 어떤 센터나 어떤 병원의 성과를 보고하는 건 정말로 드문 일이었기에 그랬다.
신성한 학문을 다루는 자리에서 자칫 홍보성 발표로 인식되거나 하면 어쩐단 말인가.
그간 쌓아 온 학자로서의 명성에 누가 될 수 있었다.
‘이미 없던 자식도 생긴 마당에 광고 한 번 더 한다고 뭐가 어떻게 되겠어?’
이현종이라고 해서 그런 걱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이미 버린 몸이라 여기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맨날 나는 의학이랑 결혼한 몸이라고 입 털고 다녔던 것의 반작용이었다.
게다가 아직 대한민국 사회는 숨겨진 자식에 대한 관용이 거의 없었다.
아니, 어떤 사회라 해도 거즘 그럴 터였다.
게다가 이현종은 그렇지 않아도 질투심을 유발하는 사람이었다.
‘새끼들. 남몰래 아랫도리 더럽게 놀리는 놈이라고 했다지?’
그나마 수혁이 진짜 천재였다는 것이 서서히 밝혀지면서 조금씩 평가가 나아지고 있다고 하지만 선비를 자처하는 이들에게는 여전히 욕을 먹고 있다는 말도 들었다.
다행인 것은 이현종의 자기애가 보통을 넘는다는 것이었다.
욕하는 놈들이 대붕(大鵬)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 자신한테는 아무 잘못도 없다는 생각이 단 한 번도 흔들린 적 없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이 센터에 와야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에 한둘이 아닐걸. 칠성이나 아선이라고 해도 예외는 없어. 나랑 수혁이…… 우리 둘에 비할 수 있는 천재는 없으니까.’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누군가가 있었다면 이쯤에서 쌍욕을 내뱉었을 터였다.
칠성과 아선 또한 세계적인 병원으로 발돋움하고 있지 않은가.
솔직히 태화와 차이가 있나도 미심쩍을 수준이었다.
근데 둘 말고는 진단 못 할 사람이 많다니.
어이가 없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현종은 그렇게 굳게 믿고 있다는 점이었고, 또 수혁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었다.
“네, 통합진료센터 운영의 성과에 대해 발표할 생각입니다.”
“어……. 그거 혀…… 아니, 센터장님이 직접 하실 건지요?”
신현태는 우려 가득한 얼굴로 이현종에게 물었다.
저 양반이 가벼워 보일 땐 한없이 가벼워 보이지만 그래도 학자로서의 품위만큼은 무겁게 여기는 위인 아닌가.
그런데 누가 봐도 얼굴 깎이는 짓을 직접 하겠다고 나서니 믿기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저 사람이 이제 막 크기 시작한 수혁이한테 이걸 시킬 거 같진 않은데…….’
물론 수혁이 하게 된다면 더더욱 타격이 클 것이었다.
천재, 천재 하고 있긴 하지만 아직 전국적인 명성은 얻지 못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교수 되고 하는 첫 발표가 광고라면 어떻게 될까?
굳이 상상해 보지 않더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명확했다.
“당연하죠. 내가 그럼 이걸 수혁이한테 시킬까?”
“아니……. 혀…… 아니, 센터장님은 명성 높은…….”
“뭐, 이 발표가 못할 발표가 될까 봐서?”
“그…… 아무래도 그렇죠.”
“아냐. 아니, 아닙니다, 원장님. 운영하기 전에도 기대가 있었는데 해 보니까 알겠어요. 이 센터…… 그러니까 저와 이수혁 교수의 조합은 수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어요. 이걸 널리 알리는 게 왜 잘못입니까?”
“그…….”
잘못이라는 생각은 신현태도 하지 않았다.
다만 걱정이 될 뿐이었다.
의사 집단에 속한 사람이니만큼 그 집단의 속성을 너무도 잘 알아서였다.
많이 배우고 또 얌전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니만큼 대개는 점잖은 편이지만 다들 잘난 사람들이라는 게 문제였다.
무조건 내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너무 많았고, 그래서 집단 내에서 튀는 사람이 있으면 좀처럼 가만히 두질 못했다.
치과 의사나 한의사에 비해 다른 일 하는 의사들이 적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는데, 교수 체면에 병원 광고를 하면 일단 모두가 색안경을 끼고 볼 것이 뻔했다.
“할 말 없으면 관두시죠. 제가 발표할 거예요. 이건 널리 알려야 합니다. 그…… 뭐냐, 그래. 홍익인간 같은 거야.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한다니까?”
“그런 논조로 할 건 아니죠?”
“문제가 있나요?”
“사이비 같은데…….”
“허?”